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론 · 깨달음. 도. 진리의 길

선문답 / 마조어록 조주어록 임제어록 - 하근기 중생의 견해와 부처의 견해 / 서문 - 부처란? 중도란?

일념법진원 2014. 9. 30. 08:29

여기서 '부처의 견해' 라는 말에서의 '부처' 라는 말은 명색이 '부처'라는 말로써 '별은 별이 아니다'는 말과 같이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는 말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도' 또는 한글로 표현되는 '깨달음'이라는 말에 대해서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그것에 대해서 '불성'을 보는 것이라거나,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거나, 또는 '성불'이라고 생각하거나, '부처님 세계'라는 말들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여기는 것 같다.

 

착각이다.

원리전도몽상이다.

 

물론 인간의 관념으로써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는 까닭은 아득한 옛날부터 '그들의 진리' 즉 '올바른 앎'의 말이 하근기 중생들의 언술로써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된 채, 기복신앙인 '종교'로 전파 되었기때문이다.

 

사실 '도'라는 말 또한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는 말이다. 인간들은 그것에 대해서 환상의 세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된 것이다. 

 

인간이 그런 말들에 대해서 환상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타인들로부터 그렇게 듣고 배웠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말을 직접 들어서 아는 앎이 아니며, 예수의 말이 예수의 뜻대로 전해진 것이 아니며,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말 조차도 이해 할 수 없는 앎에 바탕을 둔 지식으로써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말과 서가모니의 말, 예수의 말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말들... 모두 말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으나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이곳 글들을 통해서 한글을 깨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말들이다. 다만 지적 이해를 넘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올바른 앎을 위해서는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생각의 흐름에 대해서 감지함을 넘어 '생각의 종'이 아니라, 생각을 부릴 수 있는 생각의 주인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전지전능한 권능은 개개인의 근기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난 주말... 도가의 모임에 참가했던 인물들, 그들의 가르침들 중에 '일념법' 실천을 위한 글들이 있다. 남들의 지식, 남들의 느낌, 남들의 마음, 남들의 생각의 표현인 남들의 말, 말, 말들에 이끌려 다니는 어리석음에서벗어나, 자신의 자신만의 올바른 앎으로써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남들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때 비로소 서로가 소통되는 대화로써 다툼이 없는 삶, 평화로운 삶, 그리고 더 나아가 무위자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이고 싶다면 바람이 될 수 있으며, 구름이고 싶다면 구름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신이 되고 싶다면 신이 될 수 있다. 한 생각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곧 예수의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며, 석가모니의 '네 본래마음이 부처다'는 말이다. 지금의 마음은 부패하고 부패한 마음이라는 말이며, 그 부패한 마음이 왜 생겨난 것인지, 왜 내마음이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깨달아 아는 올바른 앎일때, 그때 비로소 그대가 부처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도' 라는 말이나 한글로 '깨달음'이라는 말은 어떤 환상의 세계를 본다는 말이 아니랴, 다만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해가는 마음에 의해서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것이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해탈'이라는 말이나 '열반'이라는 말과 같이 '올바른 앎으로써' 변함이 없는 마음이 있다는 말에 대한 방편설들이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이곳의 모든 글들이 그런 말들이며 단지 옛 말들에 대한 재해석이 아니라, 그 본질에 대해서 현 시대의 보편타당한 말로써 방편을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현시대에는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 많고도 많다. 사실.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의 뜻에 대해서만 올바르게 이해 하더라도 '부처님'이라는 말이나, 불성이라는 말, 깨달음'이라는 말이 현학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으로써 인간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앎이며, 깨달아 알고 보면 그져 일반상식과 같은 보편타당한 앎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념법'으로서 아는 앎은, 어떤 다른 어려운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며, 마음을 구성하는 그대 자신의 내생각이라는...  생각, 생각, 생각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조어록이나 조주어록 그리고 임제어록에 대해서 설명하는 까닭은

일념명상법으로써 생각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올바른 앎으로써  그 길,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의 길을 가는 거룩한 인물들의 다양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가 첫째 이유이며, 둘째는 그들의 말재간들에 대해서 깨달음이라고 착각하여, 그런 말들로써 말재간을 겨루려는 중생들에게 올바른 앎이 무엇인지 지적으로나마 이해 하게 하기 위함과 아울러 인연있는 이들에게 귀하고 귀한 인연으로 거듭 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참고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핵심 요점이 있다면, 선사라는 중생들의 말재간들이 아니라, 원리전도몽상에서 깨어나라는 말이며,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명색의 동일시에서 깨어나라는 말이다. 이 말은 너희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신, 영혼'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 그런 것들이 말, 말, 말로써만 존재하는 것일 뿐, 사실적인 것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무고집멸도'라는 말과 같이 모든 고통이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멸하는 법(불법, 불성)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더 나아가 말변사라고 하는 이유는 말로써만 존재하는 것일 뿐, 사실적인 것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된 까닭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하근기 중생들의 견해로써 전해졌기 대문에 우상숭배사상으로 전락되므로써 올바른 앎의 본질의 자취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말'과 '석가모니의 말'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며, 소크라테스의 말과 노자, 장자의 말에 대해서 까지도 설명하는 것이다. 그들의 본질은 변함이 없는 것으로써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념법.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생각의 원리에 대한 알아차림으로써 석가모니의 모든 말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방편설들로써 설명하는 것이다. 

 

'부처'라는 말은 '본래 부동하여 부처다'는 말과 같이 '마음의 흔들림이 없다'는 말이다.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는 말은 참고 인내한다는 뜻이 아니라, 언어가 상대적인 말들로써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어떤 말, 말, 말에도 흔들림 없는 앎으로써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중도에 앉았으니 그 이름 부처로다'는 말이 있다. 

중도라는 말에 대해서 '선함과 악함'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사람들은 중도라는 말에 대해서 선함과 악함의 중간에서 관망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실 중도란, 그런 뜻이 아니라, 선함과 악함이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으로써 선함도 선함이 아니며, 악함도 악함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선함도 분별이며, 악함도 분별이라는 뜻이니. 어찌 이해 할 수 있겠는가만은. 다른 비유로써 지적으로나마 그런 뜻의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라는 말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며, 상대적이지 않은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말이며, 진리이다.  

 

'동전과 동전의 양면'에 대한 비유와 같이 여러 방편설들이 있으나. 그 중에 가장 쉬운 비유가 낮과 밤에 대한 비유이다. 

 

인간 관념으로써는 시간과 공간이 분명하듯이 낮고 밤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사실 '본무,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은 인간 관념으로써는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낱과 밤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 또한 일념을 깨달은 인물들에게는 보편타당한 앎이니. 어찌 이해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별은 별이 아니다'는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증거하는 말 또한 '본래무일물'에 대한 방편설이며, 낮과 밤의 비유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로서의 방편설 중 하나이다.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도가의 약식' 또한 그 방편설 들 중 하나의 방편이다. 지극히 사소한... 

 

그대에게는. 아니 인간들 모두... 내가 사람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낮과 밤이 있다. 사실적이다. 하지만 올바른 앎이라면 그 또한 인간의 관념일 뿐, 허구적이라는 것이며, 논리적인 설명으로써 지적으로나마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에 어두운 밤이 사라지고 밝은 낮만 계속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당연하게 '어두운 밤'이라는 말은 불필요한 말이다. '어두움'이라는 말도 사라지며, '밤'이라는 말과 밤에 연결된 모든 말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밤에 잠들 잔다는 말도 사라진다. 저녁을 먹는다는 말도 사라진다. 아니. 날짜도 사라진다. 어제라는 말도 사라지며, 오늘이라는 말도 사라지며, 해가 뜬다는 말도 사라지며, 해가 진다는 말도 사라지며, 달이 뜬다는 말, 별이 있다는 말... 어두움이라는 말... 등의 말들이 사라지므로써 인간들의 언어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게 된다. 아니다. 사실은 모든 언어가 사라지게 되는데. 그 까닭은...  '밤이 사라지므로써 낮동안만 끊임없이 지속된다면... 낮이라는 말 또한 더이상 필요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낮고 밤은 상대적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상대적인 모든 것들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어두운 밤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밝은 낮이 있는 것이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하나가 사라지면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사실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선함과 악함 또한 같은 맥락이다. 

 

모두가 올바른 앎으로서의 선함이라면... 악함은 사라지기 때문이며, 악함이 사라지면, 선함이라는 말 또한 홀로써는 존재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모든 앎은 상대적인 것들이다.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는 앎(말)이 상대적인 앎이기 때문에 인간 삶에 해답이 없다는 뜻이며, 다툼이 없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다툼 속에서 어찌 행복, 자유, 평화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진정한 자유, 평화, 행복은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거나, 타인들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자유에 대해서 무위자연의 자유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다음 편. 마조어록---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