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론 - 잘사는 삶 · 올바른 삶

[삶/ 생명. 인생]의 정의(正意) - 삶과 죽음... 본래 없는 것이다/ 가치있는 삶과 검증된 삶

일념법진원 2014. 12. 22. 08:46

삶. 생명. 인생...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삶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청소년기에는 시인이 된다.

비교적 감성이 예민하다는 말로 표현되거나, 또는 비교적 순수하다는 말로 표현되는 시절은 누구나 경험한다. 세상은 그런 시절에 대해서 반항, 방황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 같다. 

사실... 혼란기이다.

살아가는 동안에... 잠시나마. '도대체 인생이 무엇일까?' 라는 의구심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사회적 명령... 성공, 명예와 재물, 지식, 사랑 등의 무수히도 많은 말, 말, 말들, 즉 욕망의 늪에 깊이깊이 빠져들어서 벗어날 수 없다. 

완전한 것을 갈망하지만, 완전할 수도 없는,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삶을 억지로 억지로 위로하며... 거짓된 자신을 꾸며 나간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으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래도 나만은 다른사람들과는 조금은 다른, 나만의 고유한 또는 고귀한 간직할만한 마음이 있다는 자부심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이 전부이다.

 

 

 

사실. 삶이 본래 없기 때문에 죽음 또한 본래 없는 것이라고 평생을 외쳤던 대표적인 인물이 '석가모니'이다. 조금 따듯한 말로 표현 한다면,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과 괴로움, 슬픔 분노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한 것은 我가 아니다, 마음도 이와 같다, 그러니 그것을 관찰하라' 는 '일념법'으로써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 요점이다. 

이 말은 '삶'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삶은 고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누구나 올바른 길을 가므로써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한가닥 희망을 주는 것 같다.  

 

예수의 말은 조금 더 따듯한 것 같다. 

사실은 예수의 말 또한 '인간들 모두에 대해서 길잃은 양새끼'와 비유하므로써 너희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가치 있는 삶일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 '나와 너' 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며, 도, 진리, 깨달음을 일컷는 말이다.

 

 

사실. 인간들 누구나,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서 뭔가 의미가 있거나 또는 의미를 부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삶에 대해서 미화시키고 싶어하는 것 같다. 뭔가 아름다운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뭔가 가치 있는 삶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세상 어딘가에는 행복한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세상 어딘가에는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하며, 다함께 행복한 세상으로 가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런 주장들... 아득한 옛날부터 줄기차게 해 오던 주장들이다.

현시대까지도... 이어지는... 주장들... 영원히 이어질... 주장들... 이다.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주장들이다.

 

사실. '행복한 세상' 이라는 것이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찾아질 수 없는 것이다.

찾다가... 그러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인간무리들의 삶이라는 치열한 생존경쟁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착각속에서 살아간다. 

사실. 인간들에게 삶이 있다면 그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죽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삶을 위해서 목숨을 건다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서로가 옳다며, 서로가 진리라며 논쟁, 투쟁, 전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의 존재는 원인이 없다.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들... 원인없이 나타났다가 원인없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사실 인간들의 삶은 삶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삶이다. 그것에 대해서 '인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근거 없는 것에 대해서... 삶이라는... 착각... 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인간은 본래 근본원인이 없다는 것이며, 둘은 존재의 이유가 없는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치 있는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인간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완전하게 무지하다.

어떤 인간이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천부경'을 주장한다. 어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를 주장한다. 하지만 모두 근거 없는 말, 말, 말들이며, 편견이며, 단견이며, 소견이다. 왜냐하면 논리적이지 않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현시대는 문명사회이며, 문자가 밝은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논리적이라야 한다. 무턱대고 '하나님'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천부경이 옳다고 주장해서는 아니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의 생각이 아니라, 오직 인간들만의 생각이며, 자기들만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천부경을 보니.

비로소 하나가 나타나서 그것이 다하여 셋으로 나뉘었다는 방식이다.

그 셋이, 하나가 하늘이며, 둘이 땅이며, 셋이 인간이라는 방식이다. 소위 인간들이 인간들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주장하는 '天. 地. 人' 이다.

 

하늘이 있기 때문에 땅이 있으며, 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있다는 주장이다.

 

지금. 천부경을 설명하는 까닭은 사실. 인간은 본래 존재의 원인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인간이 본래 인간이다' 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하나가 나타났다' 는 말은 논리적이지 못한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가 나타났다면, 그 하나가 왜 나타난 것인지에 대한 원인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하늘이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다'는 말은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합리적일 수도 없는 인간들만의 편견이다. 

 

 

삶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왜, 삶이 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우선 이해 해야만 한다.

 

비로소 하늘이 나타났는데, 그 하늘(우주)이 다하여 셋으로 나뉘었다면, 첫째. 왜? 하늘이 나타난 것이며, 왜? 셋으로 나뉘게 된 것인지, 셋으로 나뉜 원인이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가 왜 태어난 것이며, 왜, 살아야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대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 하늘이 왜 나타난 것일까?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하늘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보는 자가 있기 때문에 하늘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말 또한 그러하다. 무조건 말씀이 있었다고 주장해야 할 일이 아니라, 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는지, 왜, 하늘에 하나님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야. 내말이 맞어. 그냥 믿어.... 라는 방식으로 주장하는 것들이 현시대 지성체들의 지식 수준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그랬기 때문에 그냥 믿어라, 라는 방식들... 이젠 아니지 않은가말이다.

 

그런 말이 있으니까 그냥 믿어야 된다는 주장들, 종교들, 학문들... 사실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런데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믿는 사람들이 지식수준이 높다는 현시대 인간들인 것 같다.

 

 

하늘이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보는자가 있기 때문에 하늘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는자는 그대 자신이다. 

옛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보는 자가 있기 때문에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대가 단지 눈을 감기만 하더라도 하늘은 없다.

그대가 깊이 잠든 동안에도 '하늘'은 없다. 단지 하늘만 없는 것이 아니라, 땅도 없으며, 인간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대, 자신의 나도 없다. 마취를 당하거나, 뇌졸증에 걸린 사람이거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사실. 창조자, 절대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지식이 곧 창조자이며, 절대자이며, 신이다. 그것들이 있다면 말이다. 그것들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지식에 바탕을 둔 관념으로써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가 태어나기 이전, 즉 그대가 세상에 나타나기 이전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지금 그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있기 때문에... 천지만물이 있는 것이다. 그대가 죽는다는 것, 깊이 잠든다는 것은 사실. 그대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 천지만물과 함께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다.

 

 

그대의 '내가있다(我想)'는 지식 때문에, '내가 없음' 즉 '무아(無我想)'에 대해서 상상(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과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의 차이이며,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다. 다만 그대는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나와 세상이 다른 것이며, 나와 우주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 모두가 그러하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까닭은 '지식'의 앎은 '하늘이 있다'는 방식으로써의 무조건 적인 주장이지만, 진리의 앎은 지극히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하늘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늘이 없다'는 주장과는 상대적인 주장이다. 무조건 하나님이 있다는 주장 또한 그러하며, 무조건 부처님말씀이 진리다는 주장 또한 그러하다.

 

물론 인간들의 무조건적인 '우리가 사람이다'는 주장 또한 그러하다.

만약에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다' 라고 주장해야 한다면, 왜 지능이 뛰어난 것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구상에서 지능이 가장 뛰어난 동물이 인간동물이다'는 주장은 오직 인간동물들만의 주장일 뿐, 다른 동물들이 동의하는 주장은 아니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인간동물들의 지능이 가장 낮은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동물들만이 살아가는 동안 내내, 죽는 날까지도 인간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면서, 똑 같은 인간들끼리의 다툼과 논란, 투쟁, 전쟁을 일삼는 짓들에 대해서 삶이라고 주장하며, 또한 자연을 파괴하는 짓들에 대해서 발전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몸 조차도 온전하게 관리할 수 없어서 자신의 몸과 마음 까지도 타인들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것들이 지능이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인간동물들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다른 동물들은 인간동물들과 같이 같은 부류들 끼리는 서로가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만큼은 죽는 날까지 온전하게 보존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위 설명과 같이 본래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본래 인간이라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에게 삶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삶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

삶의 목적이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의 다툼이거나, 경쟁이거나 투쟁, 전쟁이라면, 그런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지금 그대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지능이 뛰어나 훌륭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근원을 찾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상근기인물'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지능이 뛰어나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이웃과 다투지 않는 사람이며,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이다'는 원인도 모르며, 내가 사람이라는 근거도 없는 사람이 자기를 주장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앵무새가 '내가 사람이거든' 이라고 주장" 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진리가 단순한 까닭은 지극히 논리적이며, 한생각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삶에 굳이 목적이 있다면, 오직 진리를 구하는 삶인 것이다.

'진리'를 구하지 않는 삶이라면, 그것이 어떤 사고방식으로써의 삶이든간에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진리를 망각한 인간들의 삶은 인간류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현시대 인간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다툼이며, 논란, 논쟁, 투쟁, 전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류들의 가치 없는 삶이 있기 때문에 지식을 초월한 가치 있는 삶이 있는 것이다.

지식의 앎으로써의 전쟁을 일삼는 삶이 있기 때문에 진리의 앎으로써의 가치 있는 삶이 있는 것이다.

 

지식과 진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의 앎으로써의 존재는 서로가 죽고 죽이기 위한 투쟁으써의 존재이자 죽음을 제촉하는 일이며, 진리는 모두 함께 평화로운 삶을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검증된 삶이기 때문이다.

 

 

사실.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의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는 단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인간생명의 비밀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道(깨달음, 진리)는 인간 삶을 위한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방법이며, 새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궁극에서는 정신적인 죽음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앎이 자유라는 말은 예수의 말이 왜곡된 성경에 기록된 말이라고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방식으로 기록된 것 같다. 석가모니의 말 또한 그러하다. 인간의 본래성품이 '부처'라는 말이 그러하다. 이 말은 또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귀결된다. 이 말은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라고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가치 없는 삶이라는 말이며, 더 나아가 검증된 삶이 아니라면,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곳의 글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만약에 인간에게 축복이 있다면, 그대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 받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삶의 길, 방법, 삶의 분명한 목적을 찾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도무문'이라는 진리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