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불변의 진리'라는 말을 정의 하기 전에, '정의' 라는 말의 '정의' 즉 올바른 뜻부터 이해 해야 할 것 같다.
'정의' 하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가 아래와 같다.
"정의사회 구현" 이라는 말로써의 정의라면, 어떤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가 필요한 것이라면, 단지 어떤 사회가 아니라 인류 모두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가 필요할 것 같다. 아니. 인간세상 모든 인간들을 위한 옳고 바른 도리가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인간류들의 존재는 역사를 뒤돌아 보거나 현시대거나 다를 바 없이, 인간류의 존재 자체가 인간과 인간들간의 다툼이며, 논란이며, 논쟁이며, 투쟁이며, 전쟁일 뿐, 인류 모두가 평화로운 시대는 단 하루도 없었기 때문이며, 현시대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실. '도리'라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방법이나 수단" 이라는 뜻이란다.
그 방법이나 수단이라는 것들이 곧 '도덕, 윤리, 규범. 민법, 형법' 등의 무수히도 많은 법률들인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식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지는 만큼, 법률 또한 끊임없이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자유를 갈망한다는 인간들의 문병발전의 결과가 이와 같이 인간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률들이며, 규범들이다.
사실. 인간들의 발전행위는 인간들 또한 인간들이 창조한 수많은 기계들과 같이 규칙적인 방식으로써 기계화 되어 가는 과정이며, 결과 또한 그럴 것이다. 어쩌면 인간들은 그런 구속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인간류의 발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진리에 대히서는 무지한채 인간들간의 지식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에 의존하다 보니, 자유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구속되기를 원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사실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사고방식으로 가공된 것이다. 사실. 인간들은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인간들이 찾는, 갈망하는 소망하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올바른 도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진리'이다. 사회나 공동체는 인간들의 집단이다. 그런데 어떤 사회나 공동체를 위해서 다른 사회나 공동체와 투쟁을 해야만 한다면... 서로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 경쟁해야 한다면... 서로가 도전해야 한다면... 인간세상의 모든 '도리'는 이미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위한 도리인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정의를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 그 어리석음이 지식의 한계이다.
물론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해야한다는 말들 또한 그러하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지식으로써의 앎이 아니라, 진리의 앎을 알아야만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세상에는 '진리'라는 말이 있으며, '불변의 진리' 라는 말이 있다.
사실. 진리는 불변이기 때무에 영원한 것이라는 뜻이며, 우주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이라는 설명이 또한 사전적 의미이다.
아득한 옛날 부터 현시대 까지도 '진리'를 외치는 자들이 있다.
인간들의 무한한 어리석음은 진리 또한 타인들로부터 주어 모은 지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배우고 익힌 지식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이 외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모르면서 진리를 주장하는 지식이다.
사실.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선을 가장한 악이다. 왜냐하면 인간들 누구나 '육체가 나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기주의자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식으로 구성된 마음이라는 것은... 훌륭한 사냥꾼에게 잘 길들여진 사냥개와 같은 것으로써 단견이며, 편견이며, 소견이기 때문이며, 죽는 날까지 투쟁을 멈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잘 길들여진 사냥개와 다를 바 없는 자들이 곧 진리를 주장하는 자들이며,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종교무리들이며, 세상을 이루는 이합집산들이다.
분명한 것은. 진리는 타인들로부터 주입된 지식으로써의 세뇌당하여 아는 앎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진리의 앎과 지식의 앎의 차이는 단순하며, 명백하다.
성령. 불성. 영혼... 등의 말들로써 어떤 강한 느낌을 받은 일 따위의 경험은 단지 꿈과 같은 것들이며 진리가 아니라, 지식의 산물이다. 사실.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하늘나라'를 보았다는 자들이며, 삼매에서 빛을 봣다는 자들이며, 하나님 말씀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부처님 말씀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자기가 믿든 종교의 교조의 말이나, 얼술이 뛰어난 명상집단의 수장들의 말에 대해서 진리라고주장하거나 그들에 대해서 위대한 '스승'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스스로 스승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사실 가장 잔악한 무리들이다.
사실. 불변의 진리라는 말은 몇가지의 뜻이 있다.
그 하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앎을 뜻하는 말이며, 둘은 개체적 자아가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앎을 이르는 말이며, 셋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앎이 진리의 앎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아는 앎이 진리라는 말은, 똑 같은 사람에게 세뇌를 당해서 '우리가 진리다' 라고 주장하는 앎이 아니라...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학습을 통해서거나,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말에 대해서 연구하고 궁리하여 알게 되는 앎이 아니라... 고전이나, 불경이나, 성경이나, 어떤 교재에 심취하여 궁리하다가 문득 깨닫는 방식의 앎이 아니라, 오직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스스로의 수련에 의해서 이미 자신의 내면 깊이 간직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무분별심'이 드러나 아는 앎이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지식의 앎은 진리의 앎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세뇌당한 그릇된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세상의 지식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지식이거나 또는 어떤 특별한 지식이든지 간에 모두가 상대적이 아닐 수 없는 앎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공동체, 단체, 사회라는 말들... 그 자체가 또 다른 구속을 위한 집단들이 아닐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끝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모든 규범, 규칙, 법률, 도덕, 윤리... 등의 학문들 자체가 자유가 아니라 구속을 위한 명분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들간의 다툼이나, 부모와 자식간의 의견 다툼이나, 부부간의 다툼이나, 친구간의 갈등을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갈등들 또한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우고 세뇌당한 지식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의 갈등이며, 다툼이다. 사실, 이런 모든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 하는 앎이 진리의 앎이다. 진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종교들이나 유사집단들이 무수히도 많아지는 까닭은 자신의 마음의 의지처가 곧 그런 집단들이기 때문이며, 인간들의 지식이 발전되면 되는 만큼, 그만큼 더 영악해지기 때문이다.
부모와 형제나 친지... 가족 보다 더 고약한 집단들이 소위 종교 집단들이며, 유사 집단들이며, 모두가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악용하는 집단들이다. 결국 인간세상 지식의 발전의 결과는 우주에 있는 다른 외계인들과의 전쟁으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종교 집단들끼리의 전쟁이 원인인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이념전쟁'이라고 하는 것 같다. 서로가 다른 생각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불가능한 인간들의 최후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 작은 나라의 현실을 비유로 든다면... 서로가 진리리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이.... 석가모니파와 예수파로 나뉠 수 있겠지만, 결국 석가모니의 파와 예수의 파 간의 전쟁으로써 전쟁이 끝이 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여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들끼리의 전쟁 또한 예수파와 석가모니파의 전쟁과 똑 같은 방식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말에 대해서도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우상숭배사상이기 때문이며, 그런 방식으로 세뇌된 자들의 망상의 결과는 전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의 이런 모든 이상이나, 사상, 이념 등의 모든 주장들이 진리의 앎이 아니라 지식의 앎이기 때문이다.
사실. 진리의 앎에 눈뜬이들에게 달라지는 것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들간의 주장이거나 명상집단들간의 주장들이거나, 각종 이합집산들이 아닐 수 없는 각종 학문에 바탕을 둔 지식인들간의 모든 논란들, 논쟁들에 대해서 빙긋이 웃어버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의 앎에 눈뜬이들의 앎은 단순하다.
왜냐하면 마음 밖에서 행복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앎에 눈뜬이들은, 예수의 '몸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라는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네 본래성품이 부처다'는 말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지식의 앎이 아니라, 진리의 앎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라는 말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라는 말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뜻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이기 때문이다.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에 대해서, 그 말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앎이란,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앎이란 '세월이 변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앎이란, 절대자, 신, 하나님, 부처님, 영혼, 악령, 신령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앎이란, 일체유심조' 라는 말, 말, 말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일체유심조'라는 말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이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이라는 낱말은 단순한 말이지만, 생각이라는 말은 언어, 즉 논리의 근본원인이 되는 낱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에 바탕을 둔 모든 학문은 '생각'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인간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설명하는 것이다.
가령, 인간들의 지식으로써의 앎은 '신, 영혼'에 대해서 무지하다.
사실, 신이나 영혼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다. 가령 인간들은 누구나 지식을 주장하며, 그 지식은 누구나 마음의 내면에 '영혼'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완전하게 무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사유해 볼 수 있다면... 해답은 단순하고 명료하여 논란의 여지가 없다. '절대자 또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앎이 지식이다. 지식은 그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근거 없는 주장이다. 그것들이 본래 있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가 주장하는 것이다. 성령을 주장하고, 불성을 주장하고, 영혼을 주장하고 귀신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지식의 앎으로써는 절대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것들... 그 대표적인 것에 대해서 '절대자' 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생각의 논리에 바탕을 두고 '절대자'에 대해서 사유해 볼 수 있다. 잠깐. 물론 이런 설명들은 아직 진리의 앎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지식인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세상에서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생각의 원리'라는 말이 세상에 알려진 지가 '책.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 책이 아마도 1996년도의 일일 것이며, 그 이후 '비밀의 언어'라는 책으로써 더 자세히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관념으로 보더라도 강산이 변할만큼이나 꽤 오래된 것 같다.
인간세상에, 인간들이 갈망하는 '절대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물론 '절대자' 라는 어떤 물건이 '내가 절대자 다' 라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아는 지식으로써의 앎이다. 절대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다. 그것이, 신이든, 성령이든, 불성이든, 영혼이든... 똑 같다.
그것들이 '인간들의 -내가 사람이다- 라는 주장과 같이 -내가 절대자다, 내가 영혼이다, 내가 귀신이다, 내가 부처다, 내가 성령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불성이다- 라는 방식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대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지식의 앎이다.
언어의 근원인 언어는 '생각' 이라는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의 원리'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까닭은 '생각'은 단순한 낱말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비유를 든다면... '생각이 없다'는 생각이 있지만,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또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또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생각 또한 이와 같이 기억세포에 저장된... 또 다른 '생각' 이다.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생각" 과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생각" 은... 단지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이라는 단순한 낱말이다. 하지만, 그 '한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삶' 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한생각의 차이에 의해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것이댜. 한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고통과 기쁨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영혼이 있다는 생각'과 '영혼이 없다는 생각' 은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다.
가령, 영혼(성령,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싸운다면... 죽는 날까지 싸운다고 하더라도 해답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더라도 똑 같다. 서로간의 주장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주장들 또한 종교나부랭이들과 같이... 옛 신화나 전설들에 바탕을 둔 말들에 대해서 주장한다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앎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지식들에 대해서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답이 없다.
싸움만 지속되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대부터 이어지던 싸움들이... 현시대는 더 많은 집단들로 나뉘면서 싸움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지식의 앎의 무지이며, 무지의 한계이다. 그리고 무지의 결과는 피를 흘리는 전쟁이다.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 피를 흘리는 전쟁들... 인류의 종말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며, 그렇게 끝나는 것이다. 지식의 앎이 이토록 무모한 것이기 때문에 무지몽매한 것이 인간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의 앎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현시대의 지식으로써도 이해가 가능한 까닭은 문법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며, 논리적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며, 육하원칙이라는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이제 '생각의 원리'라는 말이 창조되었으니... 더 이상 쓸모 없는 논쟁은 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종교간의 갈등에 대해서 누구나 이해가 가능한 말이 있다.
대체 서로가 옳다고 싸우는 자들... 너희는, 단지 너희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도대체 어린아이시절에는 몰랐던 종교인데,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종교를 왜, 믿게 된 것인지... 누구로부터 듣고 배운 것인지에 대해서 서로가 사유해 볼 수 있다면... 훌륭한 사냥꾼에게 잘 길들여진 사냥개와 같이.. 그런 삿된 말들에 대해서 서로가 다른 방식으로 '주입식 교육'에 의해서 세뇌 당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 육하원칙이라는 법칙에 바탕을 둔 논리적 사고방식이다.
지식이 없던 어린아이시절에는 서로간의 갈등이나 싸움이 없었는데... 지식을 얻으면서부터 갈등을 넘어서 경쟁과 투쟁을 일삼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의 논리로 본다면 더욱 더 분명하다.
가령, 초월적인 절대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의 대표적인 이름이 '초월자' 라고 가장한다면... 생각의 논리에 적용한다면 단순하기 이를데 없는 올바른 앎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한글을 깨친자라야만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낱말은 오직 순수한 '한글'이기 때문이며, 한자로는 '생각할 상' 자를 비롯하여, 생각할 념, 생각할 사, 생각할 유... 등의 '생각'이라는 낱말의 뜻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한자의 覺 이라는 글자의 뜻 또한 '생각'이라는 뜻이지만, 깨달을 각자로 표기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불경의 '識' 이라는 글자 또한 '앎 식' 자로써 '지식'이라는 뜻이지만.... 6식, 7식, 8식... 등으로써, 지들 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초월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도대체 그 주장은 누구의 주장인가?
그대의 주장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주장인가? 아니면, '초월자의 주장인가?
도대체 생각하는 것은 누구인가?
도대체 누가 생각하는 것인가?
생각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말이다.
'초월자가 생각하는 것일까?'
'초월자가 인간들을 생각하는 것일까'?
초월자가 인간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일까?
초월자가 '내가 초월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초월자가 인간들에게, 내가 초월자다' 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대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가 생각하는 것이겠는가?
아마도...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에 대해서 '사유'라고 한다. '생각할 사' 자와 '생각할 유' 자로써의 사유 이다.
옛 사람들, 이미 죽어서 사라져 없는 사람들의 말을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마치 우물안 개구리들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남들, 타인들로부터 배우고 익힌 말들에 대해서 자신의 앎인냥 주장한다는 것은, 사실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을 주장하는 것이다. 훌륭한 사냥꾼에게 잘 길들여진 사냥개와 같은 짓들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대는 본래, 그런 훌륭한 사냥꾼도 아니며, 그런 사냥꾼에게 잘 길들여진 사냥개가 아니다.
만약에 지금 그대가 지식으로써, 마음으로써, 진리를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그대의 주장이 아니라, 사냥꾼에게 잘 길들여진 사냥개가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다. 주인에게 말을 배워서 배운 말들만을 그대로 지저귀는 앵무새와도 다른 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에 매몰된 삶에 대해서 가치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단 한시도 행복하거나 평화로움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일한 악은 지식이며, 유일한 선은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란 오직 진리의 앎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오직 진리를 아는 앎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평화'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와 인연있는 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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