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중생들이 단전호흡을 강조하곤 한다.
머리깎은 중생들마져 단전에 화두를 두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으며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말하면서도 결가부좌를 강조하면서도 앉는 자세까지도 억지로 만들게 하여 사람들를 괴롭히는 것이니... 무한한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어떤 중생은 '단전호흡을 하면 단박에 피로가 풀린다고 하기도 하며, 어떤 특별한 행위를 통해서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기도 한다. 물론, 생각의 이치가 그러하다. 조금 다른 어떤 행위를 하면서, 이런 행위들이 머리가 좋아지는 행위라는 생각, 생각, 생각을 끊임없이 하다보면 정말 머리가 좋아지는 느낌을 받기도 하며, 정신이 맑아진단는 생각을 하다보면 정신이 맑아진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생각이라는 것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속는 것일 뿐이니...
소위 위빠사나라는 수행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형식, 어떤 규정, 어떤 방법을 정해 놓는다면 이미 그 자체에 구속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수행이라는 것은 그릇된 에고를 버리고 본성 이전의 '나 아닌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이며 행위이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면 또 다른 어떤 목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그대가 '나'라고 아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서 '나'라고 아는 그릇된 앎이라고 하였으며, 일념법을 통한 공부는 그릇된 앎에서 깨어나기 위함이며, 기존의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인 행위이다.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계율이나 방법들, 그리고 요식행위 등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것이 어찌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라는 석가모니의 방법일 수 있겠는가?
어리석어 무식한 중생들이 마음의 심층부를 이해한다면서 '무의식(=순수의식)'의 경험과 같이 경험이지만 기억할 수 없기에 깜깜 무지한 상태에 대해서 연구하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행서를 비롯한 잡서들 또한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그릇된 앎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재간을 부리고 있는 것들이다.
이와같이 모두가 그런 말재간들, 우문우답들에 이끌리는 이유는 말, 말, 말에 세뇌 당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달았다는 자들... 스스로 경험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옳다'는 주장들... 모두가 어긋난 방법들에 매달리다 보니... 해답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한하게도 어리석은 자들이 끊임없이 다른 방법들을 창조해 나가며 자신들이 깨달았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예수나 석가모니보더 더 크게 깨우쳤다는 등, 석가모니나 예수가 알지 못한 방법을 개발했다는 등, 예수와 석가모니는 내가 내려 보냈다는 등... 어리석음도 모자라 무지하여 무식한 말들까지 서슴치 않는 세상이니 말세시대라고 아니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인간은 무의식(=순수의식)상태를 지나면서 자아를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걸음을 걸을 수 있으며 호흡은 걸음을 배우기 이전... 무의식 상태에서부터 있었으며 호흡이 일어나기 시작함에 대해서도 기억할 수 없으며 그것의 멈춤 또한 경험할 수 없다.
석가모니는 6년여 기간동안을 고뇌하면서 스스로 깨닫기 위하여 자신이 들어서 아는 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였으며, 결국에는 스스로 호흡관찰과 몸의 행위에 대한 관찰로써 그 이치. 즉 생각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그 과정들에 대해서 '선정'이라는 낱말로 표현하였으며 선정의 힘에 의한 '사유'의 결과로써 사성제와 팔정도를 연설한 것이다.
초기경전인 잡아함경에는 석가모니의 설법이 한자, 한글로 번역되어 그대로 전해진다.
그의 관찰법이라는 말은 '제자들이여 무상한 것은 색이며, 색은 '나'가 아님'에 대해서 관찰하라'는 말이 대부분이며, 색은 '나'가 아니며, 내것도 아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찰하라는 내용이다.
'하루종일 기도하라'는 예수의 말과 끊임없이 일념법을 공부하라는 말과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라는 말은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뜻이다.
억지로 호흡을 길게 하거나 또는 어떤 방법이든지 인위적으로 호흡하는 방법을 바꾸려는 행위 자체가 무한한 어리석음이라는 뜻이다. 호흡은 그대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며 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하지 않을 수 없다. 육체의 행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내가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거나, 내가 저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이미 어긋난다는 뜻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방법 또한 일념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며 이는 호흡을 바꾸려는 노력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내가 숨을 내쉬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내가 숨을 들이쉬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는 방법으로 그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생각을 호흡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뜻이다.
육체. 몸... 그것은 나도 아니며 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변해가는 만물이 그러하듯이 원인없이 나타났다가 결국에는 원인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것을 '나'라고 아는 그릇된 앎이 고통이며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한 것이다. 책. 비밀의 언어와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편에 충분히 설명된 바와 같이... 일념법을 통하여 '진짜 나는 누구인가, 진짜 나는 무엇인가'라고 끊임없이 물어 들어가므로써 자아의 근원인 의심의 근원에 다다를 수 있다.
일체처 일체시. 행주좌와 어묵동정. 하루종일... 이라는 말들.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오직 자신의 나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물어 들어가라는 뜻이다. 숲속에 사는 작은 동물들의 움직임과 같이 몸은 끊임없는 행위를 통해서 자연물질 그대로 보존될 수 있으며, 인간은 그런 상태에 대해서 '건강한 몸', 건강한 육체라고 말한다.
세상이 변해가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끊임없이 변해만 가는 것.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를 찾는 일. 그리하여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한 정신적인 행위에 대해서 수행이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며 오직 일념법이 유일무이한 길이다. 그것이 또한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궁극적으로는 '생각의 속성과 이치'에 대해서 깨닫는 것이다.
그대의 '나 아닌 나'를 깨달음, 참 나.
그것이 존재계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것이 우주의 기원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