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창에 '인문학'을 검색해 보니.
위 세사람의 강의 내용이 동영상으로 올려져 있다.
첫째가 '이진우 교수'의 강좌이다.
변신하라는 내용이며, 운명을 사랑하면 춤출 수 있다는 결론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에 대한 해설과 함께 자기의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가 '최진석 교수'의 '노자'에 대한 강좌이다.
'노자'를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한 자들의 어리석은 말재간이다.
셋째가 '서정근 교수'의 '논어'에 대한 자기 주장이다.
'인간의 길을 찾다'는 말을 주제로 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길, 방법에 대해서 자신의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학문이나 문학은 촌부들의 삶과 비교해 본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쓸모 없는 것들이다. 차라리 촌부들의 땀흘림과 함께 막걸리 한잔으로써의 풍류가 더 인간다운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며,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인 지성체는 인간이 무엇인지 그 근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원을 모른다는 것은 인생의 해답을 모른다는 것이며, 인생의 해답을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타인들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는 주장들이니. 무한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남들에게 자기를 주장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부터 이해 할 수 있어야만 대상을 이해 하는 것이며, 남들을 이해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명상센타들의 기업화 추세와 함께 떠오르는 다른 것들 중의 하나가 '인문학 열풍'인 것 같다. 명색이 교수라는 사람들의 오직 자기의 사고방식에 대한 주장들과, 그들의 자기주장에 이끌려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땀을 흘리던 촌부들의 막걸리 한잔에 어우러진 구슬픈 노랫가락들. 과연 어떤 것이 더 인간다운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그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거나, 사람다운 삶이 있다면 당연히 촌부들의 삶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촌부들은 지신들의 먹을꺼리 만큼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학문들의 말재간들은 그 촌부들이 생산한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약탈하는 기생충과 다르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근본적으로 본다면 모두가 다를 것이 없는 총체적 무지에 빠져 있는 중생들이다.
어떤 부류들이건간에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기는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는 말이 비유이든 아니든 간에. 신이 본래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주장은 끝이 없다. 사실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이며,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 또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올바른 앎이 없는 자들이다.
'노자'를 강의한다는 자들은 더욱 더 아둔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노자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는 말의 뜻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논어'를 강의한다다거나 기타 철학자들을 강의한다는 자들은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논어' 등의 학문 따위들은 어떤 인간이거나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인간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 모두는 다르게보이지만 '인생의 해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인 것 만큼은 다르지 않은 무리들이다. 그들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이며,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중생들이며, 인생의 해답이 무엇인지 모르는채 자기주장만 하는 언술이 뛰어난 자들일 뿐, 쓸모 없는 말재간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삶에 답을 구할 수 없는 까닭은 개개인들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인간세상의 학문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한다면, 인문학과 신학 그리고 과학이다.
인문학은 인간들의 미래를 위해서 과학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과학은 자신들이 더 사실적이라고 생각하며, 신학은 자신들이 그들 둘 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모두 착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방식으로써는 미래라는 말에 대해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며 미래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한한 어리석음은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현제도 없으며, 찰나지간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조차 하려들지 않는다. 지금 그런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대의 지식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고, 깊이 깊이 생각해 보므로써 지적으로나마 '미래'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
자. 지금 그대는 이 글을 보고 있는 중이다.
그대는 이런 사건에 대해서 '현제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배웠으며, 그런 말, 말, 말을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운 것이다. 그것도 그대 스스로 깨달아 알게된 앎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끌어모은 정보들 중에 하나로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가까운 것이 과거이며, 어디에 가까운 것이 현제인가?
사실 그대는. 아니 모든 인간들은 이런 설명을 통해서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살고 있으며, 환상의 세계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 그대가 조금이나마 현명한 자라면,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때 비로소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예수와 석가모니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며,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어지는 말들은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를 둔 사실적인 말이다. 논리에 어긋나지 않는 말이며 육하원칙에 어긋남이 없는 말이다. 반면에 인간들의 모든 주장들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인간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기원을 모른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대는 지금 이 글을 보고 있으며 이런 사실에 대해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대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 순간은 그대의 기억세포에 저장된 과거이다. 지금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지금의 생각이 아니라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이며, 과거이다. '찰나지간'이라고 말하더라도 그 역시 이미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이다. 그대가 말을 하든, 생각을 하든... 항상, 끊임없이 과거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며, 결과일 뿐, 현제가 아니며, 순간도 아니며 찰나지간도 아니다. 순간순간 기역세포에 저장되는 과거라는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대는 미래를 생각한다. 그 미래를 생각하는 순간 또한 '기억세포에 저장된 과거이며, 그런 방식으로 끊임없이 반복순환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대에게 미래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순간이 최후의 미래이다.
사실 그대는 현제를 붙들 수 없다. 아니 인간들 모두가 그러하다.
'현제'라고 말하는 순간순간이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세상의 모든 법칙은 유위법이며, 그 유위법은 모두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순간 기쁨으로 만들 수 있는 지혜로운 자만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며, 항상 평화로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없는 것이며, 순간도 없는 것이며, 찰나지간도 본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며, 언어의 근원에 바탕을 둔 말로써 사실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말이다.
현제도 사실적인 것이 아니며, 순간도 사실적인 것이 아니며, 찰나지간 또한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그대의 기억된 생각속(타인들의 말에 의해서...) 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생각'들이며, 그 생각들에 대해서 언어로 표현된 것들이 삶이며, 인생이라는 허구적인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 지식은 왜 지식이 그 끝이 없는 줄도 모르는채, 지식을 쫒고 있다.
지성체는 지식의 시작도 모르며 지식의 끝도 가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말만 무성한 것들일 뿐, 인생이 무엇인지 해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의 목숨에는 그 끝이 분명한데, 지식이 끝이 없다면, 과연 그 지식은 인간의 생명을 위한 것인가? 지식을 위해서 인간의 생명이 필요한 것인가? 어불성설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 아니한가?
개체적 자아들의 삶의 무게는 누구나 똑 같다.
지식이 많은 자는 지식에 묻혀서 지식이 많은 만큼 고통을 겪는 것이며, 지식이 없는 자는 지식이 없는 만큼의 고통을 겪는 것이며, 재물이 많은 자는 재물이 많은 만큼의 고통을 겪는 것이며, 재물이 없는 자는 재물이없는 만큼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인간은.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이해 하는 것 같다. 그런 뜻이 아니라, 분별된 지식을 초월하여 올바른 앎으로써의 사랑일 때, 진정한 사랑이라는 뜻이 예수의 가르침의 본래의 뜻이다. '너와 나' 라는 분별심이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방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지식과 올바른 앎의 차이에 대한 비유에 대해해서 가장 적절하게 표현했던 인물이 소위 철학자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들에게 말하기를. 철학은 무지에서 시작된다고 했으며, '유일한 선은 올바른 앎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런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올바른 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이나마 이해 하는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일 뿐, 근거가 없는 낭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에 대해서 '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자아'라는 말로써 '스스로 '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말들 또한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일부분의 말들 대해서 사실적으로 여기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앎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들 모두가 '내가 있다'고 주장하며, '내가 사람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비롯하여 자신의 지식이라는 모든 앎들이 사실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들을 짜깁기 하는 방식으로써 '자신의 나, 자신의 마음'이라는 방식으로 재창조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있다는 말, 말, 말들 또한 그대가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앎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나다'라는 방식으로 사실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그대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 알아서 아는 앎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기억할 수 없던 어린아이시절에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들 중에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는 말, 말, 말에 고정된 새끼줄보다 더 가느다란 한오라기의 실과 같은 '생각'을 끊김없이. 아슬아슬하게 지금 이 순간까지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있다'는 말이나 '내가 사람이다'는 말은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시절에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에 불과한 것들이며, 단 하나, 또는 두개, 또는 세개의 조각조각의 생각에 불과한 생각들이다. 그 생각들 중 하나가 '내가 있다'는 생각이며,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이며,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며, '내가 여자거나, 내가 남자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내가 있다'는 생각이나,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 또한 그대의 수많은 생각들 중에 한 생각과 같은 한조각 한조각의 생각들에 불과한 또 다른 생각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가 있다는 생각'은 '내가 없다는 생각'과 상대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다.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과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생각 또한 수많은 조각조각의 생각 들 중에 한 생각일 뿐인 생각이며, 상대적인 생각으로써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생각이다. 마음이 있다는 생각과 마음이 없다는 생각 또한 그러하다.
그렇지 아니한가?
인간은 '상대적이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만큼 지식수준이 높아진 것 같다. 사실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 무지이지만... 도를 이해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무용지물이 아니라 무용지용이다.
사실 삶과 죽음이라는 말이 상대적이며, 선과 악이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며, 한조각의 생각들이 모여서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것들이며, 허구적인 것들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과 '내가 없다'는 생각이 상대적이듯이 말이다.
인생에 해답이 없는 까닭은 그런 상대적인 언어가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들이라고 세뇌 당한 자들의 주장들 때문이다. 그대가. 아니 인간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 그런 사고방식에 의해서, 그런 방식으로,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앎에 대해서 사실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앎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들이 학문이며, 종교이며, 신학이며, 과학이며... 그들의 모든 주장들이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상대적인 말들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는 주장들에 불과한 허구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타인들의 말에 이끌려 다닐 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야야 한다는 말이며, 그 말에 대해서 설명했던 인물들이 인류의 성인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말의 요점은 모두가 '너 자신을 알라'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 그러하며, 예수의 가르침이 그러하며, 노자의 가르침이 그러하며, 석가모니의 가르침 또한 그러하다.
사실 인간은 지성체다.
지성체라는 말은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들에 대해서 지식이라고 알며, 그것들에 대해서 '나, 나의 마음'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지성체라면 그들은 '진리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들이 있다면 오직 그들 뿐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들만이 인간들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 알았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며,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위한 유일한 방법, 법, 길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깨닫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 자.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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