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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五蘊)]의 정의(正意) / 불변의 진리란? / 마음의 구성 요소 - 석가모니의 자취

일념법진원 2014. 12. 16. 08:09

오온이라는 낱말에 대한 한글사전을 보니. 아래와 같다.

'오온'의 '온'이라는 글자이 뜻이 '쌓을 온' 자로 쓰이는 것을 보니. 앎을 쌓은 것이라는 말인 것 같다.

 

[불교] 인간 구성하는 다섯 가지 범주 요소. 물질적 의미하는 (), 감각 (), 인식 작용 (), 의지 작용 (), 마음 작용 ()이다.

 

위의 '불교용어' 물론 석가모니의 말이 아니라, 중생들의 단견이며, 소견이며 편견으로써의 견해이다. 인간들의 모든 지식이 편견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識)이 단견이며, 편견이며, 소견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인간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다'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그 중에서 하나만을 고집하는 말이 '우리는 사람이다'는 말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며, 현시대까지도 인체의 원인인자를 찾을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하나님' 이나, '단군신화'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초가 어긋난 지식으로써의 앎은 모두 거짓된 말들이며, 진실된 말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있는 것이며, 진리에 바탕을 둔 앎에 대해서 진실된 앎이라는 말과 올바른 앎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 모두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신이라고 믿겠지만, 신이 있다는 생각은 '신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우선 이해 해야만 하는 것이며,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한 유일한 법에 대해서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들이거나 명상집단들이거나, 마음을 수련한다는 집단들이거나... 무지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똑 같은 자들을 상대로 하여 욕말을 채우기 위한 말재간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언술, 논술이 그러하다.

인간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인간이다. '우리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모든 인간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서로를 매개체로 삼는 짓들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며 그런 짓들... 서로가 경쟁하고 도전하고 투쟁하는 짓들을 일삼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살아갈 가치도 없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진리를 모른다면, '너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살아갈 가치도 없다고 했다는 인물이 소크라테스이다.

유일한 악은 지식이며, 유일한 선은 '진리'라고 했던 인물이다. 

 

 

사실 불교라는 종교는 석가모니를 지들 집단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써, 매개체로써 악용하는 것들이다. '오온'에 대한 설명이 그러하다.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가지가 아니라, 다섯가지라고 아는 '앎(=識=지식=말=말의 뜻)'이기 때문이다. 12 연기법에 대한 설명과 같이... 말을 배우고 익혀서 알게되는 것이 '앎'이며, 그 앎이 '명색의 동일시'로써의 앎이며, 명색의 동일시로써 아는 앎이 '눈과 귀, 코, 혀, 신체의 촉감' 등이라고 했다. 눈이 있다고 아는 앎, 귀가 있다고 아는 앎, 코가 있다고 아는 앎... 그리고 더 나아가 감각기관의 대상들에 대한 앎에 대해서 '눈으로 보이는 색, 귀로 든는 소리, 코를 통해서 맡는 냄새... 등으로 설명된 것이다. 

 

말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코. 코. 코.. 하면서 손가락으로 코를 가리킨다. 귀, 귀, 귀... 하면서 손가락으로 귀를 만지게 한다. 그런 방식으로 '어떤 것'에 대해서 '코' 라고 가르친 결과가 '코가 있다는 앎' 이며, 눈이 있다는 앎' 이며, 귀가 있다는 앎이다. 그 앎이라는 말이 한자로 번역되면서 '앎 식' 자의 '識'으로 표기된 것이다. 부처의 말을 중생이 옮겼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과 같이 언술이 뛰어난 자들이 성경, 불경 등의 경전을 창조해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상숭배사상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요인은 단지 '지식'이다. 그리고 지식은 기억세포에 저장된 언어(말)이다. 중요한 것은 기억세포에 저장될 수 없는 앎이 있다는 것이다. 기억세포에 저장되지 않은 앎이 아니라, 단지 언어를 모르던 시절에 대해서는 기억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기억세포에 저장될 수 있는 것은 단지 '말, 말, 말'언어에 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나다'는 말은 기억세포에 저장된 말이며,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말은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내가 있다'는 말이나 '내가 사람이다'는 말은 수천수만번 반복해서 들었던 말이기 때문에 고정된 생각, 즉 고정관념이 된 것이다.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변할 수 있는 생각이며, 관념이다. 왜냐하면 단지 기억세포에 저장된 수많은 낱말들 중의 한구절의 말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말 또한 각각의 낱말들로써 기억세포에 저장된 말이지만... 다만,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말에 대해서 '방언'이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며, 불립문자, 언어도단... 등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육체가 나다는 생각과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은 단지 '한생각의 차이'일 뿐이며, 서로간의 생각이 다를 뿐이라는 뜻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간혹 정신 나간자들이 있다. 

그것들은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내가 깨달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내가 스승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자들이나 그런 자들에게 속는 자들.. 모두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완전하게 무지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자신이 자신에게 속는 것이며, 그런 줄도 모르고 남들을 속이는 짓들을 반복 순환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죽어 사라지는 것이다.

흔적도 없이... 우주와 함께, 동시에...

 

 

사실. 석가모니의 말은 단순하기 이를데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말을 배우게 되는데, 그 말을 배움으로써 아는 앎(識=지식=마음=말)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앎은 자신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앎이 아니라...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듣고보고 배웠던 것들이다.

타인들로부처 얻어서 아는 앎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자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수. 상. 행. 식' 으로 표현되는 말이 그러하다. '얻을 수, '생각할 상. 다닐 행. 앎 식' 자로써 '마음의 구성 요소'가 다른 것이 아니라... '앎'이라는 것이,  행위와 생각으로써 얻어진 것이며, 그 앎이 또한 모두 언어로 구성된 것이라는 설명이 석가모니가 하고자 했던 말이다.  

 

사실. 인간이 끊임없이 다른 말, 말, 말들을 창조해 내는 까닭은, 자신의 존재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앎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대의 이름이 있지만, 누군가가 지어준 것이다. 그 이름이 그대의 본질은 아니다. 마음이 있지만 마음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변해가기 때문이며 항상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만... 세상에서 찾아질 수 없다보니, 스스로 포기되는 것이며, 보다 현명한 자는... 인연이 있을때, 그것을 잡는다는 것이며, 그것을 붙든 이들이, 소위 인류의 성인이라는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 등이다.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말들 또한 같은 맥락이다. 또한 '무선무불선'을 말했다는 맹자의 서에 등장하는 '고자' 라는 인물 또한 그 경지에 이른 인물인 것 같다. 

 

 

사실. 모든 인간들의 잠재의식에는 '존재에 대한 의심'이 있다.

다만 지식에 가려져서 드러날 수 없는 것 뿐이다.

앎, 즉 언어를 알기 시작하면서, 언어를 통해서, 언어로써 인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억세포에는 저장되지 않은 것이다. 기억세포에 저장될 수 있는 것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다만 '언어'는 '언어가 없다'는 말도 언어이기 때문에... 일단 언어를 매개체로 하여 아는 앎(말)은 또 다른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으려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의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채 의문만 가득한 허구적인 존재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의 존재...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인간은 누구나 진리라는 말을 안다. 

하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인간생명은 그 끝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왜 그 끝이 없는지도 모르는채, 지식에 함몰된다. 분명한 것은 지식이 끝이 없는 것이라면, 생명이 유한한 인간에게 지식은 쓸모 없는 것이다. 지식은 생명을 위한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지식이라면 생명이 끝나기 전에 필요한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때,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들이다. 왜냐하면 인간생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지식이기 때문이다. 끝이 없다고 알면서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식이 인간을 위해서가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식을 위해서 인간의 목숨을 사용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단지 그것 뿐만이 아니다. 

인간들의 지식은 인간들 모두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로부터 권리나 이익 등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일 뿐, 그 이외에는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발전의 결과는 멸망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언어는 본래 인간과 인간들간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써 창조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유인원들의 소리, 또는 짐승들의 소리, 새들의 지저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진화라는 말로써 사고방식이 변해가므로써 언어는 동물들과 유사한 일원성에서 이원성으로 그리고 다양성으로써 다양하게 변화됨으로써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상기해야 될 것은... 기억세포에 저장된 낱말이 풍부하지 않은 어린아이들 끼리는 언어로써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물들의 소리와 같이 언어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소통되는 아이들은 아직 '마음'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인식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채 형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그대 또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근심걱정이 없던, 천진난만했던 시절, 비교적 순수했던 시절... 지금은 어떠한가?

 

 

인간세상에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의  수많은 마음수련집단들이 있다. 물론 종교들이나 유사 종교들 또한 본질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다만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리 저리 우상숭배사상에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며, 스스로 스승이라는 자, 스스로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절거리는 정싱병자들의 말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왜, 그런 정신병자들에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는 것일까?

 

그런데.

그것들의 주장이, 마음은 산 삶의 기억이기 때문에 삶의 기억을 지움으로써 천국, 하늘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또 하나는, "말에 이끌려 다니면 안된다는 말"이라고 한단다. 간혹 도가에 방문하는 이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사실 유사한 말은 많이 들었으나, "마음이 산삶에 대한 기억" 이라는 말과 "말에 이끌려 다니면 안된다는 말" 은, 어제 도가를 방문했던 이들에게 들은 말이다. 

 

마음은 단지 산 삶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인간이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순수의식)부터 지금 이순간까지 듣고 보고 배웠던 모든 낱말들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 '마음'이라는 말로 창조된 것이다.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에 '육체가 나다,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상대적인 말 중, 하나인 '육체가 나다'는 말, 말, 말에 바탕을 둔 모든 기억된 생각(언어)들이 지금 그대의 마음이며, 지식이다. 

 

 

기억은 과거에 대한 생각이다. 어제도 과거이며, 지금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또한 과거이다. 

기억을 지운다는 생각도 '기억을 지운다'는 '하나의 생각'이다.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나의 다른 '생각' 이다. 

'생각할 수 없다는 생각' 또한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들 중, 하나이 생각이다.

 

생각을 끊는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내가 깨달았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생각이다.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내가 하나님이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생각'이다.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 과 "하나님이 없다" 는 생각 또한 서로 다른 '생각'이며, 한 생각의 차이이다. 그대의 기억세포에 저장된 무수히도 많은 생각들 중에 단 한 두개의 생각이다. 그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왜 그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하나, 또는 두개의 생각에 대해서만 집착하는가?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과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 그 두가지의 생각에 대해서 고민해 보라.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 숙고해 보라.

그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인지, 아니면 인간들의 생각인지 사유해 보라.

 

그것들....

"남들의 말에 이끌려 다니지 말라" 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지들의 말에만 이끌려 다니라는 말이다. 아니다. 모든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고, 그리고 스스로 판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자신의 마음을 타인들의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말이 되는 소리인가?

 

사실. 인간은 남들의 말에 이끌려 다니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어린아이서절부터 타인들의 말에 의해서, 타인들로부터 말을 배움으로 하여, 그 말에 의존하여 구성된 것이 '자신의 나' 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언어로써 구성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앎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들의 말에 의해서.... 다.

 

만약에 언어가 없다면... 나, 우주, 절대자, 영혼... 이 없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본래 무일물' 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 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남들의 말에 이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진리를 이해 하는 것이다.

올바른 앎일 때, 절대로 남들의 말에 현혹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변의 진리' 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다.

그 하나가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이다' 라는 앎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생각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면, 누구에게자 당연하게 다가오는 앎이며, 지식을 초월한 지혜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평화라고 하는 것이며,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와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