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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관련 질병들 /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비만, 신경통, 통풍 등의 근본원인과 완치 - 식자우환 그 어리석음과 진리

일념법진원 2014. 5. 25. 06:51

문명의 발전과 의학과 의학기술 그 어리석음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인간들의 문명 발전의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은 문명발전을 위해서 사는 것일까?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문명발전이 필요한 것일까?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지식이 필요한 것일까?

지식을 위해서 인간이 필요한 것일까?

 

인간 생명은 끝이 있는데, 어찌하여 지식은 끝이 없는 것일까?

지식이 지식의 시작도 모르며, 지식의 끝이 없는 이유도 모른다면, 대체 지식은 무엇을 위해서 필요한 것일까?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정녕 문명발전이 인간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현시대 인간들은 문명발전이라는 말이 창조되기 이전보다 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일까?

 

 

전화기, 핸드폰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 자동차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 빌딩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 문명이라는 말이나, 발전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현시대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병원'이라는 말이나, 의약품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그들의 삶은 불행한 삶이었을까? 

 

 

인간들의 문명발전 행위의 결과는 어떤 모습일까? 

스타워즈라는 영화와 같이 외계인들과의 전쟁일까? 

 

구석기 시대라는 시대와 같이, 문명과 상관 없이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예측 불가능한 매래 어느날 외계인들과의 전쟁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면... 어떤 삶이 더 가치 있는 삶일 수 있을까? 

 

만약에 행복이 있다면, 인류의 역사로 볼때, 어느 시대에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비교적 행복이라는 말과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들일까? 

 

 

삶이 무엇일까? 

진정한 행복과 자유, 평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수천. 수만. 수십만년 전에도, 현 시대와 같이 행복한 인간은 없었다.

행복이라는 말, 평화라는 말, 자유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만 있었을 뿐이다.

 

'행복, 자유, 평화' 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

'정의, 용기' '사랑' 이라는 말이 없던 시대.

기도, 기원, 추구, 염원... 이라는 말이 없다면, 그런 것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어떨까?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그대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인간들의 인생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 서로가 도전하고 서로가 경쟁하고, 서로가 승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태어나서 죽는 날가지 해야 하는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 경쟁하고 투쟁하며 다투는 일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가장 큰 어리석음이 있다면, 자신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본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삶에 관심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삶이 천태만상이지만... 그들 모두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조차 분명한 앎이 없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까?  

 

인간이 자신의 삶보다 남들의 삶에 더 관심이 많은 이유는 자신 스스로의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는 삶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생에 뚜렷한 목적이나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에 해답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삶이라는 것이 겨우 남들과의 경쟁이거나 투쟁이거나 전쟁이다. 인간들의 삶 자체가 논란이며, 경쟁이며, 투쟁이며, 전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남들의 삶을 흉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남들 또한 그대를 남들로 본다. 인간들 모두가 그런 사고방식으로 길들여 졌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 모든 인간들이 그렇지는 않다.

인간들에게 '가치 있는 삶'이 있다고 주장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않다면 살아갈 가치도 없다'고 했던 소크라테스'이며, 종교나부랭이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변질되었으나,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써 올바른 인생의 길을 전파했던 예수와 석가모니, 노자와 장자 등이다. 

 

 

인간 관념으로써는 '진리'라는 말이 있으되, 진리를 이해 할 수 없다.

'도, 깨달음'이라는 말이 있으되 그 말을 이해 할 수 없다. 그 말, 말,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은 이해 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라는 말이나, 평화라는 말이나,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 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이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일, 종교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일,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일 따위로써는 그것을 이해 할 수 없다. 이해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생에 대해서 일장춘몽이라고 하는 것이며, 환상의 세계이며 몽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앎이 이러하다. 

본래 지식이란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앎이 아니라, 말의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을때,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죽음 또한 삶과 같이 여여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남들로부터 '삶을 포기한 사람 같아요' 라는 말을 들었던 사십대 여인이 귀한 인연으로 '도가의 선식'을 만났단다. '투석' 일주일 전의 일이다.

 

 

 

 

'투석'이란 몸의 피를 빼내어 정화한 후에 다시 몸속으로 넣는 방식으로써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데, 그 고통으로써 병이 완치 되는 것이 아니라, 시한부 생명으로써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까지 생명을 연장하는 의학의 기술이란다. (삶을 포기하기에 이르럿던 여인이 '도가의 선식' 복용 일주일만에 포기했던 전시회 및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며, 선식 한달만에 당뇨와 합병증 등의 모든 약물 처방이 필요 없다는 결과가 나왔단다. 대구 소재의 경대병원의 검사 결과이다. 물론 선식 시작하면서부터 약물 복용은 끊었단다. 하지만 아직 완치는 아니다. 완치를 위해서는 약 2개월 가량 더 선식을 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했단다. 도가의 화원의 말이다)

 

 

 

 

의학이나 각종 수많은 의술들... 식자우환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인간의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사실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의학이며, 의술이며, 참단 과학이라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정녕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일까? 인간에게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한 것들일까? 내가 보기에는 인간들의 모든 학문이나 의술 등의 기술 따위는 인간들의 행복을 위한 것들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부류의 인간들의 자기들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잔악무도한 행위이며, 무지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는 것 같다. 

 

인간들의 모든 법칙, 유위법에는 예외가 있다.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이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예외 없는 법칙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외 있는 법칙이 있기 때문에 예외 없는 법칙이 있다. 

 

'道'의 법칙이 그러하다. 

'도의 법칙'이란, 석가모니의 '무위법'이며, 예수의 진리의 길이며,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살아가는 길이며, 장자의 소요유의 삶을 이르는 말이다. 책과 이곳 카페에서 설명되는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와 하나되기 위한 무위법을 깨닫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도가에서 진행되는 단식과 선식은 '도'에 바탕을 둔 방법으로써 인간의 자연과 같은 건강을 위해서는 최선의 방법이며,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과 자유, 평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이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이라는 낱말의 뜻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지식을 초월한 올바른 앎이라는 말, 말, 말에 대한 뜻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

 

오직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며, 도의 실마리를 찾았을때, 일념을 깨달았을때 비로소 '信念'이라는 낱말의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념'이라는 낱말의 본래의 뜻은 '믿을 신' 자와 '생각 념' 자로써 '생각을 믿음'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지식이란 '명상'이라는 낱말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명상'이라는 낱말에 대해서 상상하거나 또는 종교나부랭이들의 어리석은 언술에 속아서 '명상'이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신념'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 또한 올바른 앎이 아니라, 신념이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신념(信念). 누구의 생각을 믿는 것에 대해서 '신념'이라고 하겠는가? 

 

남들의 생각을 믿는 것이 신념인가? 

그대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이 신념인가? 

 

분명한 것은 남들의 생각을 믿는 것이 신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을 믿는 것이 신념이라는 낱말의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은 어떻게 구성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대의 생각 또한 그대 스스로 깨달아 아는 생각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워서 알게된 앎에 바탕을 둔 생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래 '신념'이란 타인들에게 듣고 배워서 알게되거나 정보 수집으로써 알게되는 '사상이나 이상 또는 이념' 등에 세뇌 당한 앎이 아니라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간직된 올바른 앎이 드러남으로써 알아차리게 되는 올바른 앎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 앎일때, 올바른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앎일때 비로소 '진리'라는 말과 '도' 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남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우상을 숭배하는 앎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앎일때, 진정으로 올바른 앎이며, 이에 대해서 지식을 초월한 '지혜'라는 말로 표혀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통찰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모든 것을 아는 앎으로써 전지전능이라는 말과 같은 앎만이 남는 것. 그것에 대해서 '도, 진리, 깨달음' 등의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 아는 자에 대해서 명색이 '부처'라고 하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라는 말. 

'네 안에 하나님, 신이 있다는 말.

일념을 깨달아야만 '올바르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일념을 모른다면... 인간들에게는 여전히, 영원히 우이독경일 수밖에 없으니.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원한다면, 진리의 길을 가라.

일념법이 진리이다.

 

일념명상법으로써 그대와 인류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법 명상의 집"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powwr1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