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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本性)] 의 정의/ 순수의식과 우주의식이란? 진리란?

일념법진원 2014. 12. 30. 06:12

'본성' 은 '본성' 이라는 '이름'이다. (다만,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 경험이전의 '자아'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사실, 인간이 인간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언어가 없다'. '언어가 없다'는 언어 가 없다.

 

그런데, '언어가 없다'는 말 또한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언어가 없다'는 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언어가 없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없다' 는 말, 말,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며, 추측하는 것이며, 환상을 갖는 것이다.

 

이는 '언어가 없다'는 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가 없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언어가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을 하더라도... 설령 '언어가 없다면. 어떨까' 라고 생각해 보더라도 '언어가 없다면 어떨까' 라는 언어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

'언어가 본래 없다'는 말 또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언어의 시작도 이해 할 수 없으며, 언어의 중간도 이해 할 수 없으며, 언어의 끝도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언어의 굴레속에서... 언어의 윤회의 틀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에서는 어떤 사고방식으로 존재하든지 해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 고 하는 것이며, 자신의 본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가 있는 한... 언어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즉 언어가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앎으로써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아이시절... 즉 말을 배우기 이전의 상태에 대해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나를 모르는 것이다. 아니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는 까닭은... 뇌세포, 즉 기억세포에 저장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어'이기 때문이며, 어린아이시절에는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는 이유는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는 명색의 동일시로써의 상대적인 것으로써, 사실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 삶에 해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대의 어린아이시절... 분명히 경험자가 있었으나... 기억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에...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기 때문에... '경험의 오류' 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사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신비의 문' 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식으로써는 언어의 시작도 알 수 없으며, 언어의 중간도 알 수 없으며, 언어의 끝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세상의 지식이 있으나, 그 지식으로써는 지식의 시작도 모르며, 지식의 중간도 모르며, 왜 지식이 끝이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한 것이 인간들의 허무맹랑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해답이 있을 수 없는 상대적인 말, 말, 말들로써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세상은 항상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의 끝도 모르면서 지식을 쫒는 일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들의 지식에 대해서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식자우환'이라고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식에 매몰된 인간들이... 지식에 대한 맹신으로써 죽는 날까지 서로가 투쟁이나 전쟁을 일삼는 것들로써... 더 나아가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인간들의 삶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지식에 대해서 무지몽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해답이 없는 지식으로써 서로가 경쟁, 투쟁, 전쟁을 일삼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 지식으로써의 앎은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이며, 올바르지 않은 앎이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 괴로움 등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그런 그릇된 앎들로써 죽는 날까지 서로가 자기를 주장하기 때문에 갈등과 투쟁,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인간류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있는 것이다. 

즉 올바른 앎이라면 주장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이며, 근심과 걱정 삶과 죽음 등의 모든 고통이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대해서 진리의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인간들의 드러나는 마음의 표현에 대해서 '하늘의 뜻'이라는 말로써 '천성'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 같다. 옛말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실 인간이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완전하게 무지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지,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어가 없던]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상대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상대적인 것은 항상 대립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한한 어리석음이란, 항상 자신의 나에 대해서 관찰하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들과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 관찰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타인들의 시선이나 언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신의 자기를 구성하는 언어들 모두가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불특정 다수의 타인들의 말, 말, 말에 의해서 자신의 나가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이 본래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대다수의 타인들의 마음을 흉내내는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 지식이며,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인식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어리석어서 '태초의 인간'에 대해서 상상하려 하는 것 같다.

셜령 태초의 인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태초의 인간에 대해서 전설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를 상상하겠지만... 에덴의 동산에서 노니는 청춘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대의 어린아이시절과 같이 말을 배워서 말을 아는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설령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아득한 옛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들 또한 인간이라는 언어가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타인들로부터 말,말,말을 배워서 알때, 그때 비로소 '인간'이라는 언어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부모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늘이라는 말과 땅이라는 말을 듣고 배워서 알게된 것이라는 말이다. 어린아이시절에는 '하늘, 땅'이라는 말, 말, 말이 없었기 때문이며, 말을 배워야만 '언어'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상대적인 것이며, 명색의 동일시인 것이다. '어떤 것'의 이름에 대해서 '까마귀' 라고 지었듯이... 그대의 '나' 에 대해서  '몸=자아' 라고 알듯이... 이름과 형상과의 동일시 일뿐, 사실적인 앎이 아니라는 뜻이다.  

 

 

'본성' 이라는 낱말 또한 그러하다.

'본성' 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본성'이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다.

 

'순수의식'이라는 말과 '본성'이라는 말은 같은 뜻이지만... 정작 말을 모르는, 말이 없는...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라는 말도 없으며, 본성, 순수의식'이라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대가 '순수의식, 본성'이라는 말, 말, 말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일 뿐... 그 말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며, 이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본성, 순수의식'이라는 말이 없는상태가 곧 '그것'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것' 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무, 공' 더 나아가 '본무, 본래무일물,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 들의 다른 말로  표현되는 것이지만... 그런 말들 또한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불립문자, 언어도단'이라는 또 다른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예수는 그것ㅡ 즉 본성에 대해서 태어난지 일주일 되는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라는 말로 표현햇던 것 같다. 사실, '의식'이라는 낱말 또한 '뜻 의' 자와 '앎 식' 자로써... 본래의 뜻은, '언어를 아는 앎과 언어의 뜻을 아는 앎'이라는 말, 언어, 뜻이다.

 

어린아이기 말을 배우면서... 소리를 배우지만, 소리를 인식하므로써 '엄마, 아빠' 라는 소리가 딘순히 지저귀는 새소리와 다른 뜻으로써.. 엄마와 아빠가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라는 앎이 생겨남과 같은 앎에 대해서 '의식'이라는 말로 창조, 표현된 것이다. 물론 그런 모든 앎들이 '명색'의 동일시'로써의 앎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에 대한 앎이 아니라, 하구적인 것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앎이기 때문에 인간세상의 모든 지식은 올바른 앎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들에 대한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오직 자기만의 지식으로써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관념이 '본래 없는 것(본무, 본래무일물이라는 석가모니의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 대상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가 화합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가 사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오직 자기를 위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시명불성'이라는 말과 같이 '시명중도' 라는 말과 같이 '본성' 또한 '시명본성'으로써 올바르게 알면, 진리의 앎으로 본다면.... '본성' 또한 '본성'이라는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본성'이라는 말이 있을 뿐.... 본성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라는 말, 말, 말에 대해서 상상하거나 추즉하거나 환상을 갖는 것일 뿐, 올바른 앎일 수 없는 뜻이다.

 

본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오직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나'가 본래 '자신의 나'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착각(원리전도몽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앎으로써.... 비로소 "육체가 나가 아니라는 생각" 과  "육체가 나라는 생각" 이 단순한 "한생각의 차이" 일뿐, 사실적인 앎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에 대해서  소위 '깨달음'이라는 또 다른 말로 표현된 것이다.

 

 

하늘에 의식이나 뜻이 있다는 생각은 '하늘의 생각'이 아니라, 오직 인간들의 관념의 산물이라는 뜻이며, 우주에 의식이 있다는 생각 또한 '우주'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들의 생각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예수는 '너희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라는 말을 전제하여, '하루종일 기도하여 깨닫고 나면' 너희의 본래성품이 '하늘나라는 보는 것이며, 성령이다'는 말로 설명한 것이며, 석가모니의 말은...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며, 마음 또한 이와 같기 때문에...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다, 그것을 관찰하라'는 방식으로 '깨달아 아는 앎'에 대해서 '진리'라고 설명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말은 한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된 것이며, 예수의 말 또한 영어권에서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왜곡되어 우상숭배 사상으로 전락된 것이다. 

 

 

석가모니는 '그것'에 대해서 다른 이름을 지어 '불타'라는 방식으로 이름 지은 것이며,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수많은 비유를 든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있다면,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이 있다면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이며, 이와 같은 맥락의 말이...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라는 말이다. 사실, 하늘아래 어느 것도 우상으로 숭배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과도같은 맥락이다. 

 

네 본래성품이 부처라는 말이며,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로써... 다른 대상들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볼 수 없다는 말이며, 너 자신을 보라는 말이며,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다. 

 

 

사실, 인간들의 '자아'라는 말 자체가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옳바른 앎이 아니라 모순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 자와 '나아' 자로써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말은 한자이며, 한글로 표현하자면... '자신의 나' 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마음' 이라는 말이나, '나의 몸' 이라는 말은... '나의 컴퓨터' 라는 말과 같이... '몸과 마음'은 '나' 와는 다른 것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사실, 언어의 시작이 이렇듯 모순이다. 분명히 모든 언어에는 주어가 있으며, 그 시작이 '我' 이다. 그런데... '나는...' 이라는 말로써 '나=마음' 나=몸'이라는 방식으로써 '나와 몸, 마음'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 모두의 '我'는 서로가 같은 것으로써 인간들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다.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동등한 것이며... 본래 있는 것이며, 본래 '그것' 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 개개인마다 서로가 다른 것이 '마음' 과 '몸' 이다. 본래 '몸과 마음'은 '나의 몸과 마음, 나의 컴퓨터, 나의 전화기' 와 같은 방식으로써 '나' 가 아닌 것이며, '나' 와 '동일시' 될 수 없던 것이다. 그런데, 상대적인 언어로 가공되면서... 불변의 '나' 와 '마음, 몸'을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학습, 교육에 의해서... 가공된 것이다.  

 

 

사실. 그 변할 수 없는 '아'를 발견한 사람들의 말이 곧 '진리의 말' 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마음과 몸'이 아닌... 그 '나'를 알라는 말이며, 석가모니의 '약이색견아' 에서의 '我' 또한 '불변의 '나' 를 일컷는 말이다. '마음과 몸, 느낌 등의 감정'은... 본래 '我' 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 또한 그 '나...' 즉 '마음과 몸'이 아닌 '我' 를 일컷는 말이다.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본래 몸과 마음이 아닌 '我'는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에 유일한 '실체' 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실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 본래의 '나'를 발견했던 인물들의 특징이 있다면... 그들의 말은 모두가 똑 같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마음은 모두가 서로 다른 반면에 그들의 마음은 모두... 서로가 똑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 깨달아 아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곧 예수이며, 석가모니이며, 소크라테스이며, 노자와 장자... 등으로써 그들의 말의 본질이 똑 같은 까닭이며, 그들이 곧 '본성'을 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사람이 그들의 말에 대해서 설명하는 까닭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그들의 마음과 이사람의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앎에 대해서 진리의 앎이라고 하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앎이기 때문에 불변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의 본성 또한 본래 그러하다. 

다만, 그대는 진리가 아닌 지식으로써의 가공된 것에 대해서 '자아' 라고 이해 하는 것이며, 본래의 '나' 와 본래의 '나'가 아닌  '마음, 몸'을 '나'와 동일시 하는 것이며, 타인들로부터 가공된 지식에 대해서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본래 그대의 '我' 가 있다.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것'을 보기 위한 유일한 길, 방법이 있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에 대해서 진리라고 말하는 까닭은 오직 그 법만이 그대의 '본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삶에 해답이 없는 이유는... 인간 삶이 '길잃은 어린양'이 아닐 수 없는 이유는...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나' 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가치 있는 삶이 있다면 오직 그 길을 가는 일 뿐이다.

왜냐하면 본래 그대가, 지금 그대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道' 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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