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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 [성령]의 정의 - 是名불성. 시명성령

일념법진원 2014. 12. 18. 06:32

[,]과 [佛性] - '성령과 불성'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 으로써만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로부터 '이름'이 지어졌기 때문에, '이름(名)'이 있는 것이다. 그 '이름'에 대해서 제각기 지식 수준에 따라서, 세뇌 및 집중 교육의 정도의 차이에 따라서, 또는 마음 먹기에 따라서 또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서로가 다르게 느끼는 것이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름(명칭, 낱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며, 그런 이름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이며, 그 환상을 간직하는 것이다. 이는 무속인이 부모의 영향을 받으므로써 신을 믿고, 신을 받는 일과 똑 같은 이치이다. 생각의 유희희이다.

 

서로 다른 언술이 뛰어난 자들로부터 그런 방식으로 교육 받아진 결과. 본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고 싸우는 것이다. 인간들의 언어 또한 본래 없던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간들만이 전유물이기 때문이며,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령, 불성, 영혼, 귀신 등의 이름들이, 그것들이 사과라는 과실의 이름과 같이 사실적인 것에 대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면, 누구나, 누구에게나 똑같은 모양으로, 그림을 그리더라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같은 모양이나 형상으로 기억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불성. 성령. 영혼. 귀신, 망령, 악령, 신령' 이라는 이름들 또한 그러하다. 

옛 사람들이 하늘에 날아다니는 검정색깔의 동물의 이름을 '까마귀' 라고 지었듯이...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없는 인간들...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어떤 신'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서 지어진 이름이 '불성. 성령' 등이라는 말, 말, 말이다.

그런 방식으로 지어진 이름이 '하나님' 이든, 부처님이든, 상제든, 천왕이든, 또는 하늘이든... 모두 이름에 불과한 소리들인 것이다.

 

'이름 짓기'는 오직 인간동물들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석가모니의 말이지만,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된 불경에는 '불성' 이라는 말도 이름이며, 심지어 '중도' 라는 말도 '이름이다'는 말이 있다. 한자로 '是名中道' 로 표현되는 글귀이다. "바르게 본다면, 중도라는 것 또한 '이름'이다는 뜻이다"

 

사실은 금강경의 구절들 또한 한글번역본을 보니... 고통 또한, '고통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다' 는 방식으로 번역 되어 있었다. 

고통 또한 '고통'이라는 말이 없다면,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라는 말 또한 그러하며, 인간이라는 말, 이름 또한 그러하다.

 

 

12 연기법 또한 말을 배워 아는 앎(識)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설명이며, 무명과 행, 식, 명색... 으로써 '어린아이가 행위를 통해서 말을 배우는 과정, 즉 지식을 얻는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지식에 의해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했던 방법이다.  

 

석가모니가 인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12 연기법은, 한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 까지를 표현했던 말이다. 그 중에서 '무명, 행, 식, 명색... 까지가 어린아이가 말을 배워서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며, 그 앎에 의해서 감각기관을 알게 되는 것이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그런 방식으로써 배우는, 그 앎(識)이 올바른 앎, 즉 진리가 아니라 '名色'의 동일시로써의 앎이라는 사실이다. 인간들의 모든 언어, 낱말, 이름들이 '명색의 동일시' 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별은 별이 아니다' 라는 말... '명색이 사람이다' 는 말... (앞장의 '명색' 이라는 낱말의 정의에 대한 내용과 같다 

 

 

예수의 말이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된 성경에는 "진실로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남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요, 성령이다' 는 구절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네 안에 있다" 는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는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의 비유를 든다.

'너희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라는 말로써 '앎'이 없는 어린아이시절에는 너희 또한 '삶, 죽음' 등의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었다, 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 안에 하나님이 있으되,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말이 있으며, 오직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승리와 영광을 얻는다는 말로 귀결된다. 이 말은 석가모니의 말과 같은 뜻이다.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이 있으면,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어린아이에게는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 이 없다는 말이다.

 

 

광신자들에게 세뇌 당한 맹신자들은 흡사 사냥꾼에게 잘 길들여진 사냥개와 같다.

주인의 명령이면 누구나 물어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들 또한 광신자나 맹신자들이라면 절대로 이해 하려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왜냐하면 '논리'의 근원인 '생각의 원리'에 바탕을 둔 설명으로써 한글을 이해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이럿듯, 근거 없는 앎들에 대한 주장이기 때문에 논리적이지 않은 말들이다. 반면에 진리는 지극히 논리적이기 때문에 현시대 인간들의 다툼이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성인들이다.

설마, 인류의 성인들이, 인간들에게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라고 가르치겠는가?

그대는, 그대가 광신자거나 맹신자라면... 그대의 자식들에게 서로 싸워고 이겨서 승리하라고 가르치겠는가?

 

석가모니와 예수의 말, 가르침... 인류 성인들의 가르침은 똑 같다. (물론 공자는 제외지만...)

인간의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스스로 깨달아 알때, 그때 비로소 삶과 죽음의 고통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올바른 앎으로써, 즉 진리로 거듭남으로써 비로소 '나와 너'... 선과 악' 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들에게 '나와 너' 라는 분별심 내지 '선과 악'이라는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석가모니와 예수는 둘 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의 비유를 들어 진실된 말, 진리를 설했던 것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들과 같이... 인간들의 마음(분별심) 또한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냥꾼에게 잘 길들여진 사냥개와 같이, 다른 종교들을 물어뜯거나, 비난하거나, 갈등하거나 싸우는 자들,, 그들 또한 본래 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간들 모두가 그렇듯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완전하게 무지하다 보니, 사냥개가 길들여 지듯이 언술이 뛰어난 자들에 의해서 그들에게 길들여진 탓이다.

 

이제 그런 비논리적인 주장들로써 서로가 무턱대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시대는 아니다. 왜냐하면 문법이라는 문장을 기록하기 위한 법칙이 있으며, 논리적이라는 말이 있으며, 육하원칙이라는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논리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조차 이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의 기원을 모르기 때문이며, 인간이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인간이다'는 주장 조차도 올바른 앎이 아닌 것이다. 

 

'생각'이라는 말은 논리의 근원 '문자'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는 기억된 생각들의 극히 일부분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기 때문이며, 생각은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정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생각의 논리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

그림책을 보며 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것은 까마귀' '저것은 까치' 라는 방식으로써의 '명색' 즉 '이름과 형상'과의 '동일시'를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배우던 아이들이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보면서 말다툼이 일어났다.

한아이는 저것은 까마귀다, 라고 주장하는데, 한아이는, 아니다. 저것든 '까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지켜 보던 중학생들 몇몇이서 아이들의 논쟁을 듣고 나서 아이들에게 일러준다.

 

동생들아, 저 새의 이름은 '까마귀'야, 라고. 한아이는 믿는데, 한아이는 믿지 않는다. 그러니... 확인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그림책'을 보여준다. 그림책을 다시 보고서야... 아이는... 아하, 그렇구나, 라고 이해 하게 된다.

 

아이들과 중학생들이... 이와같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앎이라면 '성령'을 주장하거나 '불성'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른들이 서로가 싸운다.

아이들의 말싸움의 정도가 아니라, 서로가 피를 흘리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인간들의 역사가 그러하다.

'성령'이 옳다, 아니다. '불성'이 옳다. 아니다. 하나님이 가장 큰 신이다, 아니다, 부처님이 진리이다... 아니다, 우리 상제님이 최고 높은 신이다. 아니다, 우리 스승님이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아니다 우리가 옳다, 아니다, 우리가 옳다, 너희는 사이비다, 너희는 악령이다. 너희들이 악마다... 라는 방식이다. 말을 배우던 아이시절에... '불성, 성령, 영혼' 이라는 것들이 '본래 없는 것'이라고, 이름으로만 있는 것이라고... 배울 수 있었다면... 어떻겠는가?

 

 

자. 그런 치졸한 논쟁들, 다툼들, 전쟁들... 이제 그만 두자.

이제 논리적인 말로써 서로가 이해 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문법이 있기 때문이며, 논리적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의 논리로써 누구나 이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사람이며,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는 동물 또한 오직 인간동물들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사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고양이' 라는 이름도 사실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인간들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정작 '고양이'는 '내가 고양이다' 라는 앎, 지식,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는 이름 또한 그러하다.

 

사실. 인간들의 '우리가 인간이다' 는 말 조차도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며, 편견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 아니다'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우리가 인간이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인간인지에 대해서 주장할 만한 근본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근거 없는 주장이며, 단군신화를 주장한다는 것 또한 근거가 없는 옛 신화에 대해서 사실인것 처럼 주장하는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불성, 성령'이 있다는 말 또한 그런 방식으로 창조된 말, 말, 말들... (이름)이다. 

 

 

생각의 논리로 보더라도 그러하다. 

설령. 불성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성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며, 성령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무속인들이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만의 생각일 뿐, 모든 사람들이 동의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다. 이와 같이 불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무속인들이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생각이며, 성령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느낌이 다르다는 생각, 감정이 다르다는 생각, 생각, 생각이기 때문이다)

 

성령이나, 불성이나, 영혼이나, 신, 하나님, 부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의 주체는... 불성이나, 성령 등이 아니라, 인간들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그 자신만의 세계는 본래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워서 아는 앎에 바탕을 둔 세계라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절친했던 친구가 어른이 되어 보니. 서로가 다른 종교에 광신자가 되어 있거나, 맹신자가 되어 있다면, 그들은 이미 친구가 아니라 적이 된다.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다시 친구가 될 수 없다. 부모와 자식간의 일들 또한 그러하다. 서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다른 방식으로 세뇌 당한 탓이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하늘나라에 천왕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하늘나라에 천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이겠는가? 아니면 '천왕'의 생각이겠는가? 

천왕에게 기도를 한다면, 천왕의 마음이 흔들리겠는가" 아니면, 기도하는 인간의 마음이 흔들리겠는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감동하겠는가? 아니면, 기도하는 인간의 마음이 감동하겠는가? 

부처님에게 공들이면, 부처님이 감동하겠는가? 아니면, 공들이는 인간의 마음이 감동하겠는가? 

 

강물에 돌맹이를 던져놓고 기도하면, 그 돌맹이가 가라앉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돌맹이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강물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현명한 자라면, 기도 하는 짓들로써 무어을 얻으려 하겠는가? 

 

자신의 마음이라고 주장하지 말든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지 말든지. 

그대가 누군가로부터 세뇌 당하여 성령을 주장하듯이, 불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다른 누군가로부터 그대와 같이 세뇌 당한 것이다. 

사냥개가 뛰어난 사냥꾼으로부터 세뇌 당했듯이... 

 

 

그대는 그대만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듯이, 다른 사람들 또한 그대와 같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서로가 다른 휼륭한 사냥꾼으로부터 길들여 졌기 때문이다. 그대가 광신자나 맹신자라면... 사냥꾼이거나, 사냥개거나... 선함을 가장한 악한 무리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 잘 길들여진 사냥개와 같이 죽는 날까지 투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은 진리가 아니다. '사냥개'와 같이 세뇌당한 그대로 무턱대고 주장하는 것이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논리적이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앎이기 때문에 다툼이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석가모니와 예수를 비유로 드는 까닭은, 인간의 역사로 볼때 오직 그들 둘만이 우주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이해 하는 진리를 깨달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맥락의 진리를 설했던 인물들이 '소크라테스, 노자, 장자... 등의 인물들이다. 

 

'본래 없는 것들'로써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여, 죽는 날까지 싸우고 투쟁해야 하는 삶이라면 살아갈 가치도 없는 삶이 아니겠는가? 인간 존재의 이유가 고작 남들과, 이웃들과의 다툼, 경쟁, 투쟁, 전쟁이어서야 되겠는가말이다. 

 

가치 있는 삶 더 나아가 검증된 삶을 위한 길이 있다.

죽음이 고통이라면, 삶은 기쁨과 평화라야 하지 않겠는가?

그 길에 대해서 '진리의 길'이라고 한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의, 인간의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인연있는 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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