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지성체이며 인간 지식은 세상만사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아득한 옛날부터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고 해답을 찾아 현시대까지 왔다. 그런데 현시대에도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지식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식 발전은 개개인의 행복지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지구가 둘글든 말든, 달나라가 있든 말든, 행성들이 충돌 하든 말든,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그런 일이 개개인의 행복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다. 사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죽는 날까지 자신 이외의 대상(지식. 사랑. 부와 명예)을 찾아 헤매는 까닭은 스스로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인간이 엄마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無心'일 수 있다면 발전이나 지식 욕망 따위로써 고통을 겪는 일은 없다. 욕망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사실 말을 배우고 익히기 전의 어린아이에게는 지식이 없다. 인간은 누구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지만, 순수의식의 아이는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 아니다. 한마디, 두마디 말을 배움으로써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다. 맘마. 엄마. 아빠. 강아지... 등의 말을 배우는 것이 곧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이며, 듣고 배우게 되는 여러 가지의 말이 기억 세포에 저장 되면서 저장된 생각과 더 배워서 알게되는 다른 말들과의 유기적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방법에 따라서 어린아이가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 의해서 그대의 '자아, 나'가 탄생된 것이며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생각)이 최초의 지식이다. 고정된 생각 즉 고정관념이다.
'내가 나다'라는 생각이 없었던 아이에게 '내가 나다'라는 생각(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마음이 먼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내가 있다'는 생각이 (인간)최초의 분별된 생각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최초의 지식이다. '내가 있다'는 최초의 한생각이 "마음의 뿌리"이다.
'내가 있다'라는 생각이 일어나기 까지... 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수많은 말, 말, 말들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알아 듣게 되면서 타인을 보고 타인(사람)을 닮아가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내가 있다'라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내가 사람이다 또는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는 분별(분별심. 지식. 마음)이 없다. '하늘이 있다거나 하늘이 없다'는 분별이 없다. 분별 의식(앎. 지식)이 없는 상태에 대해서 순수의식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내가 있다'는 분별심이 생겨난 이후에도 한동안은 '너와 나'라는 분별이 분명치 않다. 그리고 더 많은 말, 말, 말들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맘마, 아빠, 엄마, 누나, 형, 까까, 호랑이, 곶감, 무서운 것, 예쁜 것, 착한 것... 등이다. 하지만 아직 '삶'이라는 말이나, '죽음'이라는 말이나, 두려움이라는 말이나, 고통이라는 말, 괴로움이라는 말, 외로움이라는 말, 아프다는 말, 즐겁다는 말, 기쁘다는 말, 가슴이라는 말, 머리라는 말... 등의 낱말들에 대해서는 말은 알지만 그 뜻을 모른다. 순수의식. 그곳에는 인생이 없다. '내가 남자라는 생각이 없다. 내가 여자라는 생각이 없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가장 처음 일어난 생각(지식)이다.
지성체는 이런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태초의 혼돈'을 말하지만 지식이 말하는 태초의 혼돈은 사실 태초의 혼돈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순수의식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 '내가 있다(존재)'라는 앎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하늘과 땅'이 없다. 하늘이라는 말(생각)이 없다. 아니. 하늘이라는 말, 땅이라는 말이 없다. 어린아이에게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었다'는 말도 없었다. 태초라는 말도 없으며, 창조라는 말도 없다. 혼돈이라는 말도 없다. 삶이라는 말도 없다. 죽음이라는 말도 없다. 고통이라는 말도 없다. '의식'이라는 말도 없다. '허무'라는 말도 없으며 '무심'이라는 말도 없으며, '무상'이라는 말도 없다.
아이가 말을 배움으로써 많은 말들을 기억하게 되며, 그 말들과 다른 말들이 함께 기억세포에 저장된 것이다. 그것이 지금 그대의 지식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고정관념이다. 하지만 인간 관념으로써 생각할 수 없는 사건이 '어린아이 시절의 무언처(無言處)'이다. 그리고 일념법명상으로써 최상의 정신집중 상태에 이르러 다다르는 곳이 또한 '무언처'이다.
사실 '사실'이라는 낱말 또한 '사실적으로 존재 하는 사실적인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 자체가 사실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 자체가 사실적인 것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서 익힌 지식(생각)과 같이... 말, 말, 말로써만 존재하는 것이 인간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소리와 형상'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명색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순수의식에는 언어가 없다.
말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내가 사람이다'라고 알게 된 것이다.
본래 없었던 말을 배우고 익혔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말, 괴로움이라는 말, 삶이라는 말, 죽음이라는 말, 두려움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며, 그런 말들과 '나(我)'를 동일시 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고통의 원인이다.
인간 지식은 본래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나'라고 (타인들의 말에 의존하여)알게된 것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체는 그 자체가 '허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허무한 것'이며 '무상한 것'이다. 삶이 전쟁과 같은 고통이며, 죽음은 삶보다 더 두려운 고통이며 공포스러운 것이다. 그런 말을 듣고 배웠기 때문에 아는 것이며, 나와 동일시 하는 것일 뿐 두려움이나 고통에는 실체가 없다. 명색 즉 이름(낱말)과 형상의 동일시에 대한 착각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 어느 누구도 편안할 사람이란 없다. 모두가 자신만의 짐을 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물론 순수의식, 무의식, 잠재의식에 대한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 고통을 감내하지만 자식의 입장에서 자식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책임감이나 의무감 등의 똑 같은 무게의 짐이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가장(가공, 만들어진)된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순수의식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지식이 그러하다. 지성체들의 앎이 이토록 허무맹랑한 것이다. 서로가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는 것에 대해서 '성공'이며, 행복한 삶이라고 주입식 교육(세뇌)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나의 삶'이라고 당연시 하는 것이다. 지식은 경쟁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주장한다. 경쟁을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무한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서로가 싸워서 행복할 수 있겠는가? 욕망의 크기는 모두가 똑 같은데, 어떻게 욕망을 나눌 수 있겠는가? 마음 자체가 욕망인데 어찌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마음 자체가 스트레스인데, 어찌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기도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다른 우상이든, 운명의 신이든, 조상신이든... '내가 있다'는 생각이 일어난 이후부터 죽는 날까지 혹시나, 행여나... 신의 뜻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은 죽음 앞에서도 씻어버릴 수 없다. 자신의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남들에게 묻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남들 또한 다른 남들에게 묻는다. 말, 말, 말, 말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다. 종교에, 신에, 사주팔자에, 관상가에게, 풍수지리학에, 철학관에, 조상신에, 무속인에게 더 나아가 외계인에게 까지...
자신의 순수를 모르는 것이 지식이며, 지성체이다. 그리고 지성은 끊임없이, 끝 없이 다른 말, 말, 말을 창조해 내는 도구에 불과하다. 연기하는 것이며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 끝이 없는 이유는 본래 없었던 말, 말, 말에 대해서 사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시절에 없었던 말, 말, 말에 대해서 신뢰하는 까닭은 '내가 있다'는 앎(생각)이 말, 말, 말에 의존하여 생겨난 생각(마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과 '내가 없다'는 생각' 그리고 '언어가 있다는 생각과 언어가 없다는 생각은 모두 기억세포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생각들 중 하나의 생각이며, 한 생각의 차이일 뿐, 모두 동일한 생각(낱말)들이다.
인생의 해답을 찾는 방법이 있다면 유일하게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방법 뿐이다. '생각의 원리. 생각의 속성과 이치라는 말은 인간세상에서는 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일념법 명상(수행)'으로써 '생각의 이치'에 대한 앎이 드러날때, 그때 비로소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다가오게 된다. 그때 비로소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이 '생각의 원리'에 바탕은 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닫게 된다.
인간 지식으로써는 수천년 동안 연구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감히 근접할 수도 없다.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같이, 소위 성인, 성자로 여기는 인물들의 말 또한 이해 할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의 말이 '생각의 원리'에 바탕을 둔 말이며, 분별심이 없는 어린아이의 순수의식에 바탕을 둔 말들이기 때문이다.
지성체의 지식에 공통점이 있다면 '인생은 허무한 나그네'라는 말과 같이 인생에 해답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앎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생로병사가 당연한 것이며, 희로애락이 당연한 것이며, 서로가 경쟁해야만 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반면에 '도를 깨달음'으로서 '본래성품. 순수의식'으로 회귀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고집멸도'라는 말과 같이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고통과 괴로움, 근심 걱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지식이며 지성체이다.
인간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들은 상대적인 말, 말, 말... 언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픈 마음도 마음이며, 편안한 마음도 마음이다. 이런 마음도 마음이며, 저런 마음도 마음이다. 비워진 마음도 마음이며, 채워진 마음도 마음이다.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낱말들이 그대의 '뇌세포에 저장된' 무수히도 많은 생각(낱말)들이다. 그리고 그 각기 다른 생각(낱말=소리와 모양)들이 유기적인 작용에 의존하여 끊임없이 일어나는(윤회하는) 생각들이 그대의 '마음'으로 드러나는 말, 언어, 속삭임이다. 갈대와 같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마음이다. 바닷가의 잔물결과 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이다.
인간세상 자체가 무명이며 혼돈이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며, 세월이 변해가는 것이 아니다. 변해가는 것은 오직 그대의 마음이다. 실체도 없으며, 근거도 없는 마음이 지금 그대와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언어. 말, 말, 말이 있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언어. 말, 말, 말이 있기 때문에 해답이 없는 인생이 있다.
해답이 없는 인생이 있기 때문에 해답을 아는 신이 있다.
신은 그대의 순수의식과 둘이 아니다.
세상에 스스로 만족하여 평화로운 사람은 없다.
지성체. 그 자체가 의구심이기 때문이다.
의심의 근원에는 의심이 없다.
일념법이 진리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 일념윤회법이 진리인 까닭은 오직 그 방법만이 의심의 근원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법,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있기 때문에 신이 있다.
그대의 '나'가 있기 때문에 '신'이 있다.
그대의 '나'와 그대의 '신'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때' 그때 비로소 무위자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일념법이 진리이다.
진리에 의존하라.
진리 오직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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