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종교. 세상의 모든 지식은 언어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앎이다. 왜냐하면 지식으로써는 감히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천지만물은 언어로써 존재한다.
세상이... 천지만물이 먼저 있어서 천지만물을 표현하는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있기 때문에 '천지만물'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다툼이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닭이 먼저냐, 닭의 알이 먼저냐... 라는 의문에 대해서 지성은 해답을 구할 수 없다.
단지 닭과 닭알의 문제만이 아니다.
여자가 먼저냐, 남자가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하늘이 먼저냐.
하늘이 먼저냐, 땅이 먼저냐.
아버지가 먼저냐, 아들이 먼저냐... 등의 모든 기초적, 기본적인 의심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무지이다.
그대는... 아니. 인간은 인간의 기원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의 기원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나는 사람이다, 나는 인간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근본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근본을 아는 사람이 없으며, 근본이 있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는 알음알이라고 한 것이다.
세상이 신비롭기만 하다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하다는듯이 떠든다. 신비로운 세상을 하나님이 아니면 어찌 창조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학교보다 더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창조자, 절대자, 조물주, 하나님... 그것들이 언어를 만들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지만...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더 이상의 해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다툼을 포기한다. 서로의 관점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포기는 포기가 아니다. 항상 기회를 엿보며 서로간의 세력을 쌓아나가기 이해서 죽을 때까지 노력한다. 그리고... 역사가 사실을 증명하듯이 서로가 죽고 죽이는 전쟁이 결과지만, 여전히 영원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주 단순한 말이지만... 하나님을 주장하는 자들엑게 '하나님이라는 말, 말, 말'을 창조한 것은 누구냐고 물어보라. 하나님이라는 것이 말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어를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단 종교와 학문 뿐만이 아니다.
인간들의 삶 모두가 그런 분별된 앎으로써의 아귀다툼이라는 뜻이다.
언어. 말, 말, 말은 자아, 즉 나로보터 시작된 것이다.
'나'가 있기 때문에 언어가 있다는 말이며, 나가 없다면 언어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죽은자와 깊이 잠든자에게는 언어가 없다.
언어가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언어가 없다는 말도 없다. 의식이 있다는 말도 없으며, 의식이 없다는 말도 없다. 죽은자도 휴식을 취하는 자이며, 깊이 잠든자도 휴식을 취하는 자이다. 그 둘의 내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어떤 생각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원에는 언어가 없다.
인간의 기원에는 인간이 없다.
우주의 기원에는 우주가 없다.
그대의 기원에는 부모가 있고, 부모의 기원에는 부모의 부모가 있지만... 인간의 기원에는 인간이 없듯이 언어의 기원에는 언어가 없다.
언어란 본래 없는 것에 의해서 나타난 것들이 '있다'는 분별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모든 지식은 분별이며, 분별은 논란이며, 다툼이다. 논란, 다툼, 경쟁, 전쟁... 모두가 '본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있다'는 분별이 원인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마음이 있다는 분별과 마음이 없다는 분별에 대해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마음이 있다는 분별과 마음이 없다는 분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던 인물이 고타마. 싯다르타. 부처님으로 알려진 석가모니의 말이라는 '반야심경'에 기록된 말이며, 예수의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다.
원죄와 구원, 윤회와 해탈...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지만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이해를 넘어서 있는 말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종교나부랭이들의 전쟁은 끊임없이... 영원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식, 알음알이의 한계이다.
진리는 단순하다.
진리가 단순한 까닭은 본래 없는 것에 의해서 나타나 있기 때문에 있다거나 없다라고 분별 할 수밖에 없는 분별이 나(자아)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언어가 없었으며, 언어가 없다는 말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선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생각은 휴식을 취한다. 생각은 필요에 의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며, 휴식이 끝나면서부터 다시 행위를 시작하는데... 깊이 잠듦과 동시에 '나'가 사라진 것이며,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사라져 없었던 '나'가 나타난다. 잠에서 깨어날때 세상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먼저 인식한 연후에 세상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인간이 깊이 잠들고 싶어하거나, 마약에 취하고 싶어하는 까닭은 "'나'라는 주체"를 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나'가 사라진 상태, '나'가 없는 상태가 가장 평온한 기쁨이며, 진정한 휴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아득한 옛날에도 지금 현 시대에도 깊이 잠들지 아니하고, 술에 취하지 아니하고, 마약에 취하지 아니하고서도 항상 깊이 잠든것과 같은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서 '신인, 진인, 도인, 성인...' 등으로 이름 짓고 인류의 성인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처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그들을 우상으로 숭배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무지와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그들 또한 그대와 똑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대와 그들과의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인생에 해답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고 해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 마음이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았던 것이며, 그대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이다. 욕망이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탓할 일도 아니며, 다른 사람을 탓할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신을 탓할일도 아니다.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마음의 작용을 자신이 제어하거나 억제하거나 만족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것과 나쁜것, 큰것과 작은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선함과 악함, 성공과 실패,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가 그릇된 언어에 세뇌당함에 따른 분별된 앎이기 때문에 세뇌의 정도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과 같이 '하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분별할 것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앎일뿐, 그릇된 앎이라는 말이다. 언어 자체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진리. 그것은 네 안에, 마음의 뿌리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마음 밖에서 구하는 것들로써는 결코 평화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진리. 오직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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