☀ 마명보살님이 쓰신 대승기신론을 원효스님께서 해석하신 대승기신론 소, 별기 책입니다
[논]은 마명보살님이 쓰신 것이고 [소],[별기]는 원효스님께서 논에 대해 주석을 달아놓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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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 자 우 환
'앎 識' - '놈 自' - 근심할 憂 - 근심 患
식자우환이다.
대승기신론... 이라는 말 자체가 식자우환의 실 사례이며, 석가모니를 비롯하여 소위 '깨달은 자, 붓다'의 말을 단 한구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리석은 중생들의 망상이기 때문에 우이독경이며, 어불성설이며, 단견이며 편견이며 소견머리 없는 자들의 헛소리들이다.
앞서 '니가르주나' -용수보살- 의 공과 무가 같다는 말에 대해서 어리석은 중생의 해석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왜, 끊임없이 붓다. 깨달음에 대해서 주장(해석한다는 자들의 무지)하는 인간들의 지식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는 단견, 편견, 소견이며 더 나아가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며 더 나아가 인간들에게 살길을 버리고 죽은 길을 인도하는 사악한 행위라고 단정 짓겠는가?
사실 '용수보살' 이라는 중생의 말이나, 대승기신론으로써 '대승'을 주장하는 '마명보살'이라는 자의 글을 보니... 역시 어리석은 중생이며, 석가모니를 비롯한 모든 붓다의 가르침의 본질을 훼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이다.
인간 지식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道'다.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조차 불가능한 자들이 깨달음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며 말재간을 부리는 것들이니, 죄가 있다면 그것들이 가장 무거운 죄를 짓는 중생들이다.
인간들의 진리. 도. 깨달음. 붓다... 에 대한 모든 모든 모든. 모든... 주장들... 모든 모든 모든 지식들... 모든 모든 모든 앎들... - 是人行邪道 시인행사도- 이며, 不能見如來 불능견여래- 다. 왜냐하면 若以色見我 약이색견아- 이며, 以音聲求我 이음성구아- 이기 때문이다.
--- 도가의 기본교육. 수행프로그램의 내용이 "명색의 동일시..." 에 대한 강의이다. 만약에 상근기 인물이 '명색의 동일시'에 대한 강의를 들거나, 일념명상으로써 '일념을 깨친다면' 인간들의 모든. 모든. 모든. 모든 지식이 '시인행사도'라는 사실에 대해서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다.
'소리와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이 금강경 사구게의 가르침이다. 사실은 불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곧 '소리와 형상으로는 절대로 깨달음 비슷한 것 조차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들의 느낌이나 감정... 지식 따위들은 모두 망상이기 때문에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의 뜻을 깨달아 알아야만 '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불교라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일 자체가 '시인행사도'이다.
여타 종교나부랭이들과 수행단체들 또한 그러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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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없는 지식이 필요하다면, 위의 설명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되겠지만... 진정으로 도, 진리에 대해서 이해 하고자 한다면... 가치 없는 내용이며 쓸모 없는 말들이니... 참고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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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疏〕
第一標宗體者 然夫大乘之爲體也 처음에 종체를 나타낸다는 것은 대승의 체를 말한다.
蕭焉空寂 湛爾沖玄 대승의 체는 고요하면서 적막하고 맑으면서 깊고 그윽하다.
玄之又玄之 豈出萬像之表 깊고 또 깊으나 어찌 만상의 밖에서 벗어나 있겠으며
寂之又寂之 猶在百家之談 고요하고 또 고요하나 오히려 백가의 말 속에 있다.
非像表也五眼不能見其軀 만상에서 벗어나 있지 않으나 오안으로도 그 체를 볼 수 없고
在言裏也四辯不能談其狀 백가의 말 속에 있으나 사변으로는 능히 그 모습을 말할 수 없다
欲言大矣 入無內而莫遺 크다고 말하려 하나, 안이 없는 것에 들어가도 남음이 없고
欲言微矣 苞無外而有餘 작다고 말하려 하나, 밖이 없는 것을 감싸도 남음이 있다.
引之於有 一如用之而空 있다고 말하려 하면 진여는 이것을 사용하여 공하고
獲之於無 萬物乘之而生 없다고 말하려 하면 만물은 이것을 타고서 생한다.
不知何以言之 强號之謂大乘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할 수 없이 대승이라 한다.
(別記)
其體也 대승의 체!
曠兮其若太虛而無其私焉 그 체가 비어있음이 태허와 같아서 사사로움이 없고
蕩兮其若巨海而有至公焉 광대함이 거대한 바다와 같아서 지극히 공평하다.
有至公故 動靜隨成 지극히 공평하므로 동정(움직임과 고요함)이 따라서 이루어지고
無其私故 染淨斯融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염정(더러움과 깨끗함)이 융화한다.
染淨融故 眞俗平等 염정이 융화하기 때문에 진속(진제와 속제)이 평등하고
動靜成故 昇降參差 동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승강(오르고 내려옴)이 차이가 있다.
昇降差故 感應路通 승강이 차이가 있어서 감응의 길이 통하고
眞俗等故 思議路絶 진속이 평등하기 때문에 사의(생각으로 헤아림)의 길이 끊어졌다
思議絶故 사의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體之者乘影響而無方 대승을 체득한 자는 현상계의 모습과 소리를 타지만 머무름이 없으며
感應通故 감응이 통하기 때문에
祈之者超名相而有歸 대승을 구하는 자는 명상(이름과 모습)을 초월하여 근원으로 돌아간다.
所乘影響 非形非說 타는 바 영향은 나타낼 수 있음도 아니고 설명할 수 있음도 아니다.
旣超名相 何超何歸 이미 명상을 초월하였는데 무엇을 초월하고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是謂無理之至理 이를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이며
不然之大然也 그렇지 않으면서 크게 그러하다고 이른다.
疏〕......
凡此等輩中衆典之肝心 一以貫之者 其唯此論乎
故下文言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 應說此論
此論之意 旣其如是
開則無量無邊之義爲宗 合則二門一心之法爲要
二門之內 容萬義而不亂 無邊之義 同一心而混融
是以開合自在 立破無礙 開而不繁 合而不狹 立而無得 破而無失
是���馬鳴之妙術 起信之宗體也
......
무릇 이와 같은 경전들 가운데 여러 경전의 핵심을 하나로 꿰뚫은 것은 오직 기신론뿐이다.
그러므로 아래 문장에서는 “여래의 광대하고 심오한 법과 한량없는 뜻을 총섭하기 위하여 응당 이 논을 설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논의 뜻은 이미 이와 같아서,
펼치면 무량무변(한량없고 끝이 없는)의 뜻을 종지로 삼고, 합치면 이문일심의 법을 요체로 삼는다.
이문 안에는 만 가지 뜻을 받아들여도 어지럽지 않으며, 한량없는 뜻은 일심과 같아서 혼융(섞이어 융화됨) 되어있다.
이는 펼치고 합치고가 자재하며 뜻을 세우고 부수는 것이 걸림이 없고 펼쳐도 번잡하지 않으며 합쳐도 협소하지 않고 세워도 얻을 것이 없으며 부수어도 잃을 것이 없으니
이것은 마명보살의 오묘한 기교이며 기신론의 종체이다.
〔疏〕
次釋題名 言大乘者 大是當法之名 廣苞爲義 乘是寄喩之稱 運載爲功... (생략)
다음은 제목의 명칭을 해석한 것이다. 대승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는 법에 해당하는 이름이며 넓게 감싼다는 뜻이고, 승은 비유를 든 명칭이며 우주만법을 실어 나르는 공능을 말한다.
〔~疏〕
言起信者 依此論文 起衆生信 故言起信 信以決定謂爾之辭 所謂信理實有 信修可得 信修得時有無窮德 此中信實有者 是信體大 信一切法不可得故 卽信實有平等法界 信可得者 是信相大 具性功德熏衆生故 卽信相熏必得歸原 信有無窮功德用者 是信用大 無所不爲故
‘기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기신론>에 의지하여 중생의 믿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기신’이라고 한다.
‘신’은 결정코 그러함을 이르는 말로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는 ���이요, 닦아서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이며, 닦아서 얻었을 때 무한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체대를 믿는 것이며, 일체법은 얻을 수 없음을 믿기 때문에 평등법계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닦아서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상대를 믿는 것이며, 성공덕을 구족하여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에, 상대가 훈습하면 반드시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무한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은 용대를 믿는 것이며, 용대를 믿는다는 것은 하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믿는 것이다.
【論】
歸命盡十方 온 세상에
最勝業徧知 色無礙自在 救世大悲者 수승한 업과 두루 아는 지혜와 색이 걸림 없이 자재하시며, 대자비로 세상을 구하시는 부처님(불보)과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저 색신의 체상과 법성진여의 바다(법보)와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여실하게 수행하는 이(승보)에게
목숨을 다해 귀의합니다.
〔疏〕
初歸敬中有二 歸命二字 是能歸相 盡十方下 顯所歸德 能歸相者 敬順義是歸義 趣向義是歸義 命謂命根 總御諸根 一身之要 唯命爲主 萬生所重 莫是爲先 擧此無二之命 以奉無上之尊 表信心極 故言歸命 又復歸命者還源義 所以者 衆生六根 從一心起 而背自原 馳散六塵 今擧命總攝六情 還歸其本一心之原 故曰歸命 所歸一心 卽是三寶故也
처음 귀경 중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귀명’ 두 글자는 귀의하는 자(能歸)의 모 습이고, ‘진시방’ 이하는 귀의하는 대상(所歸)의 덕을 나타낸다. '능귀상'이란 공경하고 순응하는 뜻이 ‘귀’의 뜻이고, 일심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 '귀'의 뜻이다. ‘명’은 목숨을 말하며, 이 목숨은 몸의 모든 기관을 다스린다. 한 몸의 요체는 오직 이 목숨이 주가 되며, 살아있는 것의 가장 소중한 것도 이것을 앞서는 것이 없다. 이렇게 둘도 없는 목숨을 다해 위없는 존귀함(삼보)을 받들어서 신심의 지극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귀명'이라한다.
또한 ‘귀명’은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있다. 왜냐하면 중생의 육근은 일심을 따라서 생겨났으나 자신의 근원을 등지고 육진(색성향미촉법)에 끄달려서, 이제 목숨을 다해 육정을 총섭하여 근본인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기 때문에 '귀명'이라고 한다. 귀의하고자 하는 대상은 일심이며 이 일심이 삼보이기 때문이다.
【論】
爲欲令衆生 除疑捨邪執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을 없애고 잘못된 집착을 버려서,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불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疏〕
次述造論大意 造論大意不出二種 上半明爲下化衆生 下半顯爲上弘佛道 所以衆生長沒生死之海不趣涅槃之岸者 只由疑惑邪執故也 故今下化衆生之要 令除疑惑而捨邪執 汎論疑惑 乃有多途 求大乘者所疑有二 一者疑法 障於發心 二者疑門 障於修行 言疑法者 謂作此疑 大乘法體爲一爲多 如是其一 則無異法 無異法故 無諸衆生 菩薩爲誰發弘誓願 若是多法 則非一體 非一體故 物我各別 如何得起同體大悲 由是疑惑 不能
發心
다음은 논을 지은 대의이다. 논을 지은 대의는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위의 반은 하화중생(���생구제)을 하기 위함임을 밝히고, 아래의 반은 상홍불도(불도를 널리 폄)를 하기 위함임을 밝혔다.
왜냐하면 중생이 오랜 기간 생사의 바다에 빠져서 열반의 언덕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의혹과 사집 때문이다. 지금 중생 교화의 핵심은 의혹을 제거하고 사집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의혹을 널리 논하면 많은 길이 있으나 대승을 구하는 자의 의심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을 의심하여 발심에 장애가 되고 둘째는 교문을 의심하여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이다. 법을 의심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승의 법체가 하나인가 여럿인가? 만약 대승의 법체가 하나라면 다른 법체가 없을 것이고, 다른 법체가 없다면 모든 중생은 없을 것인데,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널리 서원을 발원할 것인가? 만약 법체가 여럿이라면 일체가 아니며,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와 내가 각자 다를 것인데 어찌 동체대비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이런 의혹으로 말미암아 발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言疑門者 如來所立敎門衆多 爲依何門初發修行 若共可依不可頓入 若依一二 何遣何就 由是疑故 不能起修行 故今爲遣此二種疑 立一心法 開二種門 立一心法者 遣彼初疑 明大乘法唯有一心 一心之外更無別法 但有無明迷自一心 起諸波浪流轉六道 雖起六道之浪 不出一心之海 良由一心動作六道 故得發弘濟之願 六道不出一心 故能起同體大悲 如是遣疑 得發大心也
교문을 의심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래가 세운 교문이 많아서 어떤 문에 의지하여 처음 발심 수행을 해야 하는가? 만약 여러 교문에 다 함께 의지해야 한다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없고 만약 한두 가지에 의지해야 한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 것인가? 이와 같은 의심 때문에 수행을 ��� 수 없어서 지금 이 두 가지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일심법을 세워 두 가지 문을 열었다. 일심법을 세운 것은 처음의 의심을 버리고 대승법은 오직 일심뿐임을 밝혀서 일심 이외에 다시 다른 법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단지 무명이 스스로 일심을 미혹해서 모든 파도를 일으켜 육도를 유전하게 됨을 밝히는 것이다. 비록 육도의 파도를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진실로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짓기 때문에 널리 구제의 서원을 발할 수 있다. 육도는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를 일으켜 이와 같이 의심을 버리고 큰 마음을 발할 수 있다.
開二種門者 遣第二疑 明諸敎門雖有衆多 初入修行不出二門 依眞如門修止行 依生滅門而起觀行 止觀雙運 萬行斯備 入此二門 諸門皆達 如是遣疑 能起修行也 捨邪執者 有二邪執 所謂人執 及與法執 捨此二義 下文當說 下化衆生竟在於前也
두 가지 문을 연 것은 두 번째 의심을 없애는 것이다. 여러 교문이 비록 많지만 처음 수행해 들어가는데 두 가지 문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진여문에 의지하여 지행을 닦고, 생멸문에 의지해서 관행을 일으킨다. 지관을 쌍으로 사용하면 만행이 이에 갖추어져 두 가지 문에 들어가면 모든 문에 다 통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의심을 없애서 능히 수행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사집(잘못된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두 가지 사집이 있는데 인집과 법집이다. 이 두 가지의 집착을 버리는 것은 아래 글에서 설할 것이다. 하화중생은 앞에서 마치다.
此下二句 上弘佛道 除彼二邊之疑 得起決定之信 信解大乘唯是一心 故言起大乘正信也 捨前二執分別 而得無分別智 生如來家 能紹佛位 故言佛種不斷故也 如論說云 佛法大海 信爲能入 智慧能度 故擧信智 明弘佛道 偈首言爲 下結云故者 爲明二意故 造此論也 歸敬述意竟
이 아래 두 구절은 위로 불도를 널리 펴서 이변(법과 교문)의 의심을 제거하고 결정코 그러하다는 믿음을 일으켜, 대승은 오직 일심뿐임을 믿고 이해시키기 때문에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앞에 두 가지 집착 분별(인집과 법집)을 버려서 무분별지를 얻고 여래가에 태어나 부처의 지위를 잇기 때문에 불종자가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논에서 말하기를 “불법의 큰 바다는 믿음으로 능히 들어갈 수 있으며, 지혜로 건널 수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때문에 믿음과 지혜를 들어 불도를 널리 펼 것을 밝혔다.
【論】
摩訶衍者總說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法 二者義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 依於此心顯示摩訶衍義 何以故 是心眞如相 卽示摩訶衍體故 是心生滅因緣相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 所言義者 則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體大 謂一切法眞如平等不增減故 二者相大 謂如來藏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用大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 一切諸佛本所乘故 一切菩薩皆乘此法到如來地故
대승은 총괄적으로 설명하면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이고 둘째는 의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심을 말한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일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다 포괄하며 이 마음에 의지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 어째서인가? 심진여상은 대승의 체를 보이기 때문이고, 심생멸인연상은 대승의 자체와 상 ․ 용을 보이기 때문이다. ‘의’라고 말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체대이다. 이른바 일체법은 진여 로써 평등하여 증감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상대로 여래장이 무량성공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용대로 일체 세간,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부처님도 본래 이 법에 의지하였고, 일체 보살 모두 이 법에 의지하여 여래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疏〕初中所言法者謂衆生心者 自體名法 今大乘中一切諸法皆無別體 唯用一心爲其自體 故言法者謂衆生心也 言是心卽攝一切者 顯大乘法異小乘法 良由是心通攝諸法 諸法自體唯是一心 不同小乘 一切諸法各有自體 故說一心爲大乘法也
처음 문장 가운데 ‘법이라 하는 것은 중생심을 말한다.’ 라고 한 것은 자체를 법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이제 대승 가운데 일체법은 다른 체가 없고 오직 일심으로 그 자체를 삼기 때문에 ‘법이라 하는 것은 중생심을 말한다.’ 라고 한 것이다. ‘이 마음이 일체를 포섭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대승법이 소승법과 다름을 나타낸다. 진실로 이 마음은 모든 법을 통섭하는데 모든 법의 자체가 오직 일심이기 때문이다. 소승이 일체 제법은 각각 자체가 있다고 하는 것과는 같지 않아서 일심을 대승법이라고 말한다.
何以故下 依門別立 此一文內含其二義 望上釋總義 望下立別門 然心法是一 大乘義廣 以何義故 直依是心顯大乘義 故言何以故 下釋意云 心法雖一 而有二門 眞如門中有大乘體 生滅門中有體相用 大乘之義莫過是三 故依一心顯大乘義也
‘어째서인가?’ 이하는 문에 의지하여 각각 세운 것이다. 이 한 문장 안에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위로는 총체적인 뜻을 해석하였고 아래로는 각각 문을 세웠다. 그러나 마음의 법은 하나이지만 대승의 뜻은 넓은데 어떤 뜻으로 이 마음에 ��지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내겠는가? 그러므로 ‘어째서인가?’ 라고 말한 것이다. 아래에서 해석하기를 마음의 법은 비록 하나이지만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진여문 안에는 대승의 체가 있고 생멸문 안에는 체 ․ 상 ․ 용이 있다고 하였다. 대승의 뜻은 이 세 가지를 넘지 않기 때문에 일심에 의지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言能示摩訶衍自體者 卽是生滅門內之本覺心 生滅之體 生滅之因 是故在於生滅門內 然眞如門中直言大乘體 生滅門中乃云自體者 有深所以 至下釋中 其義自顯也
言相用者含有二義 一者能示如來藏中無量性功德相 卽是相大義 又示如來藏不思議業用 卽是用大義也 二者眞如所作染相名相 眞如所起淨用名用 如下文言眞如淨法實無於染 但以無明而熏習故則有染相 無明染法本無淨業 但以眞如而熏習故則有淨用也 立法章門竟在於前
‘능히 대승 자체를 보인다고’ 말한 것은 생멸문 안에 있는 본각심이니, 이 본각심이 생멸의 체와 생멸의 인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생멸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여문 안에 있는 것은 직접 대승의 체라 말하고 생멸문 안에 있는 것은 자체라고 말한 것은 깊은 까닭이 있다. 아래 해석분 가운데에 이르면 그 뜻이 스스로 드러날 것이다. ‘상 ․ 용’이라고 말한 것은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여래장 안의 무량성공덕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상대의 뜻이며, 여래장의 불가사의한 업용을 나타내는 것이 용대의 뜻이다. 둘째는 진여가 일으킨 염상(오염된 모습)을 이름하여 상이라 하며, 진여가 일으킨 정용(청정한 작용)을 이름하여 용이라 한다. 이것은 아래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여의 정법에는 실로 염(오염)이 없지만 단�� 무명에 훈습되어 염상이 있는 것이고, 무명의 염법은 본래 정업(청정한 업)이 없지만 단지 진여가 훈습하기 때문에 정용이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다. 입법장의 문을 앞에서 마치다.
大義中 體大者在眞如門 相用二大在生滅門 生滅門內亦有自體 但以體從相 故不別說也
'대'의 뜻 중에 체대는 진여문에 있고, 상대와 용대는 생멸문에 있다. 생멸문 안에도 또한 '자체'가 있지만 단지 체는 상을 따르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았다.
【論】
顯示正義者 依一心法有二種門 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 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 此義云何 以是二門不相離故
바른 뜻을 나타내 보인다고 하는 것은 일심법에 의지하여 두 가지의 문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심진여문이고 둘째는 심생멸문이니 이 두 가지 문 모두 각각 일체법을 총섭하고 있다. 이 뜻이 무엇인가? 두 가지 문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疏〕
初中言依一心法有二種門者 如經本言 寂滅者名爲一心 一心者名如來藏 此言心眞如門者 卽釋彼經寂滅者名爲一心也 心生滅門者 是釋經中 一心者名如來藏也 所以然者 以一切法無生無滅 本來寂靜 唯是一心 如是名爲心眞如門 故言寂滅名爲一心
처음 문장 중에 ‘일심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고 말한 것은, 능가경에 “적멸은 일심을 이름하며, 일심은 여래장이라 이름한다.” 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기신론>에서 심진여문이라는 것은 저 능가경에서 ‘적멸은 일심을 이름 한다.’ 라고 말한 것이고, 심생멸문이라는 것은 저 경에서 ‘일심은 여래장이라 이름한다.’ 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생겨난 것도 아니며 멸하��� 것도 아니기 때문이며 본래 적정하여 오직 일심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심진여문이라고 말하며 ‘적멸은 일심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한 것이다.
又此一心體是本覺 而隨無明動作生滅 故於此門如來之性隱而不顯 名如來藏 如經言如來藏者是善不善因 能徧興造一切趣生 譬如伎兒變現諸趣 如是等義在生滅門 故言一心者名如來藏 是顯一心之生滅門 如下文言 心生滅者依如來藏故有生滅心 乃至此識有二種義 一者覺義 二者不覺義 當知非但取生滅心爲生滅門 通取生滅自體及生滅相 皆在生滅門內義也
또 일심의 체는 본각이지만 무명에 따라 움직여 생멸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생멸문에서는 여래의 성품이 숨어 나타나지 않아서 여래장이라 이름한다. 이는 능가경에서 “여래장은 선과 불선의 원인으로써 일체 취생을 두루 일으켜 만든다. 비유하자면 마술사가 만상을 변형시켜 나타내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와 같다. 이런 뜻이 생멸문에 있기 때문에 ‘일심은 여래장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일심의 생멸문을 나타내며 아래 글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심생멸은 여래장에 의지하여 생멸심이 있으며, 내지 이 식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각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의 뜻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생멸심만을 취해서 생멸문이라 하지 않고, 생멸자체와 생멸상을 모두 취하여 다 생멸문 안에 있다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二門如是 何爲一心 謂染淨諸法其性無二 眞妄二門不得有異 故名爲一 此無二處 諸法中實 不同虛空 性自神解 故名爲心 然旣無有二 何得有一 一無所有 就誰曰心 如是道理 離言絶慮 不知何以目之 强號爲一心也 言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者 釋上立中是心卽攝一切世間出��間法
두 문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일심이라고 하는가? 염정의 모든 법은 그 성품이 둘이 없으며 진망 두 문이 다르지 않아서 하나라고 한다.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의 진실이며, 허공과 같지 않아서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러운 앎(性自神解)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이름 한다. 그러나 이미 둘이 없는데 어찌 하나가 있을 수 있으며 하나도 있는 바가 없는 데 무엇을 취하여 마음이라 하는가? 이와 같은 도리는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은 것이니 무엇이라 이름 해야 할지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일심이라 한다. 이 ‘두 가지 문 모두 각각 일체법을 총섭하고 있다.’ 라고 말한 것은, 위 입의분 중에서 ‘마음이라는 것은 일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다 포괄한다.’라고 말한 것을 해석한 것이다.
上直明心攝一切法 今此釋中顯其二門皆各總攝 言以是二門不相離故者 是釋二門各總攝義 欲明眞如門者染淨通相 通相之外無別染淨 故得總攝染淨諸法 生滅門者別顯染淨 染淨之法無所不該 故亦總攝一切諸法 通別雖殊 齊無所遣 故言二門不相離也 總釋義竟
위에서 바로 ‘마음은 일체법을 포괄함’을 밝혔으나 이제 이 해석분 중에서는 ‘두 가지 문 모두 각각 총섭함’을 나타냈다. ‘두 문이 서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두 문이 각각 총섭하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진여문은 염정의 통상이며 통상 밖에 따로 염정이 없기 때문에 염정의 모든 법을 총섭할 수 있다. 생멸문은 각기 염정을 나타내며 염정의 법은 포함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법을 총섭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통상과 별상이 비록 다르지만 한 가지도 버릴 바가 없기 때문에 ‘두 문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총체적인 뜻을 해석함을 마친다.
〖論〗心眞如者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 所謂心性不生不滅 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心念 則無一切境界之相 是故一切法從本已來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 畢竟平等 無有變異 不可破壞 唯是一心 故名眞如 以一切言說 假名無實 但隨妄念 不可得故
심진여는 일법계,대총상,법,문,체이다. 소위 마음은 불생불멸하며 일체제법은 오직 망념으로 인하여 차별이 생길 뿐이다. 만약 마음이 망념을 떠나면 일체 경계의 상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언설상을 여의고, 명자상을 여의고, 심연상(마음이 대상을 반연하는 것)을 여의어서, 필경 평등하여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이 없어 파괴할 수도 없으며 오직 일심일 뿐이다. 따라서 이름을 진여라 한다. 일체 언설은 가명이며 실체가 없어 단지 망념을 따라서 있을 뿐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疏〕初文有三 一者略標 二者廣釋 其第三者往復除疑 略標中言卽是一法界者 是擧 眞如門所依之體 一心則是一法界故 此一法界通攝二門而今不取別相之門 於中但取總相法門 然於總相 有四品中 說三無性 所顯眞如 故言大總相 軌生眞解 故名爲法 通入涅槃 故名爲門 如一法界擧體作生滅門 如是擧體爲眞如門 爲顯是義 故言體也
처음 글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략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는 널리 풀이했으며, 셋째는 반복하여 의심을 제거하였다. 대략 나타내는 중에 ‘일법계’라고 말한 것은 진여문이 의지하는 체를 든 것이다. 일심은 일법계이기 때문이며, 일법계는 두 문을 통섭하지만 지금은 별상의 문을 취하지 않고 총상 법문만을 취하였다. 총상에는 사품이 있고 그 중에 삼무성이 나타��는 진여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대총상’이라고 말한다. 모범으로써 참된 이해를 내기 때문에 ‘법’이라 하고 전체가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문’이라 이름한다. 일법계 전체가 생멸문이 되는 것과 같이 일법계 전체가 진여문이 되는 것이다. 이런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체’라고 한다.
〔疏〕 此下廣釋 於中有二 一者顯眞如體 二者釋眞如名 初中有三 一者當眞實性以顯眞如 二者對分別性而明眞如絶相 三者就依他性以顯眞如離言 初中言心性者 約眞如門論其心性 心性平等遠離三際 故言心性不生不滅也
이 아래는 널리 풀이한 것이니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여의 체를 나타내고, 둘째는 진여의 이름을 해석한다. 처음 진여의 체를 나타내는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실성으로 진여를 나타내고 둘째는 분별성에 대하여 진여의 절상을 밝힌다. 셋째는 의타성으로 진여의 이언(離言)를 나타낸다. 처음 중에 ‘심성’을 말한 것은 진여문에 의하여 심성을 논한 것이다. 심성은 평등하여 삼제(과거, 현재, 미래)를 멀리 떠났기 때문에 심성은 불생불멸한다고 말한다.
〔疏〕第二中有二句 初言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者 是擧徧計所執之相 次言若離心念卽無一切境界相者 對所執相 顯無相性 猶如空華 唯依眼病而有華相 若離眼病 卽無華相 唯有空性 當知此中 道理亦爾
두 번째 중에는 두 구절이 있으니 처음에는 ‘일체제법이 오직 망념에 의지하여서 차별이 있다’고 한 것은 변계소집상을 든 것이요 다음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경계상이 없다’고 말한 것은 소집상에 대하여 무상성을 나타낸 것이다. 마치 허공에 핀 꽃이 오직 눈병에 의하여 꽃의 모습이 있을 뿐이며, 만약 눈���이 없다면 꽃의 모습도 없고 오직 공성만이 있을 뿐이다. 이 중의 도리도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疏〕第三中有三句 先約依他性法以明離言絶慮 次依離絶之義 以顯平等眞如 後釋平等離絶所以 初中言是故一切法者 謂從緣生依他起法 離言說相者 非如音聲之所說故 離名字相者 非如名句之所詮故 離心緣相者 名言分別所不能緣故 如虛空中鳥迹差別 謂隨鳥形空相顯現 顯現之相實有差別 而離可見之相差別 依他起法當知亦爾 隨諸熏習差別顯現 而離可言之性差別 旣離可言可緣差別 卽是平等眞如道理 故言畢竟平等 乃至故名眞如 此是第二顯眞如平等
세 번째 중에도 세 구절이 있다. 먼저 의타기성에 의하여 이언절여(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음)를 밝히고 다음은 이언절여의 뜻에 의지하여 평등진여를 나타냈으며, 뒤에는 평등이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은 까닭을 해석한다.
처음 중에 ‘그러므로 일체법이’라고 말한 것은 연을 따라서 의타기법을 생한 것을 말한다. ‘이언설상(말의 모습을 떠남)’이라고 말한 것은 음성으로 말한 바와 같지 않기 때문이고 ‘이명자상’(글자의 모습을 떠남)은 명구로 설명하는 바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심연상’(마음으로 대상을 반연하는 모습을 떠남)은 명언분별로는 능히 반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 가운데에 새의 자취가 차별을 만드는 것과 같이 새의 모습에 따라서 허공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며, 나타난 모습은 실로 차별이 있지만 볼 수 있는 모습은 차별을 떠나 있다. 의타기법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훈습을 따라서 차별이 나타나지만 말할 수 있는 성품은 차별을 떠나 있다. 이미 말로 설명할 수 있거나 반연할 수 있는 차���을 여의게 되면 이것이 곧 평등진여의 도리이다. 때문에 필경 평등이라고 하며 내지 진여라 이름한다. 이것은 두 번째 진여평등을 나타낸 것이다.
〔疏〕以一切下釋其所以 所以眞如平等離言者 以諸言說唯是假名 故於實性不得不絶 又彼言說但隨妄念 故於眞智不可不離 由是道理故言離絶 故言乃至不可得故 顯體文竟
‘왜냐하면 일체의’ 이하는 까닭을 풀이한 것이다. 진여가 평등하여 말을 떠난 까닭은 모든 언설은 가명이기 때문에 실성에서는 끊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언설은 망념을 따를 뿐이기에 진지에서는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도리로 말미암아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었음을 말하며 ‘내지 얻을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체를 나타내는 글을 마친다.
【論】言眞如者 亦無有相 謂言說之極 因言遣言 此眞如體無有可遣 以一切法悉皆眞故 亦無可立 以一切法皆同如故 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 故名爲眞如
진여라고 말하는 것은 모습이 없으니 이는 언설의 궁극은 말로써 말을 버리는 것을 이른다. 진여의 체는 버릴 것이 없으니 일체법은 모두 진여이기 때문이며 또한 세울 것도 없으니 일체법은 모두 같은 진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설명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어서 진여라고 이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疏〕釋名中亦三 初標立名之意 所謂因言遣言 猶如以聲止聲也 次正釋名 此眞如體無有可遣者 非以眞體遣俗法故 以一切法悉皆眞故者 依他性一切諸法 離假言說 故悉是眞 悉是眞者 不壞差別卽是平等 是平等故 無別可立 故言一切皆同如故 當知以下 第三結名 直顯眞如竟在於前
진여라는 이름을 해석하는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름을 세운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말로써 말을 버린다는 것은 소리로써 소리를 그치게 한다는 비유와 같다. 다음은 이름을 바로 해석한 것이다. ‘진여의 체는 버릴 것이 없으니’ 라고 한 것은 진여의 체가 세속법을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법은 모두 진여이기 때문이다’는 것은 의타기성의 일체법은 가설된 언설을 떠나있기 때문에 모두 다 진여라고 하는 것이다. ‘모두 진여다’라고 하는 것은 차별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평등하다는 뜻이며 평등하기 때문에 따로 세울만한 것이 없어서 ‘일체법은 진여로써 같다’고 한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하는 세 번째 이름을 맺은 것이니 진여를 바로 나타내는 것을 앞에서 마치다.
【論】問曰 若如是義者 諸衆生等 云何隨順而能得入 答曰 若知一切法 雖說無有能說可說 雖念亦無能念可念 是名隨順 若離於念 名爲得入
묻기를 만약 진여의 뜻이 이와 같다면 모든 중생은 어떻게 수순해서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가? 답하기를 만약 일체법을 비록 설명하지만 설명할 것도 설명할 수도 없음을, 비록 생각하지만 생각할 것도 생각할 수도 없음을 안다면 이것이 수순이며 만약 생각을 떠난다면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疏〕往復疑問中 言云何隨順者 是問方便 而能得入者 是問正觀 答中 次第答此二問 初中言雖說雖念者 明法非無 以離惡取空見故 無有能說可說等者 顯法非有 離執著有見故 能如是知 順中道觀 故名隨順 第二中言離於念者 離分別念 名得入者 顯入觀智也
반복된 의문 중에 ‘어떻게 수순하는가?’ 라고 말한 것은 방편을 묻는 것이며 ‘들어갈 수 있는가?’ 라는 것은 정관을 묻는 것이다. 답을 하는데 차례로 두 가지 의문�� 답할 것이다. 첫 번째 대답에 ‘비록 설명하지만’ ‘비록 생각하지만’이라고 말한 것은 법이 없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이는 악취공견을 떠났기 때문이며 ‘설명할 것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한 것은 법이 있지 않음을 나타낸 것으로 유에 집착하는 소견을 떠났기 때문이다. 능히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중도관을 따르는 것이므로 이것을 수순이라 이름한다. 두 번째 대답에 ‘생각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분별하는 생각을 떠났다는 것이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한 것은 관지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論】
다시 이 진여라는 것은 언설로 분별하면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이며 구경에는 실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실불공이며 진여 자체에 번뇌가 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論】
공이란 본래부터 일체 염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의 차별상을 여읜 것을 이른다. 허망한 심념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 자성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유와 무를 함께 갖춘 모양도 아니며, 같은 모양도 아니고 다른 모양도 아니며 같은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다른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고 같고 다른 모양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총설하면 일체 중생에 의지하여 망심이 있음으로써 생각 생각마다 분별하여 모두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고 말하지만 만약 망심이 없다면 실로 공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疏〕
먼저 공을 밝히는데 세 구절이 있다. 대략 설명하는 것과 널리 해석하는 것, 셋째는 총결하는 ���이다.
처음 중에 ‘일체염법과 상응하지 않는다’ 고 말한 것은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여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법은 차별상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은 대상에 집착하는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허망한 심념이 없다’고 한 것은 집착하는 견해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즉 여의었다는 뜻으로 공을 풀이하였다.
【論】
불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법체가 공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는 진심을 뜻하며, 진심은 항상 불변하고 청정한 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불공이라 한다. 또한 취할만한 모습이 없으므로 망념을 떠난 경계는 오직 증득함으로써 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疏〕
불공을 풀이하는 중에 세 구절이 있다. 처음은 공문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미 법체가 공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낸다’고 말한 것이고 다음은 불공을 나타낸다. ‘즉 이는 진심을 뜻하며 내지 불공이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공과 불공이 두 가지 차이가 없음을 밝혔다. 비록 불공이라 하지만 모습이 없어서 불공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분별하여 반연하는 경계를 여의어서 오직 무분별지가 증득됨으로써만이 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論】
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지하여 생멸심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은 생멸과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름하여 아리야식이라 한다.
〔疏〕
처음 중에 세 구절이 있다. 첫째는 체를 나타냈고, 둘째는 모습을 분별하였으며, 셋째는 이름을 세웠다. 처음 중에 ‘여래장에 의지하여 생멸심이 생겨난다’고 한 것은 자성청정심을 여래장이라 이름 하는 것이니, 무명의 바람이 움직임에 ���해 생멸을 일으키므로 생멸은 여래장에 의지한다고 말한 것이다.
(別記)
그러나 불생멸심은 생멸심과 더불어 심체가 둘이 아니다. 단지 두 가지 뜻으로 마음을 취하여 둘이 되기 때문에 ‘여래장에 의하여’ 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움직이지 않는 물이 바람이 불어서 움직이는 물결을 일으킴과 같이, 동정이 비록 다르지만 물의 체는 같아서 고요한 물에 의지해서 움직이는 물결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도리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疏〕
사권능가경에서 “여래장이 무시로부터 악습에 훈습된 것을 식장이라 이름한다.”고 하고 또 “찰나란 것은 식장을 이름하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別記)
이 논에서 생멸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식장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소의(의지처)인 여래장과 능의(의지하는 마음)인 생멸심을 모두 취하여 합한 것을 심생멸문이라 한다.
따라서 ‘심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여 생멸심이 생겨난다’고 말한 것은 여래장을 버리고 생멸심을 취하여 생멸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래 글에서 ‘이 식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 것과 같이 두 가지 뜻 모두 생멸문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疏〕
‘이른바’ 이하는 두 번째로 모습을 분별한 것이다. ‘불생불멸’ 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의 여래장을 말하며, 불생멸심이 움직여서 생멸을 일으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을 ‘더불어 화합한다’고 이름한다. 아래 글에서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인하여 물결이 일어나지만 물의 모습이 바람의 모습과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고 내지 널리 설한 것과 같다. 이 중 에 물의 움직임은 바람의 모습이고 움직일 때마다 젖어 있는 것은 물의 모습이다. 물 전체가 움직이므로 물은 바람의 모습을 여의지 않으며, 움직이는 것마다 젖어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결은 물의 모습을 여의지 않는다. 마음 또한 이와 같아서 불생멸심 전체가 움직이므로 마음(불생멸심)은 생멸상(생멸하는 마음의 현상)을 여의지 않고, 생멸의 상(생멸하는 마음의 현상)은 신묘한 앎 아닌 것이 없어서 생멸은 심상(마음의 현상)을 여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서로 여의지 않아서 ‘더불어 화합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별기에서 이르기를 마음의 생멸은 무명에 의지해서 이루어지고 생멸의 마음은 본각을 따라서 이루어지니 두 가지 체가 없는 것이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아서 화합이라 하는 것이다.
〔~疏〕
이는 불생멸심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하는 것이지 생멸이 불생멸과 화합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고 하는 것은 불생멸심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불생멸심은 생멸심과 다르지 않지만 항상 불생멸성을 잃지 않기 때문에 생멸은 불생멸심과 같은 것도 아니다. 또 만약 같은 것이라면 생멸식상이 다 멸할 때에 마음의 신묘한 체도 응당 따라서 멸하게 될 것이니 이는 단변에 떨어지는 것이고, 만약 다른 것이라면 무명의 바람에 의해 훈습되어 움직일 때 정심의 체는 응당 연을 따르지 않게 되니 이는 상변에 떨어지게 된다. 이 두 변을 여의어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다.
별기에서 이르기를 비록 두 가지 뜻이 있지만 심체는 둘이 아니며, 여기서는 두 가지 뜻을 합하여 둘이 아닌 마음을 아리야식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論】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각의(覺義) 뜻이고 둘째는 불각의(不覺義) 뜻이다.
【論】
‘각의’ 라고 말한 것은 심체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하며 망념을 여읜 모습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법계일상이며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 이 법신에 의지하여 본각이라 이름 한다. 어째서인가? 본각의 뜻은 시각의 뜻에 상대해서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본각과 같으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이 있는 것이고 불각에 의지해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疏〕
처음 문장 중에 ‘심체가 망념을 여의었다’고 한 것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하며 불각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허공계와 같이’라고 한 것은 오직 어두운 마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광명이 법계를 두루 비추어 평등하여 둘이 없는 것이다. 이 아래 글에서 ‘대지혜의 광명의 뜻은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어째서인가’ 이하는 두 번째로 뜻을 풀이하였다. 이는 시각에 대해서 본각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본각의 설명을 마친다.
〔疏〕
다음은 시각을 풀이하였으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본각에 대해서 불각이 일어나는 뜻을 설명하고, 다음은 불각에 대해서 시각의 뜻을 나타냈다. 이 중에 큰 뜻은 시각이 불각을 상대하고 불각은 본각을 상대하고 본각은 시각을 상대해서 있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서로를 상대해서 있는 것이므로 자성이 없는 것이고 자성이 없다면 각 또한 있는 것이 아니며, 각이 있지 않은 것은 서로를 상대해서 있기 때문이다. 상대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각이 없지 않은 것이요, 각이 없지 않기 때문에 ��각’이라 이름 하는 것이지 자성이 있어서 ‘각’이라 이름 하는 것이 아니다. 대략 이 각의 뜻을 밝힘을 마친다.
(別記)
‘각의 뜻’이라 말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본각과 시각이다. 본각이란 이 심성이 불각상(불각의 모습)을 여읜 것을 말하니 각조의 성품을 이름 하여 본각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아래 글에서 ‘이른바 자체에 대지혜 광명의 뜻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시각이란 심체가 무명의 연을 따라서 움직여 망념을 일으키다가 본각의 훈습력으로 점점 각의 작용이 있다가 마침내 구경에 이르러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니, 이를 시각이라 말한다.
불각의 뜻을 말하는 것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불각이고 둘째는 지말불각이다. 근본불각이란 아리야식 내에 근본무명을 불각이라 한다. 아래 글에서 말하기를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무명의 불각이 일어난다’고 한 말과 같다. 지말불각은 무명이 일으킨 일체의 염법 모든 것을 불각이라 한다.
아래 글에서 ‘일체의 염법은 모두 불각의 모습이다’고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식상의 차별로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의 뜻이 다름을 나타내는 문에 의지하면 아리야식 중에 오직 본각 및 근본불각이 있을 뿐이며, 만약 식체는 둘이 없어 지말을 포괄하여 지말이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문에 의한다면 저 시각 및 지말불각 또한 아리야식 내에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하여 위에서 ‘이 아리야식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이 두 가지 뜻 모두를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아래에서 풀이한 문장 중에는 본각과 시각 및 근본불각과 지말불각의 뜻을 모두 든 것이다.
(~別記)
묻기를 “심체에 단지 불각이 없기 때문에 본각이라 해야 하는가 , 아니면 심체에 각조의 작용이 있는 것을 본각이라 해야 하는가? 만약 단지 불각이 없는 것을 본각이라 한다면 또한 각조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는 불각일 것이고, 만약 각조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본각이라 한다면 이 각은 번뇌를 끊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만약 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각조의 작용이 없을 것이고, 만약 번뇌를 끊음이 있다면 범부가 없을 것이다.”
대답하기를 “심체에는 단지 어둠(불각)만 없는 것이 아니라 또한 명조의 작용도 있다. 이 명조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또한 번뇌를 끊을 수도 있다. 이 뜻은 어떤 뜻인가? 만약 먼저 미혹했다가 나중에 깨어난 것을 각이라고 본다면 시각에 각이 있는 것이지 본각 중에는 각이 없다. 만약 본래부터 미혹하지 않은 것을 각으로 본다면 본각이 각이 되는 것이고 시각은 각이 아니다. 번뇌를 끊는다는 뜻 또한 이와 같다. 먼저는 번뇌가 있다가 나중은 없어지는 것을 이름 하여 끊음이라 한다면 시각은 끊음이 있고 본각은 끊음이 없다. 본래부터 번뇌를 여읜 것을 끊음이라 한다면 본각은 끊은 것이고 시각은 끊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뜻에 의한다면 본래 끊었기 때문에 본래 범부도 없는 것이다.
(~別記)
이는 아래 글에서 ‘일체 중생은 본래 열반보리의 법에 들어가서 상주해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비록 본각이 있어서 본래 범부가 없지만 아직 시각이 있지 않아서 범부가 있다. 그러므로 과오가 없는 것이다. 만약 네가 본각이 있어서 본래 범부가 없다고 말한다면 끝내 시각이 없을 것이니 무엇을 상대해서 범부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 범부도 또한 끝내 시각이 없다면 본각도 없는데 어떤 본각에 의지해서 범부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응�� 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불각이 없고, 불각이 없기 때문에 시각도 없으며 시각이 없기 때문에 본래 본각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본각이 없다는 쪽에 이른 것은 근원이 본각이 있음에서 비롯한 것이고, 본각이 있다는 것은 시각이 있다는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시각이 있다는 것은 불각에서 비롯한 것이고 불각이 있다는 것은 본각에 의지한 것이다.
이는 아래 글에서 ‘본각의 뜻은 시각의 뜻에 상대해서 말하는 것이니 시각은 본각과 같은 것이다.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이 있고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말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전전하며 서로 의지하니 모든 법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있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님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別記)
묻기를 본각의 성품은 전체가 염정의 인성(원인)이 되는가, 단지 모든 정법(청정한 법)의 성품에만 해당하는가? 만약 정법의 원인만 되는 것이라면 어째서 여래장은 선과 불선의 인이 된다고 널리 말했는가? 만약 전체가 염정을 일으킨다면 무엇 때문에 오직 성공덕을 구족하고 말하고 성염환을 구족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는가?
답하기를 이 전체가 염정을 짓는 원인이기 때문에 오직 성공덕을 구족한다고 말한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는 정성(청정한 성품)을 여의고 있기 때문에 연을 따라서 모든 염법을 짓는 것이고, 또한 염성을 여의고 있기 때문에 연을 따라 모든 정법을 짓는 것이다. 염정법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전체가 염정의 원인이 되며 염정성을 여의었기에 성공덕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 염정성을 여의어야만 모든 공덕을 이룰 수 있는가? 염정성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망상이기 때문이다.
【論】
심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이라 이름하며 심원을 깨닫지 못하면 구경각이 아니다.
〔疏〕
심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이라고 하는 것은 불지를 말하며 심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금강유정 이전이다.
【論】
이 뜻은 무엇인가? 범부와 같은 사람은 앞생각에서 악을 일으킨 것을 알고서 뒷생각을 정지시켜 일어나지 않게 한다. 이는 비록 각이라 이름하지만 불각이기 때문이다. 이승의 관지와 초발의보살 등과 같은 사람은 생각의 이상을 깨달아서 생각에 이상이 없으니 추분별집착상을 버렸기 때문에 상사각이라 이름한다. 법신보살 등과 같은 사람은 생각의 주상을 깨달아서 생각에 주상이 없다. 분별추념상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수분각이라 이름한다. 보살지를 다한 사람은 방편을 만족하여 일념이 상응하고 마음이 처음 일어날 때 마음에는 처음 일어나는 상이 없음을 깨달아서 미세념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심성을 깨달으면 마음이 상주하는 것을 구경각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을 능히 관할 수 있다면 불지를 향하는 것이다’고 말하였다.
〔疏〕
다음 따로 해석하는 중에 사상을 요약하여 설명하였으니 먼저는 사상을 밝히고 다음에 문장을 해석할 것이다.
묻기를 이 중에 사상은 동시에 있다고 해야 하는가, 전후가 있다고 해야 하는가?
이 의심은 어째서인가? 만약 동시라고 한다면 이 논에서는 사상을 깨달을 때 차별이 있다고 하였고 만약 전후가 있는 것이라면 아래 글에서는 사상이 동시에 있다고 말하였다. 어떤 이의 설은 살바다종의 사상에 의지하여 사상의 체는 동시이지만 사상의 용은 전후가 있기 때문에 깨달을 때는 차별이 있으며 체는 동시이기 때문에 동시에 있는 것이라 이름한다.어떤 이의 설은 성실종에 의지하여 사상이 전후가 있지만 동시에 있다고 말하니 본각에서 사상을 본다면 사상의 전후차별이 없기 때문에 동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있는 것은 자립함이 없는 것이다. 어떤 이의 설은 이것은 대승의 비밀스런 사상이니 사상을 깨달을 때는 앞뒤로 깊고 얕음이 있으나 깨달은 사상은 동시에 있다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심성은 본래 생멸상을 여의었으나 무명이 있어서 스스로 심성을 미혹하여 심성을 거스르고 적정을 여의었기 때문에 생각을 움직여서 사상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사상이 무명과 화합한 힘 때문에 심체로 하여금 생주이멸하게 하는 것이다. 소승의 논의 가운데 ‘마음이 미래에 있을 때에는 아직 생멸을 하지 않다가 업력에 의하여 사상을 끌어서 심법으로 하여금 생주이멸하게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대승의 사상도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저 법신이 모든 번뇌에 의하여 표류하고 움직여서 생사를 왕래하는 것을 중생이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논 아래 문장에서 자성청정심은 무명의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인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疏〕
전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러하지만 이 중에 분별하면 사상 안에 각각 차별이 있다. 바로 생삼, 주사, 이육, 멸칠을 이른다. 생상이 셋이라는 것은 첫째 업상을 말하며 무명으로 말미암아 깨닫지 못한 생각이 움직인 것이다. 비록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있을지라도 견분과 상분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니 이는 미래의 생상이 장차 곧 작용하려는 때에 이른 것과 같���. 둘째는 전상이며 움직이는 생각에 의해 전변하여 능견을 이루는 것을 말함이니 이는 마치 아직 오지 않은 생상이 곧 작용하는 때에 이른 것과 같다. 셋째는 현상이며 능견에 의지하여 경계의 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마치 아직 오지 않은 생상이 현재 시에 이른 것과 같다. 무명이 삼상과 화합하여 일심의 체를 움직여서 전상을 따라서 현상에 이르는 것이, 마치 소승의 아직 오지 않은 장심이 생상을 따라서 전변하여 현재에 이른 것과 같다. 이제 대승 가운데 여래장심이 생상을 따라서 현재에 이른 것 또한 뜻이 이와 같다. 이 셋 모두는 아리야식의 안에 있는 차별이며 이 중에 자세하게 다 말하는 것은 아래 문장에서 하겠다. 이것은 매우 깊은 세 가지 생상이라 이름한다.
〔~疏〕주상에 네 가지가 있다고 한 것은 이 무명이 생상과 화합하여 생겨난 마음이 나와 내 것이 없음을 미혹하여 네 가지 주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른바 아치 아견 아애 아만을 말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네 가지 주상은 생상에 의지하여 능히 모습을 일으킨 것을 말하며 심체가 주상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안으로 반연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에 주상이라 한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제 칠식의 자리에 있다.
〔~疏〕이상이 여섯이라 하는 것은 무명이 주상과 화합하여 아와 아소가 공함을 깨닫지 못하고 집착하여 여섯 가지 이상을 일으킨다. 이른바 탐․진․치․만․의․견을 말하며 신론에서 “번뇌의 자성은 오직 여섯 가지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무명이 이 여섯 가지 이상과 화합하여 능상인 주심이 이상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밖을 향하여 반연하는 것을 이상이라 한다. 이 여섯 가지는 모두 생기식의 자��에 있다.
〔~疏〕멸상이 일곱이라 하는 것은 무명이 이상과 화합하여 바깥 경계에는 ‘어긴다 ․ 순응한다’는 생각을 여의었음을 깨닫지 못하여 이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 멸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신구(身口) 등 일곱 가지 악업을 말한다. 이 악업은 능히 이심을 멸하여 악취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멸상이라 한다. 마치 소승의 멸상이 현재심을 멸하여 과거로 들어가게 하는 것과 같으니 대승의 멸상도 마땅히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疏〕이런 뜻으로 말미암아 사상의 일어남은 일심이 유전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근본무명이 원인이다. 이는 승만경에서 “무명주지가 그 힘이 제일 크다”고 하였고 이 논에서 “무명의 힘이 일체 염법을 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말과 같다. 또 소상의 상(사상이 의지하는 마음)은 일심에서 오며 능상의 상(사상)은 무명으로 일어난 것이다. 일어난 상이 그것이 이르는 곳에 따라서 그 작용에 차별이 있어서 경계에 따라 다른 모습을 취하는 것을 수법이라 이름하니 이는 참으로 그 근본무명이 평등성을 어겼기 때문이다.
소상의 상은 이르는 곳마다 총괄하는 주인이 되어 경계의 모든 현상을 요별하는 것을 심왕이라 이름하니 그 근본이 되는 일심은 모든 법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중변론에서 “오직 경계만을 아는 것을 심이라 말하고 경계를 차별 있게 아는 것을 심법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장행에서 말하기를 “만약 경계의 모든 모습을 안다면 이는 심이라 하고, 경계의 개별적인 모습을 인식하는 것은 심법이라 한다”고 하였다. 유가론에서도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런 뜻 때문에 모든 외도들은 대다수가 심왕을 재주(宰主)니 짓는 자(作者)��� 받는 자(受者)니 하며 집착하지만 심체는 자성이 없어서 연을 따라 유전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疏〕이 사상을 총괄하여 일념이라 하며, 이 일념 사상에 의거해서 사위의 단계를 밝혔다. 이는 본래 무명불각의 힘에 의지하여 생상 등 가지가지 몽념이 일어나서 마음의 근원을 움직여서 전전하여 멸상에 이르러서 긴 삼계의 잠에 잠들어 육취를 유전하다가 이제 본각의 불사의훈으로 인해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찾는 마음을 일으켜서 점차 마음의 근원을 향하여 비로소 멸상과 내지 생상을 쉬고 크게 깨달아 자심이 본래 움직인 바가 없음을 깨달아서 이제는 고요한 바도 없고 본래 평등하여 일여의 자리에 머물게 됨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니 경에서 말한 꿈에 하수를 건너는 비유와 같은 것이다. 이 중에 널리 설한 대의도 이와 같다.
〔~疏〕다음은 문장을 해석하는 것이다. 사상에 의하여 네 가지 수행위를 구별하는데, 네 가지 수행위에는 각각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깨닫는 사람, 둘째는 깨달은 모습, 셋째는 깨달음의 이익, 넷째는 깨달음의 범위에 대해서 말한다. 처음의 수행위 중에 ‘범부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수행인을 말하며 십신의 위치에 있다. ‘앞의 생각에 악이 일어났음을 알았다’고 한 것은 깨달은 모습이며 아직 십신에 들어가기 전에는 신․구의 일곱 가지 악업을 함께 일으켰으나 이제 십신의 수행위에 들어와서 일곱 가지 악이 진실로 불선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앞생각에서 악을 일으켰음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멸상의 뜻을 깨달아 밝힌 것이다. ‘뒷생각을 그치고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깨달음의 이익이다. 앞에서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아 일곱 가지 악한 생각을 일으켰으나 지금은 이미 그 악을 깨달았기 때문에 멸상을 그치게 한 것이다. 비록 다시 각이라 이름 하지만 불각이라고 말한 것은 깨달음의 범위를 밝힌 것이다. 비록 멸상이 실로 불선임을 알았지만 오히려 아직은 멸상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疏〕두 번째 수행위 중에 ‘이승관지와 초발의보살 정도의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은 십해 이상의 삼현보살을 말한다. 십해의 초심을 발심주라 이름하며 이는 처음 발심한 사람과 그 뒤의 수행위를 겸하여 말했기 때문에 초발의보살이라 말한 것이니 이는 수행인을 밝힌 것이다. ‘생각의 이상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깨달은 모습을 밝힌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섯 가지 이상은 안과 밖의 대상을 분별하여 나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이 삼승의 수행인은 무아의 도리를 깨달아 알기 때문에 이상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는 소상인 심체가 무명에 의해 잠들어 이상을 꿈꾸어서 모든 번뇌를 일으키다가 이제는 점차 지혜와 상응하여 이상의 꿈으로부터 조금 깨닫게 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생각에 이상이 없다’는 것은 깨달음의 이익이며 이상이 꿈임을 깨달아서 여섯 가지 이상을 영원히 멸했기 때문에 생각에 이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추분별집착상을 버렸기 때문에 상사각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은 깨달음의 범위를 말하는 것이다. ‘어기다 ․ 순응하다’는 생각을 분별하여 탐진치 등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추분별집착상이라 이름 하는데 비록 이런 거친 집착상은 버렸지만 아직 무분별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사각이라 한다.
〔~疏〕세 번째 수행위 중에서 ‘법신보살 ��’이라 한 것은 초지 이상 십지보살의 수행인을 말한다. ‘생각의 주상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주상 중에서는 비록 마음 밖에 경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인(人) ․ 법(法)을 집착하여 안으로 반연하여 머물렀으나, 법신보살이 되어서 이공을 통달하게 된 것이다.이는 소상인 심체가 이미 이상을 깨달았으나 아직은 주상의 꿈에 잠들어 있다 이제는 무분별지와 상응하여 주상의 꿈에 벗어나 깨달음을 얻게 되었음을 밝히려 하기 때문에 ‘생각에 주상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깨달은 모습이다. 생각에 주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네 가지 주상이 멸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깨달음의 모습이다. 생각에 주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네 가지 주상이 멸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이는 각의 이익이다.
분별추념상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은 인아의 집착을 분별이라 한 것이니, 앞에서 말한 이상의 추분별과 구별하기 위해 추라하지 않은 것이며, 법아집을 추념이라 하였으니 뒤에 생상의 미세념과 다르기 때문에 추념이라 한 것이다. 비록 이미 무분별각을 얻었지만 생상의 꿈에 잠들어 있어서 수분각이라 하며 이는 깨달음의 범위이다.
〔~疏〕네 번째 수행위 중에 ‘보살지를 다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무구지를 말한다. 이는 전체적으로 든 것이고 아래 두 구절은 따로 이도를 밝혔다. ‘방편을 만족했다’고 하는 것은 방편도이며 ‘일념이 상응한다’는 것은 무간도 이다. 이는 <대법론>에서 “구경도는 금강유정을 말하며 이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방편도섭과 무간도섭이다.”고 한 말과 같으며 이는 수행인을 말한 것이다.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 것은 깨달은 모습을 밝힌 것이 다. 마음이 처음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무명에 의지한 생상이 일어났으며 심체를 미혹하여 생각이 움직이게 하다가, 이제는 본각을 떠난 불각이 없음을 깨달아 알아서 움직인 마음이 즉 고요한 마음임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았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방향을 미혹했을 때는 동쪽을 서쪽이라 하지만 깨달았을 때는 서쪽이 즉 동쪽임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이 중에 깨달음의 뜻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마음에 초상이 없다’고 한 것은 깨달음의 이익이다.
본래 불각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일어났지만 이제는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바가 없어서 마음에 초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앞에 세 가지 수행위는 비록 여읜바가 있지만 움직이는 생각은 오히려 다 없어지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에 생각에 주상 등이 없다고 했지만 이제 구경위에서는 움직이는 생각이 모두 다 없어지고 오직 일심만이 있어서 마음에 초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疏〕‘(미세념을)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이하는 깨달음의 범위를 설명한 것이다. 이 중에 두 구절이 있다. 처음에는 깨달음의 정도를 바로 밝히고 ‘그러므로’ 이하는 경전을 인용해서 이론이 서립됨을 증명한 것이다. 업상은 생각이 움직인 것을 말하며 생각 중에 가장 미세하기 때문에 미세념이라 한다. 이 업상이 다 없어지고 영원히 남아있는 바가 없어서 멀리 여의었다고 말한다. 업상을 멀리 여의었을 때가 바로 불지에 있는 것이다. 앞에서 수행해온 세 가지 수행위는 아직 심원에 이르지 못해서 생상이 다 없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오히려 항상함이 없었으나 이제 구경각에 이르러 무명이 영원히 다 없어지고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다시�� 움직이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서 ‘심성을 보게 되어 마음이 상주한다’고 말하고 다시 나아갈 바가 없어서 구경각이라 말한다. 또한 아직 마음의 근원에 이르지 못했을 때는 몽념이 아직 다하지 않아서 이 움직임을 멸하려고 피안에 도달하기를 바랐으나 이제는 이미 심성을 깨달아서 몽상이 다 없어지고 스스로의 마음이 본래 유전함이 없음을 깨달아 알아서 이제는 고요하게 쉬는 것도 없고 항상 스스로 일심이 일여의 자리에 머물기 때문에 ‘심성을 보게 되어 마음이 상주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아서 이런 도리로 구경각이라 이름하니 이는 각의 범위를 바로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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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깨달음. 도...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붓다.
일념... 즉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것" 이라고 안다면,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다.
일념법으로써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도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며, 대도무문의 문을 본것이며, 지혜의 문을 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만남에 대해서 백천만겁난조우의 인연이라고 한 것이다.
책.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와 책 비밀의 언어. 그리고 이곳 카페의 모든 글들은 단지 어떤 중생의 견해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부터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모든 붓다들의 견해이다.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