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세상에 '도' 가 폐한지 어연 2000 년이 자난 것 같다.
사실. 인간세상에 올바르게 '도를 깨달아' 알았던 인물이 '싯다르타 고타마' 이며, '노자' 이며, '예수'이다. 오직 그들 셋만을 유일한 '도를 깨달은 인물'로 꼽는 이유는. 그들만이 '도'를 깨닫기 위한 방편설들을 설했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덕경으로 볼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를 깨닫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기에 전념하게 하겠다'는 말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분명히 기록으로 남겨져 있으며,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는 방식으로써 '일념법, 일념명상법'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 바 있으며, 예수의 가르침 또한 '하루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라'는 말과, '너희가 깨어나는 날, 너희와 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과. 진실로 진실로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남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성령이다'는 분명한 말이... 우상숭배사상, 기복신앙으로 왜곡된 성경에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도. 깨달음. 그리고 원리를 이해 하는 진리' 라는 말로 표현되는 현시대의 지식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으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인간세상이 도가 폐하므로써 말세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지금 이사람이 그 길을 다시 전하는 것이며, 현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써 한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세상이. 인간들의 삶이 전쟁과 다름 없는 삶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시기하며, 서로간의 그릇된 앎인 지식으로써의 논쟁과 경쟁 투쟁으로써 가치 없는 삶이며,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시대가 도래 했기 때문이다.
이곳의 모든 글들. 인류의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 방법에 대한 설명이며, 방편설들이다. 왜방편설이라고 하느냐하면 '언어가 본래 없었던 것' 이 아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은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적인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의 '도를 깨달아 아는 앎'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 언술이 뛰어난 그리스도의 적들에 의해서 종교의 경전으로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이 남겨져 있는데.
'구하라 그러면 구해질 것이며,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담대하라... 는 말들이다. 물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말이 왜곡된 것이다.
사실.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담대하라 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없다.
석가모니의 말 또한 '선하게 살라' 는 방식과 비유법들이 있으나... 무엇이 선함인지 악함인지 조차 올바르게 분별할 수 없는 것이 인간 지식의 한계이며,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선함과 악함이 상대적이기 때문이며, 선함이라는 말과 악함이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에 불과할 뿐,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의 생태고리 현상에 대해서 선함과 악함을 구분짓는 어리석음과 같이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고전에 나오는 '홍길동'과 같은 의적이라고 할지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의적이겠지만, 도둑을 맞은 사람에들게는 의적이 아니라 도적이기 때문이다.
'도' '깨달음'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니 이해 한다는 말 자체가 오해라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이해 한다는 말은 곧 오해 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진리의 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곳 도가를 찾는이들, 그들이 도가의 가족들이며, 도가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도가의 가족이 될 수 있다, 다만 올바른 이해에서 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사실 '도가'를 방문했던 사람들 조차도 인연을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수년 전에 잠시 만났으나 인연이 없던 것 같았던 사람들이 몇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이해가 깊어지므로써 도가의 가족이 되는 사람들 또한 다수이다.
지식으로써는 '도'를 이해 한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적으로써도 선이해가 가능한 시대가 된 까닭은 그만큼 언어가 풍부해 졌기 때문이며, 지식 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지식은 무지에 바탕을 둔 앎이지만... 무용지물이 아니라 무용지용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적으로나마 도를 이해 한다는 것은... 인간세상의 최고의 지식이며, 명석한 사람이며, 현명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들만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지식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앎이기 때문에 지식을 초월한 지혜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올바른 앎을 이해 하는 수행자라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실 종교나 유사종교들, 그리고 명상집단들이나, 포교, 선교, 전도 를 주장하는 짓 들이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행태이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는 피를 흘리는 전쟁이 아니라 수 없기때문이다.
올바른수행자란, 말재간을 부리지 아니하며, 참으로 올바른 말이 아니라면 침묵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보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념으로써 남들을, 남들의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은 남들의 입장에서 남의 말을 듣기 때문에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방편설로써 남들을 교화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릇 올바르게 아는 수행자라면, 남들의 일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지 않는다. 남들, 타인들의 다툼이나 논쟁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자신의 마음을 보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언행은 고요한 것이며, 마음은 평화로운 것이다.
세간의 말, 말, 말들에 이끌려 다니지 않기 때문이며, 여타 지식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많이 아는 수행자란, 정의와 부정을 떠난 정의를 행하는 자이며, 사랑과 증오를 떠난 사랑하는 자이며, 옳고 옳지 않음을 떠난 옳음을 말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란, 구속과 자유를 떠난 자유를 말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위자연의 자유라고 하는 것이다.
지식으로써의 이해를 넘어 일념법명상으로써 한생각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법, 일념명상법에 대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일념법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의 근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법이기 때문이다.
도가의 약식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자. 그대와 인류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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