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어리석음이 무한한 까닭은 말, 말, 말애 대해서 제각기 상상하고 자기만의 상상속의 생각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식이 수많은 말을 창조해 냈으며, 무수히도 많은 말들을 끊임없이, 끝없이 창조해 내는 까닭은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올바른 앎이라면 많은 낱말들을 창조해 내야 할 필요가 없다.
올바른 앎이란 단순한 말들로써도 그 뜻이 온전하게 소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단순하다.
'도의 언어'가 완전히 소통될 수 있는 까닭은 바탕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언어에는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에 문제만 무성할 뿐, 해답이 없으며 항상 논란만 무성하며, 논란의 결과들은 말잔치가 그 끝이 되거나, 아무리 중대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게 되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들이다.
인간들의 사건 사고들... 무수히도 많은 말들... 진실된 말이 없다.
인간의 관념으로써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이 소위 '도를 깨달은 자'들의 말이며, 인간세상에 영원히 남겨지는 말들은 오직 그들의 가르침 뿐이다. 그들의 말이 왜곡될망정 그들의 말에는 그만큼 깊은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념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조차 불가능한 말들이 그들의 앎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앎의 바탕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인간의 앎은 '육체가 나다'라는 앎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 상대적인 앎이며, 이에 대해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편견이며, 단견이며, 소견이라고 했다. 반면에 그들의 말은 '나는 사람도 아니다' 라는 상대적인 관념에서 벗어난 '분별이 사라진 앎'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사람도 아니다" 라는 말은 이것도 아니며, 저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라는 말이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것' 이라는 말이다.
석가모니나 예수, 소크라테스 등... 그들의 "나" 라는 말은 단지 "육체가 나다" 라는 뜻의 '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말을 이해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지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말로 다가오는 말이기 때문에 지적으로나마 이해가 가능한 말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고 한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정작 지식은 '지식이 왜 끝이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조차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지식은 지식이 왜 시작된 것이며, 왜 그 끝이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無知라고 했던 인물들이 소위 '도를 깨달은' 자들의 말이며, 지식으로서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올바른 앎을 전하려 했던 인물들이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석가모니와 예수, 그리고 노자와 장자.. 등이다.
그들이 소위 인류의 성인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물들이며, '도'와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들이 '석가모니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노자와 장자, 예수 등이다. 인간의 역사로 볼때 역사 석가모니와 노자,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같은 시대의 인물이며, 장자는 기원전 3세기이며, 예수는 기원전 1세기 경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순서대로 표기한 것이지만, 그들의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바탕이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것으로써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수차례에 걸쳐 반복 설명되고 있다.
한글로서는 "그것"에 대해서 "깨달음. 도. 진리. 중도. 성령. 불성" 등의 말, 말,말로써 표현된다. 하지만 그들이 존재했던 시대는 서로 다르며, 그들이 존재했던 장소 또한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글로 표현되는 '깨달음'이라는 말이나 "도" 라는 말, 그리고 '진리'라는 말은 오직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관념에서 비롯된 말일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를 설명했던 '플라톤'의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이데아" 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다. "이데아" 라는 말은 '그림자 세상'이라는 뜻이라는데, 도가의 '화원'으로부터 들어서 아는 말이다.
상관 없는 일이다.
가령 어떤 언술이 뛰어난 자들이 "노자의 도관"이나 또는 소크라테스의 말이거나, 석가모니의 말이거나 예수의 말에 대해서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쓸모 없는 짓들이며,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앎으로써는 "그것"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예수의 말을 옮기는자들에 대해서 "적 그리스도" 라고 한 것이며, 석가모니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고 한 것이며, 노자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 라고 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오직 선은 올바른 앎이며, 악은 지식이다" 라는 말과 같이 '지식에 대해서 선과 악 중의 '악'으로 규졍지었으니, 사실 인간무리들의 삶 자체가 악행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도'를 이해 한다는 자들이거나, 또는 도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다. 예를 든다면 '니가르주나' 즉 한글로 "용수보살"이라는 준생의 말재간들이거나 또는 '대승기신론'의 저자라는 '마명보살'이라는 중생들의 글들이 그러하며, 종교나부랭이들의 모든 경전들이 그러하다. 심지어 이곳 자유게시판에도 '도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의 광고성 글을 올리는 자들이 있으며, 국제 심포지움이라는 글로써 '올바른 집중'을 주장하는 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허긴 현시대에도 '오쇼-라즈니쉬'를 비롯하여 그와 유사한 무식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의 말재간들이 난무하고 있으니,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만은...
오쇼-라즈니쉬라는 중생의 말 한구절을 보니. "영혼은 과학이 밝힐 것이다" 라는 말이 있었다. 언술이 뛰어난 중생들이 언술이 뛰어나지 않은 중생들을 속이기 위해서 '도, 깨달음, 진리' 라는 포장지를 사용하는 세상이다. 종교나부랭이들과 같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대가 진정 삶, 인생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이해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의 깊은 뜻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해서는 오직 '일념법명상'으로써 일념을 깨달아야만 한다. 일념을 깨달음으로써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 대한 올바른 앎이 다가올때, 그때 비로소 '도'와 인연 있는 것이며, "집중"이라는 낱말이마, 명상이라는 낱말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온전하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집중'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집중이라는 낱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하는 인간 또한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집중'이라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 이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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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執中)【명사】【~하다|자동사】 과부족·치우침이 없이 마땅하고 떳떳한 도리를 잡음.
집중
(集中)【명사】【~하다|자동사·타동사】 한 곳으로 모임. 또는 모이게 함.
¶ 음주 운전을 ∼ 단속하다/ 인구가 대도시로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수상자에게 ∼되었다/ 범인 검거에 온 수사력을 ∼시키다.
그리고 집중력이라는 낱말의 뜻을 보니.
집중―력
(集中力)[―녁]【명사】 마음이나 주의를 어느 사물에 집중할 수 있는 힘. ¶ ∼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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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명상'이라는 낱말에 대한 설명과 같이 인간관념으로써 이해하는 명상은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앎이 아니다. 사실 인간들의 지식을 통해서 알려지는 언어는 올바른 뜻에 대한 앎이 아니라 언어, 말, 말, 말에 대해서 제각기 다른 관념으로 상상하는 것들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언어가 있으나 논란, 논쟁의 도구일 뿐, 올바르게 소통될 수 없는 것이며, 말은 많지만 그 논쟁들은 항상 동상이몽으로써 질실로 소통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언어들... 진실로 소통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중속의 외로움이라는 말이 창조되는 것이며, 사랑이 깊어질수록 고독해 진다는 말이 창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세상 인구가 육십억명이라면 그 육십억 명 모두의 생각이 제각각 다른 이유는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는 한 영원히 비밀의 언어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는 인간관념으로써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세상에는 예나 지금이나 할것 없이 인생에 해답이 있을 수 없듯이 항상 문제만 무성한 것이다.
'도, 깨달음' 이라는 말의 앎은 무엇을 아는 앎이 아니라, 더이상 알아야 할 앎이 단 하나도 없는 앎이다. 사실 그들이 분명히 아는 것 하나는 "육체가 나다" 라는 앎이 착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다. 소크라테스의 '내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 단순한 한생각의 차이가 인간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사실적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인간이 아는 것은 '마음이 있다'고 아는 것이다.
그 단순한 한생각의 차이는 단순한 한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앎'은 우주의 기원을 아는 것이며, 천지만물의 근원을 아는 것이며, 언어의 기원을 아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인간생명체의 구조와 원리를 아는 것이다.
단순하게 인간생명체의 원리와 구조를 안다는 것은 인간의 생로병사의 비밀을 안다는 뜻이며,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든 질병의 원인을 알기 때문에 만병의 근원을 아는 것이며, 만병을 완전하게 치유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안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에게 인간들과 같은 '관념'이 있다면, 그들의 관념으로 본다면 인간들의 모든 학문들이 무지이며, 의학이나 의술 그리고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 등의 학문들이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망상이다.
도가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 나이 팔십에 다가서는 사람들이 불치병과 난치병이라는 희귀 질병들에서 벗어나는 일은 인간세상에서는 기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기적도 아니며, 대단한 일도 아니며, 상식적이며 보편타당한 일이다. 그들의 사례는 다양하다.
메뉴의 -자연의 건강 단식과 선식- 에 단식 과정과 단지 "도가의 선식" 만으로써도 당뇨 및 기타 혈액관련 질병들의 치유 사례가 있으니 참고할 수 있다.
지식의 앎과 '도의 앎'의 차이이다.
"도" "깨달음" 이라는 말은 한자와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말이겠지만, 세계의 다양한 언어로써는 어떤 낱말로써 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석가모니의 말이 본래 중국어가 아니었으며, 예수의 말 또한 본래 영어가 아니었으며, 노자와 장자의 말 또한 본래 한글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보니.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한글로 번역하는 자들의 관념에 따라서 그 뜻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알음알이에 의해서 그들의 본질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식이라는 것들의 어리석음이 다른 중생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깨달음의 앎, 도"의 앎" 이라는 앎이 있다.
"도, 깨달음"의 앎에는, 즉 "도" 안에서는 나와 너라는 분별이 없으며, 선과 악이라는 분별이 없으며, 삶과 죽음이라는 분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언어로써 표현되지만 그들의 앎에는 다툼이 있을 수 없으며, 논란, 논쟁이 없으니, 평화라는 말이 있다면 그 자체가 평화이며, 자유라는 말이 있다면 '도'를 이해 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며,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도'의 앎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반면에 인간들의 앎에는 '나와 너'가 분명하며, 선과 악이 분명하다. 언어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들 누구나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라는 상대적인 사고방식에 바탕을 두고 창조된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라는 상대적인 분별로써는 절대로 행복이나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며, 자유 또한 불가능한 환상일 뿐이다.
불경의 반야심경에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색즉시공 공즉시색...' 등의 말들이 어지러이 설명되어 있는데, 인간관념으로써는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라는 말로써 인간들에게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깍은 중생들이 '올바른 집중'이라는 말로서 다른 중생들을 현혹하거나 '육도윤회'가 있다며 천도제를 당연하게 주장하기도 하는 세상이다.
만약에 중생이 석가모니의 말에 대해서 단 한구절만이라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면 불교라는 종교 따위는 이미 사라졌을 것이며, 예수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집단들 또한 사라졌을 것이다. 그들의 말은 우상숭배로써는 결코 '너 자신알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은 맥락의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 세상에는 '집중'이라는 낱말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거룩한 인물들이 있다. 오직 그들에 대해서만 중생이 아니라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들만이 언어, 낱말의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도의 언어'를 이해 할 수 있는 인물들이며,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는 반야심경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 할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며, 예수의 말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자들은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의 뜻 조차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없는 중생, 어린 양새끼들과 다름 없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전도'라는 명분으로 다른 종교들을 비방하는 것들 넘어 싸움을 걸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종교나부랭이들 또한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기는 매 한가지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만은. 예수의 가르침과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미 성경과 불경에 기록된 그들이 가르침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대체 "도, 도를 깨달음" 이라는 말로 전해지는 올바른 앎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 아는 앎이기에 인간들의 모든 앎에 대해서 '허구'이며 '무식한 앎'이며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곳의 모든 글들이 인간지식의 어리석음에 대한 사례들이며, 비유법이며, 방편설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깨달음의 앎이란 인간지식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모두 아는 앎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기원을 알 수 없으며, 언어의 기원을 알 수 없으며, 지식의 끝 조차 이해 할 수 없으나... 그들, 즉 도를 깨달은 자들의 앎은 인간 관념으로 볼때에는 '인간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다듬어지지 않은 통나무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모습이 남루하여 보잘것 없이 보일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그런 사실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이유는 스스로 만족하여 평온하기 때문이며, 무위자연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앎은 무궁무진하다.
예수에 대해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이 창조된 까닭은 그들의 앎과 인간들의 앎과의 차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이 '전지전능한 자'의 말로 전해지는 것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있는데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다재 다능한 손오공'에 대한 전설이다. 인간들의 지식이라는 말재간, 언술, 논술.. 등의 모든 앎들이 '도를 깨달은 자'들의 앎에 비교할 수 없는 하찮은 것들이라는 뜻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면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다.
사실 여기서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라는 말은 '상근기, 상사'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일념법명상으로써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일념을 실천하는 인물들을 일컷는 말이다. 참고로 일념법명상으로써 일념을 깨달아 아는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앎일때, 그때 비로소 '백천만겁난조우'의 인연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도와 인연 있는 사람'이다.
인간관념으로써 그들의 말을 이해 하고 해석한다는 일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잘난체 하기 위해서, 명예를 얻기 위해서 말재간을 부렸기 때문에 그들의 진실된 말이 종교나부랭이들의 우상숭배사상 따위로 전락된 것이다.
만약에 그들의 말이 그들의 뜻 그대로, 사실대로 전해질 수 있었다면 인간들은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는 학문들 따위의 허구적인 앎으로써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설명되는 '도' 에 대한 올바른 이해 만으로써도 의학이나 의술 등의 무한한 어리석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도가'와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백천만겁난조우의 인연이라는 말과 같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써는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몸에 나타나는 모든 질병들에 대해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인생의 해답을 아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 아는 진실된 앎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념법이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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