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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았다고 뭐가 좋은가요? / 말법시대

일념법진원 2010. 10. 9. 21:35

"깨달았다고 뭐가 좋은가요?"  

질문과 답변에 올라온 질문이다.

생각의 이치에 대한 선 이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질문을 하면서 "진원"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글...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저서를 통해서, 그리고 이곳 카페의 글들을 통해서 충분히 설명되었겠지만 어차피 이해한다면 오해하는 것이기에 이 질문을 계기로 하여 더욱더 자세히 적어나가 보려고 한다.

 

깨달았다고 뭐가 좋은가요? 라는 질문에 가장 간결한 답변이 있다면...

"의심의 근원에 다다르는 것이기에 "깨달았다고 뭐가 좋은가요? 라는 의심조차 없어지는 것이며 그대 스스로가 신, 진리, 그것임을 아는 앎이다" 라고 답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이어나가다보면..

"그런데요?"  "그래도요?" 라는 의구심이 끝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앎의 바탕은 의심이기 때문이며 믿으라는 말은 믿지 않기에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음과 의심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그 의심의 근원, 의구심의 바탕은 어떤 것을 "나"라고 아는 앎이라고 하였다.

지성, 지식이라는 모든 앎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

앎, 알음알이가 많으면 많은만큼 의구심 또한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서 식자우환이라는 말의 해석을 통해서 설명한 바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근원을 모른다.

태어남도 기억할 수 없으며 죽음도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인지, 단군이 시조인지, 하늘나라에서 천웅이 내려온 것이 인간의 시초인지, 원숭이가 진화하여 인간이 된 것인지.......

그져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앎에 대해서 당연시 할 뿐...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다.

 

아마도 순수했던 젊은시절에 누군가로부터 "인간의 기원, 나의 기원, 근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해 본 적이 있었다면 그나마 그것에 대해서 좀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면 인생에 대해서 조금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식창고를 아무리 뒤져보더라도 그런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져 단군신화가 아니면 신,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아는 앎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여기기때문에 하늘나라를 동경하게 되며 하늘나라 선녀님들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그대는 그림책에서 보았던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선녀를 상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비의 날개같은 하얀 비단옷... 선녀와 나무꾼... 허헛

 

인간, 인류...

자신의 근원을 알 수 없기에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지만...

그것을 찾았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으며 만난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도 없다.

 

"께달았다고 뭐가 좋은가요?" 라는 질문...

깨달은 사람은 없다.

"우주도 없다",

"구도자도 없다",

"진아가 모든 것이다" 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이런 말들에 대해 이해할 수는 없다.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책을 출판하기 전에는 누구나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책 한권을 통해서 "도", "깨달음"이라는 말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쓰기 위해서 우리말로 여러가지의 방편을 들어 설명하였으나... 그 글에 대해서 관념으로나마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극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책과 이곳의 글들을 통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중 일부만이 깊은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들 중 일념이 깊어진 인물들을 몇 몇 볼 수 있는 인연이 있었다.

 

지식으로써의 이해를 넘어서 지혜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참다운 앎...

말은 같은 말이지만 그 말의 뜻은 하늘과 땅의 차이임을 깨우친 인물들은 이미 불행이라는 생각, 고통이라는 생각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들의 경지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일념의 깊이가 깊어진 정도에 대해서 높은 경지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지만...

그리고 아직은 내가 아는 앎, 나라는 주체가 남아 있지만.......

하지만 그 경계가 무너지면 웃어버릴 수 있는 정도의 경지이니... 인간으로써는 최상의 경지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일념, 일념, 일념... 무상의 길이라고 하였다. 

무상, 즉 위 없는 높은 길이라는 뜻이며 이에 대해서 노자와 장자는 道라는 말로 대신하였다고 설명하였다. 

 

--- 일념을 공부하던 중... ---

아마도 일념, 즉 유상삼매의 시간이 하루에 다섯시간이나 또는 그 정도일때 쯤에는(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일념중에 다른 생각이 일어남을 알아차리면서 "피식"히고 웃음을 짓게 된다. 

그때에, 일념이 이어지던 중에 다른 생각이 일어났을때에... "피식 하고 웃으면서 이것은 내가 아니고 에고지" 라고 스스로 알게된다. 

그만큼의 경지라면... 이곳의 글들에 대해 깊이 이해하면서 웃어버리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는 설명할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기에 부뚜막의 소금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참다운 앎이 드러나면서 웃을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일념상태(유상삼매의 상태)"가 "진아"이며 일념중에 일어나는 생각들이 에고(가공된 나)임을 알아차리는 앎으로써 어렴풋이나마 나와 에고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만큼의 경지에 이른 인물들이라면 이곳의 어떤 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더 깊어지게되면서는 화두였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구절에 대한 강한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며 그런 강한 의심이 일어나면서부터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한 생각 이외의 다른 어떤 생각도 일어날 수 없게됨에 대해서 "생각의 끊어짐", 또는 "무념처", 또는 "무상삼매"... 등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토록 "나는 누구인가"라는 한 생각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일어남의 결과가 무상삼매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신이기 때문에 "신에 이끌려가는 형국"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깨달았다고 뭐가 좋은가? 

 

왜 좋은 것을 찾는가? 

 

내가 지금 좋지 않기 때문에 좋은 것을 찾는 것이다. 

내가 항상... 끊임없이 좋다면... 좋은 것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질 않은가?

 

왜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가? 

내가 지금 자유롭지 않으며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왜, 죽을 때까지 부와 명성을 위해서 뛰어다녀야 하는가?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부를 갈망하는 것이며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름을 얻고 싶은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도 죽을 때까지 돈을 벌기 위해서 뛰어다녀야만 하며, 돈이 없는 사람도 돈을 벌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뛰어다녀야 한다.

죽으러 가는 길에 그리 분주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욕망. 그것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똑같은 사람, 사람, 사람이 서로가 싸워서 승리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투쟁하다가....

죽음 앞에서는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한단 말인가?

그러니 무한한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주라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부자이며 누가 가난한 자란 말인가?

누가 성공한 자이며 누가 실패한 자란 말인가?

누가 행복한 자이며 누가 불행한 자란 말인가?

그대는 그것을 정의할 수 있는가?

그대는 선과 악을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는가?

 

어떤 물건을 생산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 그는 선한 자인가, 악한자인가?

어떤 물건을 판매하여 이득을 취하는 자... 그는 선한자인가 악한자인가?

어떤 물건을 소비하는 자... 그는 선한자인가 악한자인가? 

 

불이일원론에 근거하여 진리를 전파했던 인물들의 말을 왜곡한 자들...

그들에 의해서 종교 나부랭이들이 탄생된 것이다.

석가의 말을 왜곡하여 영혼을 파는자와 그들의 말에 현혹되어 돈을 지불하는 자... 누가 선이며 누가 악인가?

예수의 말을 왜곡하여 천국과 지옥을 파는자와 돈을 지불하며 편을 가르는 자들... 누가 선이며 누가 악이란 말인가?

 

인간의 마음, 관념, 인식, 감정, 감성, 느낌... 모두가 기억된 생각이며 그 생각들이 고착화된 것에 대해서 "마음"이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찾아보라.

자유와 평화. 행복을 소망한다면, 단 십분간만이라도 찾아보아야만 한다.

찾다보면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생각, 생각, 생각만이 남게된다.

마음... 그것에는 실체,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고 진정으로 찾아보더라도... 

남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과 "기억된 생각"만이 있을 뿐임을 알게될 것이다.

나라는 것에 대해서 찾다보면 기억된 생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기억된 생각. 그것은 모두가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앎이다.

그것을 "나"라고 주장하며 죽을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기에 인간의 투쟁하는 삶에 대해서 지옥이라고 한 것이다.

 

육체가 나라고 아는 앎, 착각에 의해서 다른 나들과 죽을 때까지 경쟁 투쟁을 일삼아야만 하는 삶은 내가 내 마음대로 숨을 쉬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대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숨이 쉬어지는 것이므로.......

 

이렇듯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참다운 나를 찾기위한 삶이 진리의 길이며 도를 닦는 일이다.

그리하여 내가 내가 아님을 앎이 진정한 앎이며 자유와 평화. 진리와 하나되는 길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실체없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안타까운 몸짓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죽을때까지 뛰어야녀야 한단 말인가?

우주를 위해서?

지구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은 다 죽더라도 나, 나, 나만 잘 살기 위해서???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

그대는 그것에 대해서 정의할 수 있는가?

"나는 잘 살았으니 너도 나처럼 살아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기는 있었는가?

왜,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해 왔는데...

왜, 나처럼 살아라, 라고... 죽음 앞에서도 나는 기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 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란 말인가?

 

행복이라는 말의 뜻은 욕구가 충족되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다.

인간은 행복이라는 말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끊임없이 행복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가끔 행복을 느끼지만... 나머지는 행복하지 아니한 것이다.

 

끊임없이 만족하여 고요하고 평온함에 대해서 지복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다.

그것에 대해서 천국, 미르바나, 부처, 불국토, 도, 영생, 불생불멸, 신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안심입명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인간의 욕망. 그것의 근원은 육체가 나, 라는 그릇된 앎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알기에, 내가 태어났으며 내가 죽을것이라고 알기에 모든 행위는 두려움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두려워 하는 이유는 그것. 즉 두려움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실체를 모르면서 두려워하는 것이니... 그것이 무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두려운가.

그것의 실체를 찾아보라.

그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앎... 그것이 참다운 앎이다.

  

깨달으면 무엇이 좋은가? 라는 질문을 보면서... 

말법시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석가의 시대, 노자와 장자의 시대, 예수의 시대... 모두가 말세시대가 아닌적이 없다.

현세에도 도처에 도를 구하는 자들은 있으며 그 시대에도 도를 구하는 자들은 있었지만...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한숨을 쉬게되니... 말세시대가 아닌가.

 

길을 묻기에 올바른 길을 일러주건만...

바로 보고 바로 듣지 못하면서 비난하는 자들이 난무하는 시대이니 말법시대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에 빠진자 구해주니... 보따리를 내 놓으라고 하더라는 옛말...

그러니 개만도 못하다고 하는것일게다. 

 

 

생각이 있기에 내가 존재함을 아는 것이라, 라는 말을 남겼던 "데카르트"를 제외한 모든 철학자들의 인생에 대한 결론은 "허무한 나그네"이다.

 

철학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의 삶이며, 도, 깨달음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그것은 철학 이전, 인간의 근원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밖에 없으나... 언어 이전, 나라는 생각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생각, 즉 사량분별로써는 이해하거나 해석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언어도단이라는 말이,

불립문자라는 말이,

불이문이라는 말이,

불법이라는 말이,

알음알이라는 말이,

방언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무지와 무명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상대적인 모든 말,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아는 모든 앎이 그릇된 앎임을 아는 앎이 참다운 앎이다.

그대가 아는 모든 앎에는 그 근원이 없으며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단군의 자손이라면, 단군은 누가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자손이라면 하나님의 근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본질, 그대의 참 나...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