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알려진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재창조된 "이데아" 라는 말의 본래의 뜻이 '노자의 도' 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석가모니가 말했다는 '불성, 부처'라는 말 그리고 예수의 말로 전해지는 '성령'이라는 말 등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써 "영혼"이나 성령 등의 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다면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것들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생각의 환상물질(本無)'이기 때문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말은 노자, 장자 그리고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과 다르지 다르지 않은 말들이지만, 인간의 관념으로 해석되면서 '소크라테스'는 그져 위대한 철학자 쯤으로 알려진 것 같다. 만약에 소크라테스가 뭇 중생들과 같은 사고방식이었다면...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않다면 살아갈 가치도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인간이면서 감히 다른 인간들에게 살아갈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또한 예수, 석가모니 등과 같이 '도를 깨달은 성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의 남겨진 말들의 해석을 통해서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책과 카페에 자세히 설명되었으니 생략하자. 다만 분명한 것 하나만은 알고 넘어가자. 물론 인간 관념을 초월한 말이기 때문에 상근기 만이 알아들을 수 있거나,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내가 사람이다' 라는 고정관념이 모든 앎의 바탕이며, 그들은 "내가 사람이다" 라는 앎이 상대적인 분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바탕을 둔 앎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나와 너 라는 분별심이 허구'라는 앎에 바탕을 둔 가르침으로써 진리이며, 진언이다. 이런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일념법' 수행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야만 한다.
여기서는 소크라테스의 진언 중에서 '선과 악'의 분별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무지이다" 라는 말은 사실상 선과 악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관념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으나 선과 악은 인간의 관념에서 비롯된 인위적인 분별일 뿐, 선과 악의 분별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 관념으로써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상반된 언어, 상대적인 말에 대한 중생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선과 악에 대해서, 선과 악의 분별 자체가 지식이 아니라 무지라고 말한다. 예를 든다면 '무위자연'의 존재에 대해서 선과 악으로 분별할 수 없듯이... 선과 악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은 또한 예수의 '너희가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석가모니의 '本無, 본래무일물.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 이라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선과 악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가공된 지식에서 비롯된 분별이며, 선과 악의 분별 자체가 무한한 어리석음이라는 뜻이다. 물론 인간 관념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말이지만... 도를 깨달은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앎(識)이다. "무위자연"을 선과 악으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니.
사실 소크라테스의 '선함'이라는 말에서의 '선'이라는 글자의 본래의 뜻은 '착할 善' 자가 아니라 '신선 仙' 자이다. 즉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같이 '자신의 나'를 깨달아 앎으로써의 올바른 앎이라면 '나와 너' 라는 분별이 사라지듯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상대적인 분별이 사라지기 때문에 선악의 분별 자체가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지식이라는 모든 앎이, 올바른 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없다는 뜻이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무지' 라는 말이다. 인간들의 고정관념으로 주장하는 선과 악의 분별은, 지식은 지식이지만 지식이 아니라 '무지(無知)이며 무식(無識)'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말이 있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는 불경에 등장하는 '식'이라는 낱말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말, 말,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에 대해서 지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육식, 칠식, 팔식, 구식' 등으로 왜곡 되면서 수많은 말들이 창조된 것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는 '식'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십이 연기법-에 대한 설명과 같이 '識(말, 지식, 언어가 없는)이 없는 어린아이의 행위에 대해서 '무명과 행'으로 표현된 것이다. 어린아이의 무명의 행위(강아지와 같은...) 과정에서 '말을 배움'이 '식'이며, 그 識이라는 앎이 곧 명색, 즉 이름과 형상의 동일시라고 설명한 바와 같다.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무지이다' 라는 말은 달리 표현한다면 유일한 선은 올바른 앎, 진리, 진언이며, 유일한 악은 인간의 분별된 지식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너희가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으나, 너희가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 시절에는 선과 악의 분별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너희가 어린아이의 순수의식 시절에. 말을 배우기 이전에는 '나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내가 사람이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내가 여자라는 생각, 내가 남자라는 생각... 등을 비롯하여 하늘이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땅이라는 생각도 없었다' 라는 뜻으로써 '선함과 악함'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과 악을 분별함 자체가 무지로써 우주보다 더 무한한 어리석음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말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써 '즉견여래' 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본래성품을 보는 것에 대해서 '부처'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본래성품이라는 말은 "마음이 사라진 상태"를 일컷는 말로써 '본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마음이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고집멸도' 라는 말로써 고통이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소멸하는 법, 방법, 도리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뜻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말의 요지이다. 예수의 모든 말들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는 경전에는 "불능견여래" 라는 말이 있는데.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 이 있으면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말과 같이 인간이 본래 인간이 아니라, 말을 배움으로써 인간이라고 알게 되었다는 뜻과 함께 말을 배우기 이전에는 '아상' 즉 '내가 있다'는 생각이 없었으며, '인상' 즉 '내가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없었으며, '수자상' 즉 내가 나이가 있다는 생각'이 없었으며, '중생상' 즉 내가 중생이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있으면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육체가 나다, 또는 육체가 나가 아니다" 라는 생각(앎)이 상대적인 분별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앎,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무지이다.
'내가 있다' 또는 '내가 실존이다' 라는 말이 상대적인 편견이며, 단견이며 소견일 뿐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나부랭이들이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듯, 인간들의 '내가 옳다'는 주장 또한 상대적인 것들에 대한 주장이기 때문에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한 것이다.
사실 지식은 지식의 시작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으며, 지식이 끝이 없는 이유 조차 설명할 수 없다. 인간 생명은 끝이 있는데, 지식이 끝이 없다면 과연 지식은 인간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지식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에 그대가 지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런 생각을 한번쯤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말이다.
왜, 지식은 끝이 없는 것이겠는가?
그렇다. 상대적인 말, 말, 말로써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위해서는 전혀 쓸모 없는 것이 지식이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인간들의 지식이라는 앎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볼 수 있는 그대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대 또한 궁극에 이른 자들의 어린아이시절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아이 시절이 있었으며, 그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기 이전에는 '내가 사람이다' 라는 편견이 없었으며, '내가 나다'라는 주체가 없었으며, '내가 나이가 있다'라는 생각 또한 있을 수 없었다.
단지 말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이름'을 알게 되면서 '나이'를 알게 된 것이며... 더 나아가 말을 배우고, 교육을 받으므로써 '내가 있다'고 알게 된 것일 뿐, 본래 '나는 나가 아니었다'것이다.
물론 선과 악이라는 분별심 또한 어린아이시절부터 그렇게 말, 말, 말로써 세뇌 당한 것이기 때문에 선과 악의 분별이 무지이며 어리석음이라는 가르침이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무지'라는 말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이해(=오해)하여 '원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육도윤회'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로 왜곡시킨 것들이 종교나부랭이들이며, 그 종교나부랭이들과 지식들, 그리고 명상을 지도한다는 중생들의 모든 행위가 삿된 도를 행하는 자들이며, 유일한 악의 무리들이다. 선과 악의 분별 자체가 악행이기 때문이다.
하근기 중생은 이런 말에 대해서 크게 웃어버릴 수 있으며, 중근기 중생은 반신반의 할 것이며, 상근기는 이해 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더 나아가 상근기라면 일념법 수행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자신의 존재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그 길, 진리의 길을 갈 것이다.
살찐 돼지가 아니라면...
철학을 비롯한 인간들의 모든 지식이 우주보다 더 무한하게 어리석은 까닭은 올바른 앎이 겨자씨만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자기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들의 지식이라는 것들이 스스로 무지라는 사실에 대해서 다만 겨자씨 만큼이라도 이해 할 수 있었다면 불교나 기독교를 비롯하여 무수히도 많은 종교나부랭이들이 창궐 되지 않았을 것이며, 서로가 피를 흘리는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비례하여 창궐하는 것들이 종교나부랭이들과 수많은 '명상'이라는 말을 운운하는 마음 수련 집단들이다. 사실 인간의 관념으로써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낱말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사실상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에 대해서 절대로 믿지 않는 것 같다. 석가모니의 말 또한 네 본래성품이 부처라고 하지만... 인간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 그들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는 말하기를. 광신자와 맹신자는 성현의 말에서 멀어져갈 뿐이다.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이다. 라고 한 것이다.
'명상' 단체들 또한 그러하다.
예수의 말이나, 석가모니의 말이나, 소크라테스의 말은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하지만 이런 말에 대해서 선뜻 이해 할 수 없듯이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명상'이라는 말 또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없다. '명상'이라는 말, 말,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은 명상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명상이란 소크라테스나 예수 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핵심이자,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론에서 비롯된 말로써 '일념법' '일념명상법, '일념윤회법', '진원법' 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일념법'이라는 말 또한 인간의 관념으로써 이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일념(一念)이라는 낱말은 '하나의 생각' 또는 '한생각'이라는 말로써 지극히 단순한 말이다. 하지만 인간 관념으로써는 석가모니의 말이나 예수의 말이나 소크라테스의 말에 대해서 인간들 모두가 서로 다르게 상상하듯이, 그리고 일념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듯이 '명상(冥想)'이라는 말 또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나부랭이들이 난무하듯이 명상단체들 또한 난무하는 것이다.
'명상'이라는 낱말에 대한 한컴사전의 뜻을 보니...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함 이라는 설명이다.
참으로 어이 없는 말이다.
'어두울 명'자와 '생각할 상'자이기 때문에, 어두운 것에 대해서 '눈을 감는 것'이라고 해석한 결과이기 때문에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함" 이라고 설명한 것이겠지만... 어불성설이다. 말은 말이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인간들이 성선설과 성악설을 주장하는 것과 똑 같은 어리석은 발상이다.
왜냐하면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함' 이 명상인데, 도대체 ---눈을 감고 무엇을 고요히 생각하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지식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고요히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일까?
그대는 아는가?
명상을 가르친다는 자들은 '눈을 감고 고요히 무엇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명상이라고 주장하며, 무엇에 대해서 명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명상이라는 낱말에 대해서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하는 것. 그것이 명상일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본래 명상이란, 예수의 '하루종일 기도하여 진리로 깨어나라'는 말과 같이, 또는 석가모니의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며, 수상행식(마음)도 이와 같다, 그러니 그것을 관찰하라' 는 말에서 비롯된 말로써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라는 뜻에서 '어두을 명'자와 '생각할 상'자로 구성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일념법'이라는 말로 방편으로 설명하는 것이며, '일념명상법, 일념법 수행'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닫기 위한 벙법이 '일념 명상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법이라고 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무지'라는 말... 올바르게 이해 하기 위해서는 일념법 수행으로써 '일념'을 깨달아 생각의 속성과 이치에 대해서 깨달아 아는 앎일 때, 그때 비로소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일념법 수행이란 생각의 윤회를 끊어 내기 위한 방법이며, 인간 관념으로써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수행,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일념법이 진리이다.
일념법으로써 그대와 인류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법 수행 프로그램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powwr11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