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말, 말, 말, 언어는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가 인간들의 전유물이며 인간이 창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차도 이해 할 수 없는 것 같다. 하늘이라는 말이나 하나님이라는 말 또한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에 의해서 창조된 말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말 중에 가장 신비스러운 말이 있다면 '마음'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우리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창조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마음이라는 말을 창조한 것이지만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수많은 다른 말들을 창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라는 말을 창조한 것도 사람이며, 별이라는 말을 창조한 것도 사람이며, 달이라는 말, 태양이라는 말을 창조한 것도 사람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창조해 낸 이름들 중에가 가장 신비스러운 것이 '마음'이라는 말이라고 하는 까닭은 마음이라는 것이 다른 모든 것들(말로서 세상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세상 천지만물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는 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은 인물들이 하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말을 한 것이다. 카페의 글들 중에 '일체유심조의 더 깊은 뜻'이라는 제목의 글에 설명된 바와 같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에게는 통념이 있다. 통념이라는 말은 통상적인 생각이라는 말이다. 인간으로써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생각이며 또한 잠재의식에 저장된 고정관념으로 자리하는 생각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고정관념의 첫째가 '내가 있다'라는 앎이며, 둘째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이며, 셋째는 인생에는 해답이 없다는 앎이다. 인생이 있는데, 왜 인생에 해답이 없는 것일까? 인생에 해답이 없는 이유 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서 사는 것일까?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가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찾는 것일까?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행복이나 자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아우성이다. 서로가 싸우고 이겨서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로가 싸워서 이겨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인간 세상의 모든 교육들이 그러하다. 서로가 싸워고 이겨서 승리해야만 성공이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싸움과 행복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삶 자체가 전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 듣고 배웠기 때문이다. 선의의 경쟁이라지만 현 시대가 그러하듯이 지식이 많으면 만을수록. 문명이 발전되면 발전 될 수록 더 발전되는 것은 인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애완동물들까지 가족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인간들보다 차아리 애완동물이 더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최소한 애완동물들은 사람을 속이지는 않기 때문이겠지? 사실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에게 행복이나 자유 평화로운 삶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그 실마리 조차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식. 지성체의 한계이다.
사실상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끊임없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흔들리기만 할 뿐, 고요히 머물수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편안한 마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으며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다. 겨우 종교에 길들여져서 광신자가 되거나 맹신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아니면 인간의 마음을 악용하여 욕망을 채우려는 다른 집단들에 길들여지거나, 물질이나 명예에 또는 지식에 집착하거나, 명상단체를 찾아 헤매거나 하는 일들이 고작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답은 없다.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거나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거나 모두가 중생일 뿐이다.
현시대 인간 세상에는 명상 인구가 천만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명상이 사업화되는 추세란다. 그런데 명상이 무엇인지 무엇인지 올바르게 아는 인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만든 말이 사람이라는 말이며,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명상이라고 단정짓는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수천년 역사가 그러하듯이 지식으로써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 차릴 수 없다. 인간은 문명을 지향하지만 지식의 최고 지점에서야 비로소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문명의 발전으로써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인간들의 자유와 평화이며 행복이라는 것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자인하는 것이 지식을 우선으로 여기는 지성체들의 한계이다.
본래 명상이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찾기 위한 방법이다. 석가모니의 무고집멸도라는 말과 같이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기 위한 진리의 길이라는 뜻이다. 명상은 본래 진리와 하나 되기 위한 길이다. 하지만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의 관념으로써는 예수의 말과 석가모니의 말을 올바르게 알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금 그들의 가르침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그 날.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예수의 말과 같이 그들은 항상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명상이라는 말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겨난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명상을 가르치는 세상이다. 정신병자가 정신병을 치료하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신비스러운 것은 명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들의 명상이라는 것들이, 그것이 어떤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명상을 했다'는 말 자체만으로써도 마음에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방법들이 모두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명상으로써 위안을 받거나 명상가라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다 보면 일시적으로 마음이 평온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명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범하던 사람들이 여느 단체에 길들여지다 보면 광신자가 되거나 맹신자가 된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말, 말, 말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명상을 주장하는 집단들 또한 그와 유사하다.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최면에 걸리거나 마약에 중독되거나, 술에 중독되거나, 운동에 중독된 사람들과 같이 일상을 떠나 다른 생각에 몰입하는 계기가 마련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열중하다 보면 다른 생각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명상이라는 말과 명상을 가르친다는 자들의 명상을 위한 행위에 집착한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광신자나 맹신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과 같이 타인들의 말, 말, 말에 세뇌를 당하는 것과 같다. 세뇌를 당하는 것이란 어린아이와 강아지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그 이름으로 끊임없이 주입시킴을 반복하다 보면, 그 이름을 불렀을때 어린아이와 강아지가 달려 오는 것과 같다. 무속인들이 신을 믿고 스스로 신이 들어왔다고 주장 하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명상단체들 또한 그와 같이 스스로 또는 타인들의 말, 말, 말에 의해서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에게 왜 그런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다만 잠시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명상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 있다면 '생각의 원리'라는 말이다. 생각의 원리라는 말과 생각의 속성과 생각의 이치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명상에 대해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우선 이해 해야만 한다. 물론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으로 이해가 가능한 것이라면 인간들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터이니 말이다. 참고로 명상은 무고집멸도를 깨닫기 위한 방법이며, 본래무일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인간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말을 믿는다는 말, 그 자체가 말은 말이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대체 무엇에 대해서 명상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은 명상이라는 낱말의 뜻 조차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을 통해서 일부나마 몸과 마음이 치유되기도 한다. 개개인의 경험치에 따라서 치유 효과도 달라진다. 명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명상 방법들 모두가 이와 같이 각기 유사한 효과를 주장한다. 그만큼 효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일은 무속인들의 사례로써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 신을 받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는 사람들이 신을 받으면 몸의 병이 낫는다. 상사병에는 약이 없다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사병 또한 이미 병이 아니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알고보면 아주 단순한 일들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안다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무슨 뜻이겠는가?
본래 명상이란 마음의 근원을 찾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며 진리의 길에 들어서는 것 만으로도 평소와는 달리 마음이 고요해 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 순환하던 생각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근원에는 마음이 없다. 어린아이와 강아지에게는 마음이 없다. 마음이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에게만 있는 것이며, 인간들만의 전유뮬이다.
어린아이와 강아지가 뛰어 논다.
어린아이와 강아지가 눈밭에서 뛰어 논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있다'라고 아는 인간이며, '육체가 나다'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며, 마음이 실제라고 생각하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인간들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며,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며,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억에 바탕을 둔 생각일 뿐이다.
어린아이와 강아지에게는 '내가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없다'는 생각도 없다. '내가 사람이다'라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도 없다. 생각이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없다. 말, 말, 말이 없다. 그것들에게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에게는 하늘도 없으며 땅도 없으며 더 나아가 '나(我)'도 없다. 인간을 제외한 천지만물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지식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바탕을 둔 올바른 말들이 진리의 말로 남겨진 것이다. 예수와 석가모니의 말이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진리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의 바탕이 명상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인간세상에 전해진 것이다. 인간의 관념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말과 방법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왜곡되면서 우상숭배사상으로 전락된 것이다.
어린아이와 강아지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기억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말들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와 강아지 또한 인간들과 같이 인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지식이 없기 때문이며,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라는 말은 '뜻 의'자와 '앎 식'자로써의 의식이다. 사실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왜냐하면 '뜻 의'자의 뜻이라는 말은 '말의 뜻'이라는 말이며, '앎 식'자의 앎이라는 말 또한 말을 인식하는 앎이기 때문이다. 말, 말, 말이 없다면 '의식'이라는 말 또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에 대해서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무위자연'이다. 무위자연이라는 말은 주체가 없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와 강아지에게는 '내가 있다'는 생각도 없었으며, 마음이 있다는 생각도 없다. 그것들은 내가 사람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강아지라는 생각도 없다. 그런 강아지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 놓고 '사람아'라고 부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물론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사람아' 라고 부르게 되면 강아지가 달려오게 된다. 만약에 순수의식의 그런 어린아이에게 '강아지'라는 이름을 지어 놓고 끊임없이 '강아지야' 라고 반복하여 부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렇다. 어린아이가 달려오게 된다. 그대가 그대의 이름과 그대와 동일시 하는 것과 같이 그것들 또한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내가 사람이다'라고 주장한다. 강아지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강아지를 길들이는 것과 같이 그대 또한 그런 방식으로 길들여 졌기 때문이다. 명상은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아차리기 위한 방법이다.
인간은 스스로 '내가 사람이다'라고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자아'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자'자와 '나 아'자로서의 자아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 '자아'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당연시 한다. '내가 있다'거나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이 스스로 아는 앎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인생에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자신 스스로가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이기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간의 기원에는 인간이 없다. 우주의 근원에는 우주가 없다. 언어의 기원에는 언어가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있다'는 것이며 내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젠가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라는 앎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 사실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은 어떤 것에 대해서 '나다'라는 앎이 단견이며 편견이다. 오직 육체 하나만이 '나'라는 앎이 상대적인 앎이기 때문에 편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육체 하나만이 '나(我)'라고 알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앎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적인 언어로써 '나'라고 세뇌 당했기 때문에 서로간에 소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어찌 행복이나 자유,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이다. 전쟁을 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니 아찌 무한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은 지성체이다. 지식과 나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이라는 말은 인간들의 모든 앎을 일컷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내가 인간이다'라고 알기 전에는 아무런 앎(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앎이 없다는 말은 무위를 말하는 것이며 자연을 일컷는 말이다. 천지만물 중에서 앎에 의해서 '나'라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인간무리들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욕망이다. 그리고 분별심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와 강아지는 무위 자연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가 주입식 교육에 의해서 '내가 있다'는 앎이 생겨난다. '내가 있다'는 앎이 최초의 앎이다. 그리고 그 최초의 앎이 마음의 시작 지점이며 분별심이다. '내가 있다'라는 앎의 이면에는 '육체가 나다'라는 앎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념명상의 최종단계 즉 일념의 무념처에서 알아 차리는 것이 '육체가 나다'라는 앎이 분별에서 비롯된 하나의 생각일 뿐, 올바른 앏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생각의 차이이다.
예수의 명상법은 참으로 훌륭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석가모니의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말로 표현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은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을 아는 것일 뿐,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앎은 '내가 있다'는 앎에 바탕을 둔 말에 대해서만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래 무일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말에서의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창조물' 또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지적으로, 생각으로써의 이해는 가능할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말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모든 언어가 그러하다는 뜻이다. 그런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의 삶 속에서는 절대적인 행복이나 평화, 자유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앞장에서는 그런 예수의 명상론에 대해서 설명 했다.
수천년 동안 쌓아온 인간들의 지식으로써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들이다. 하지만 옳지 않은 말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바탕을 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인간 세상에서는 오직 나의 말만이 진리이며, 새생명이이라고 했던 것이며, 언술이 뛰어나서 나의 말을 옳기는 자는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했던 것이다. 인간세상의 '유일자'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의 이와 같은 말에 대한 석가모니의 말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며, '인간 세상에 '나와 비견할 자는 없다'라는 말이다.
일념명상의 결과이며 일념의 무념처라는 말로 표현되는 '삼매'의 경지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명상이란 그런 것이다.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명상은 인간생명의 비밀 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비밀을 아는 앎이기 때문이다.
말, 말, 말... 말은 같은 말이지만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의 지식에 바탕을 둔 앎으로써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써 명상을 했던 석가모니와 예수의 말은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에 현 시대에 그들과 같은 말을 한다면 아마도 정신병동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반야심경의 내용들과 예수의 말은 표현이 다를 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표현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들을 인간이 아닌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석가모니의 초기경전에는 예수의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 사실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사실적인 표현이 있다면 '나는 신도 아니며 용왕도 아니며 더 나아가 사람도 아니다' 라는 말이다. 물론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아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최초로 했던 말은 '별은 별이 아니다'라는 말이라고 전해지는데,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그런 말들이 그져 보편 타당한 앎이다.
세간에는 옛 선사 또는 '고승'이라는 중생들의 '법거량'이라는 말이나 또는 '선문답' 또는 '오도송' '계송'이라는 제목의 무수히도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의 절대 다수가 머리깎은 중생들의 말재간이거나 우문우답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 조차도 없는 것이 현시대의 지성체들이다. 그들의 우문우답들에 대해서 그져 그러려니... 라고 생각하거나 막연하게 옳은 말이지만 도를 공부한 사람들의 신비로운 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올바른 명상법을 깨달아 앎으로써의 명상의 결과는 신비르럽게도 석가모니의 말과 예수의 깊고 깊은 신비스러운 말들에 대해서 까지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며, 참으로 올바른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철학자들이거나 수많은 학문들의 최고의 경지에 서 있다는 인간들 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말들에 대해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까닭은 '일념법'이라는 올바른 명상법을 만났기 때문이다. 자시의 마음을 그만큼 더 깊이 이해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고통을 겪는 까닭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바른 명상법이란 다른 대상에 의존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하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앎으로써, 마음이 본래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올바른 명상법을 통하여 생각의 원리를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말이라는 초기경전에는 예수의 명상법(하루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는 방법) 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된 명상 방법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무상한 것은 나(我)가 아니다, 그것을 관찰하라.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무상'이라는 말은 한자로 '無常'이다. '없을 무'자와 '항상 상'자로써 항상할 수 없는 것 즉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며, 인간이 나라고 여기는 몸을 뜻하는 말이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은, 예수의 말은 서양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번역되어 한국에 전해진 것이며 석가모니의 말은 중국어인 한자로 번역되어 한국에 전해 지면서 그 뜻이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신비스러운 것은(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겠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한글로 번역된 성경의 내용들과 한자로 전해진 불경의 내용들을 혼합한다면 완전무결한 명상법이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은 서로가 다른 시대, 다른 상황, 다른 환경, 다른 조건에서의 다른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 중 한나에 대해서 예를 든다면, 예수의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다.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에 대한 석가모니의 말에 대한 한글로서의 표현은 '인간의 본래성품이 부처'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성경이나 불경을 읽어본 적이 없다. 다만 인터넷을 통해서 우상숭배사상으로 세뇌당한 사람들의 끊임없는 논쟁, 논란을 보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의 일부를 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들의 논쟁들 속에서 볼 수 있는 많지 않은 성경의 내용이나 불경의 내용들로써도 그들의 깊은 뜻에 대한 설명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은 왜곡되고 변질 되었으나 그들의 본질은 똑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천만겁 난조우'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올바른 명상법을 만나거나 찾아 냈으며, 그 방법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은 언어를 사실로 여긴다. 언어를 사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언어에 의해서 '내가 사람이다'라고 세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사실로 여기는 사람들의 관념으로 본다면 그들 또한 사람의 자식이었으며 사람이다. 하지만 언어가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나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지전능한 유일자'이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던 것이다. 언어의 기원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에 '나와 비견할 자가 없다'는 말과 '세상에 오직 나의 말만이 진리다'라는 말과 같이.
석가모니의 명상법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