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식'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언어의 기원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의 말, 말, 말이다. 사실상 순수의식이라는 말 또한 인간의 관념으로써 납득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순수의식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가 있다'는 상대적인 앎 이전의 앎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모든 앎은 경험된 기억세포에 저장된 앎으로써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앎들이다. 경험된 기억 중에 최초의 앎이 '내가 있다'는 앎이며, 이 말 또한 남들에게 들어서 아는 말이다.
예수의 모든 말에는 '너희가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라는 말이 전제되어 있다. 너희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아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신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또한 너희가 '내가 있다'고 알기 이전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시절에는 '몸이 나라는 생각'이 없었으며 마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린아이의 순수의식에 대해서 상상하거나 미루어 짐작할 수 없다. 상대적인 언어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라는 앎이 상대적인 앎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내가 있다'는 상대적인 앎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상대적인 앎에 바탕을 둔 모든 앎은 상대적인 앎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이며, 인간들의 문명이라는 지식을 통한 모든 앎이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상대적이 아님에 대해서 절대적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하지만 절대적이라는 말 또한 상대적인 절대적이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말중에는 '영원한 삶'이라는 말이 있으며, 영생이라는 말이 있다. '나의 말이 진리이며, 길이며 새생명
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석가모니의 말이라는 반야심경에 있는 말이다. 불생불멸이라는 말이며, 무노사라는 말이며, 무안계, 무의식계라는 말이다.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만 영원한 삶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일 뿐, 다른 뜻이 아니다.
예수의 말과 석가모니의 말에는 뭔가 '영원한 것이 있다'는 말로 이해 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하지만 영원한 것이 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 말, 말이며 다른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생각이다. 말은 말이다. 말이 없다는 말도 말이며, 말이 있다는 말도 말이기 때문이다. 생각 또한 그러하다. 생각이 있다는 생각도 생각이며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생각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있다는 말도 경험에 의해서 아는 기억된 생각 세포에 저장된 말이며, 생각이 없다는 말도 기억세포에 저장된 타인으로부터 들어서 아는 말이다.
말이 있다는 생각도 생각이며, 말이 없다는 생각도 생각이다.
시작도 중간도 끝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말과 생각라는 것이다. 근원이 없으니... 영원한 것일까?
그대가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도 기억된 하나의 생각이며, 그대가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 또한 기억된 하나의 생각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도 기억된 생각 중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생각이며, '내가 없다'는 생각 또한 기억된 생각 중의 한 생각이다. 마음 또한 그러하다. 마음이 있다는 생각도 경험에 바탕을 둔 기억된 생각 중의 한 생각이며, 마음이 없다는 생각 또한 기억세포에 저장된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알게된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의 모든 지식이 그러하다. 아니. 인간들이 모든 앎이 그러하다. 경험에 의해서 타인들의 말을 통해서 알게된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어떤 생각은 옳은 생각이며, 어떤 생각은 옳지 않은 생각이겠는가? 그 무수히도 많은 생각들 모두가 상대적인 생각들이며 상대적인 말로 표현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관념으로나마,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에 지식이 본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인위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에 '무식(無識)이며 무지(無知)'이다. 어린아이와 함께 뛰어 노는 강아지와 어린아이는 무명(無明)이며 무지이기 때문에 무위(無爲)자연이며 자유 그 자체이다. 그것들은 바람과 같이, 구름과 같이... 두려움이 없으며 언어에 묶이지 않기 때문에 언어에 구속됨이 없다. 걸림이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말과 같이 그것들에게는 근심 걱정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다. 삶이 없으며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어린아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순수의식'이라는 생각도 없다. 강아지 또한 그러하다. 하늘 또한 그러하다. '내가 하늘이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말을 지식(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앎)으로 아는 사람들이 '하늘이 있다'고 아는 것이며, 지식으로써 '내가 있다'고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별이 내가 별이라고 말하지 아니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달이 뭐라카드나' 라는 말과 같이 밤하늘의 달이 '내가 달이다, 내가 아름답다'고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지식으로써 '내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나'라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다른 대상들에게도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식의 허구이다.
지식은 인간에 대해서 '지구 상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난 동물에 대해서 '사람'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그것에 대해서 '자아'라고 말한다. 지식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스스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동물이다. 움직이는 물건이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본래 움직이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지식은 사람이 아닌 것에 대해서 사람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나(我)'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러면 어떠하겠는가?
인간의 조상이 강아지이거나, 곰이거나, 호랑이거나... 상관 없는 일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나'라고 주장하는 모든 인간들이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안다거나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댜로 안다면... 그리하여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와 같이 강아지거나 호랑이거나 곰이거나 그것들과 시비분별 없이 함께 노닐 수 있다면, 그리고 두려움 없이 항상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있다면 지식은 쓸모 있는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지식이 많아지는 만큼 인간들간의 갈등의 골만 깊어져 가니... 정녕 지식은 쓸모 있는 것일까?
아득한 예날부터 현 시대까지 발전된 것은 지식이다.
인간은 지식에 대해서 문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명의 발전은 물질만능 시대로써 발전이 더 하면 더하는 만큼 더 큰 전쟁이며 투쟁이며, 경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지식의 결론이다.
만약에 인간이 지식으로써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면... 아마도 종교나부랭이들이나 명상단체들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더 나아가 인간들끼리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상, 사상, 이념' 따위의 다른 생각들에 세뇌 당하여 피를 흘리는 전쟁 따위를 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초월한 올바른 앎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와 같이...
수천억년 이전에도 인간들은 있었다.
그 시대 인간들 또한 지식의 최고 지점에서야 비로소 지식의 한계를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 지식을 쓰고 버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지식을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 때 부터 인간 세상에는 지식을 모두 버렸던 극소수의 인간들이 있었으며, 그런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로 전수 되어 왔던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비밀이며, 비밀의 언어이다.
무식과 지식을 초월한 앎이기 때문에 비밀의 언어이며, 언어의 비밀이다.
그들에 대해서 '초월자'라는 말로 표현 한다면 초월자들의 말은 인간의 모든 지식에 대해서 올바른 앎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아는 인간이 '초월자'들이다.
초월자들의 말은 시대와 관념, 통념을 넘어서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는 말이다. 아득한 예날부터 현 시대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말은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일 뿐,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말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들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음으로 하여 '광명의 빛'이라는 말을 창조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지식에는 해답이 없다.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인생에 해답이 없는 이치와 같으며, 자아의 완성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어두운 앎(밝음이 없는 앎)'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자아의 완성을 이루거나 마음이 무엇인지 아는 앎에 대해서 '광명(光明)'이라고 한 것이다. 무명이 아니라 광명의 앎이라는 뜻이다. 상대적인 관념을 초월한 앎으로써의 올바른 앎에 대해서 '빛 광'자와 '밝을 명'자의 광명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이 말을 오해 하여 부처님의... '광명의 빛'이라느니,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로서 우상숭배를 조장하게 된 것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인간들의 모든 앎에는 근거가 없다.
그져 경험된 그대로 기억세포에 저장된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앎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한채 절대적일 수 없는 말들에 대해서 길들여진대로 주장하는 것이 지식이라는 것이며 무명(無明)이다. 행복이라는 말과 불행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자유라는 말고 구속이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다. 세상에 어떤 말도 상대적인 말이 아닌 것은 있을 수 없다. 절대적인 행복이나 절대적인 자유나, 절대적인 평화는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들의 지식에 바탕을 둔 모든 앎들이 이와 같이 상대적이 아닐 수 없는 말들이라는 뜻이다.
명상이란, 명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주보다 더 무한한 것이 인간의 욕망이며, 인간의 지식이라는 앎이다. 인간은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다. 경험이지만 기억할 수 없는 순수의식에 최초로 각인된 하나의 생각이 '내가 있다'는 생각이며 이는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다. 단순한 하나의 생각이 순수의식에 깊이 각인된 것이며, 그 하나의 생각에 바탕을 두고 '내가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상대적인 생각들이 현재 그대의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주장하는 그대 자신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에게 가장 깊은 고정관념이 있다면 '내가 있다'는 단순한 하나의 생각이며,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다. 절대적인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절대적인 '나'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착각이다. 그대의 생각 속에서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의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수많은 생각 들 중에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명상이란 인간들의 모든 앎이 허구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할 수 없는 지성체들이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명상은 또 다른 분별된 망상의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종교나부랭이들이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며, 인간세상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전쟁, 삶을 위한 경쟁, 나만 잘살면 된다는 방식의 삶의 투쟁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일념명상이란 인간들의 모든 앎이 허구이며, 자신의 마음이 허구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이 기억할 수 없는 순수의식에는 없었던 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나라는 것'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한한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인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들이 죽는 날까지 경쟁, 투쟁, 전쟁을 일삼기 때문이다.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며, 명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며,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정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주장하니... 어찌 무한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있겠는가?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않다면 살아갈 가치가 있겠는가?
'너 자신을 알라' 그것이 존재계 모든 것들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윤회법. 일념명상법. 진원법이 진리이다.
진리. 오직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