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중도 · 방편설 - 말변사

[시생멸법] [생멸법] [불생불멸] 의 정의(正意)/ 지식(사념)과 진리 - 영원한 자유로 가는 길/ 석가모니의 자취

일념법진원 2015. 1. 19. 06:59

'생멸법'은 '생멸'이라는 이름이다.

 

사실. '시생멸법'이라는 말의 올바른 뜻은 '옳을 시' 자와 '날 生' 그리고 '멸망할 滅' 자로써 의 '시생멸법'이라는 말로써... 올바른 앎, 즉 진리의 앎이라면 제행무상 즉 인간세상의 모든 법칙은 생함과 멸함의 법칙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며, 인간의 생각의 생멸현상에 의해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유위법'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생각의 생멸현상이 없다면... 무위법으로써... '본무' 라는 말로써 표현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써 '나' 와 '우주' 또한 본래 없는 것이다, 는 말이다.  사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왜곡된채 한자로 번역되면서 전해지는 불경에서는 '삼법인'을 주장하는데, '무상. 고. 무아' 라는 말인 것 같다.

 

'무상. 고. 무아' 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제행무상'이라는 말과 같이 본래 '형상이 없는 것, 또는 항상할 수 없는 것, 또는 영원할 수 없는 것, 또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 등의 존재계의 모든 것들이 본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상한 것들에 의해서 '고(苦고통)'  즉 괴로움이 있는 것이며, 그 괴로움을 모두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무아'를 증득해야 한다는 뜻이... '무상, 고, 무아' 라는 말의 본래의 뜻이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무아' 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며,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아' 라는 말은 한글로써는 '나는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본 뜻이 왜곡된 말이 '무아' 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없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어긋난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없다'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없다' 라고 주장하는 '나' 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한글로 '깨달음'으로 표현되는 말들이 한자로는 '득도, 오도, 각성' 등으로써 수많은 표현들이 있으며, 그 대표적인 말이 있다면 '부처, 불타, 불성' 이라는 말이다. 물론 올바른 앎이라면, '是名中道' 라는 표현과 같이 '중도'라는 말 또한 '이름'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언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닌데... '이름' 들로써만 있는 것들일 뿐이라는 말이다. '영혼, 귀신, 성령, 불성, 신, 절대자...' 등의 말들이 그러하듯이.

 

 

사실. 인간자체가 근본원인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무일물'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에 대해서 '깨달음'이라는 또 다른 말로 표현된 것이다. 오직 그 길, 방법만이 자유와 평화이기 때문이다.

 

 

사실, 언어가 있는 것이며, 인간이 있는 것이며, 세상이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는 가정하에서 본다면... 깨달음이란 '일념명상법'이라는 일념법으로써 시간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념법으로써 모든 사념이 사라진다는 것은 기억된 모든 생각(앎, 지식)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이며, '무의식, 잠재의식'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기억할 수 없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시절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일념삼매' 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일념만년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일념의 무념처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일념삼매, 일념의 무념처(무념무상)에서 일어나는 한생각이 있다. 그 생각이 '육체가 나라는 생각일 뿐' 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순수의식에서는 없었던 인위적인 최초의 생각이 한자로 '아상(我想)'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나 라는 생각' 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 라는 말은 본래 '무아' 라는 말이 아니라, '무아상' 이라는 말로 표현됨이 옳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없다'는 *생각*  이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의 논리로 본다면... '내가 있다는 생각' 과  '내가 없다는 생각' 은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기 때문이며 서로 상대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앎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 단견, 편견이라고 하는 것이며, 양 극단을 달려가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상대적인 언어속에서 헤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에 속지말라고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언술, 논술, 말재간에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불교라는 종교의 주장은 석가모니의 주장이 아니라... 이와같이 단견이나 편견으로써 석가모니의 말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킨 말들이며, 편견 단견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에 삼법인이라는 말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면... 무상, 고, 무아상' 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종교들은 석가모니와 예수를 우상으로 숭배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며, 그들의 말들에 대해서 연구해서도 아니되는 것이며, 그들의 말을 왜곡시켜서도 아니되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관념들 즉 이분법적 논리,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와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한 것이며, 우상숭배로써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근원을 보는 일에 대해서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불경을 연구하거나, 석가모니의 말을 흉내내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금강경의 사구게라는 글을 보니...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약이색견아' 라는 말은... 형상이나 모양이 있는 모든 것들로써는 '자아'를 볼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모든 소리나, 음성이나, 문자로써도 '자아'를 볼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어떤 행위로써도 스스로 '자아'를 볼 수 없으며.... 그런 인간들의 모든 행위들은 '삿된 도리'라는 말이다. 무슨말이겠는가? 석가모니와 예수의 말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언행, 언동들... 모두 삿된 길을 가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인간들의 모든 생각이 사념들이 아닐 수 없으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한 설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어리석은 자들... 언술이 뛰어난... 종교나부랭이들에 의해서 자취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나부랭이들의 모든 짓들에 대해서 삿된 도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항상 반복 설명되는 말이지만....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다,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 그러니 그것을 관찰하라' 는 말로써... 현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일념법, 일념명상법' 수행으로써 진리를 증득할 수 있다는 말이며,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자신의 나를 탐구함으로써 진리를 증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류의 역사로 볼때, 석가모니와 예수 이후에 석가모니나, 예수 등과 같이 올바르게 중도를 깨달은 인물들이 단 하나도 없는 이유는...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세상의 모든 수행방법들이.... 깨달음을 표현하는 어떤 '언어, 낱말'를 목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참된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라거나, 또는 '성불'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거나... 또는 '부처' 라는 말을 염두에 두거나... '불성'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거나... 성령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거나...  미륵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거나... 자등명, 법등명' 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거나... '광명의 빛'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거나... 어떤 밝은 빛'을 염원하거나... 어떤 소리를 염원하거나... 어떤 형상을 상상하거나... '우주의식'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거나... 밝은 빛'을 염두에 두거나, 영롱한 빛을 상상하거나... 하나님을 상상하거나, 말씀을 상상하거나, 여호아를 상상하거나, 영혼을 상상하거나... 복을 달라고 기원하거나... 영광을 달라고 기도하거나... 공덕을 얻겠다고 기도하거나... 등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보기 위한 일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나를 보는 일이며, 오직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깊이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이다.  

 

 

사실, 진리와의 인연에 대해서 '백천만억겁 난조우' 라는 말로써 귀하디 귀한 인연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일념법수행으로써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즉 생각의 생멸현상 작용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진리의 좁은 문'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인간의 관념으로써 이해 할 수 있는 앎이 진리라면... 어찌 '백천만억겁 난조우'의 인연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수 있겠으며, 대도무문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수 있겠으며, 불립문자, 언어도단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수 있겠는가? 

 

 

사실, 생멸법이라는 말은 '윤회법'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생각* 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고 사라짐이 반복되므로써 시작과 중간, 끝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연속성이며, 영원성의 특성을 가진것이다.

생멸법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생각의 생함과 멸함의 현상을 일컷는 말이다. 사실, 인간은 생각의 생멸현상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무형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영혼' 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신, 절대자' 귀신... 등의 행위라고 단정짓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 '육체에 깃들어 있는 무형의 실체'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각의 생멸현상'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육체에 깃들어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뇌세포의 유기적인 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하나의 파동이다. 그 파동에 대한 '이름'이 '생각'이라는 낱말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생각이 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생각의 윤회현상에 대해서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생각의 윤회'라는 말로 표현되는 까닭은 빠른 속도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의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 수레바퀴의 축과 바퀴를 연결하는 연결대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만, 생각의 생멸현상의 윤회는 여러가지의 생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과 같이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감각기관으로써는 감지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인간사, 세상사 모든 문제의 원인이며, 모든 고통의 원인이 곧 '생각의 윤회'에서 비롯된 착각현상 것이다. 

 

 

사실, 생각의 논리로 본다면 모든 문제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다는 생각과 마음이 없다는 생각은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며, 상대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고통이 있다는 생각 또한 고통이 없다는 생각과 한생각의 상대적인 생각이며, 삶이 있다는 생각과 삶이 없다는 생각 또한 그와 같기 때문이다. 지옥이 있다는 생각과 지옥이 없다는 생각,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과 없다는 생각, 불성이 있다는 생각과 없다는 생각 또한 그러하다. 

 

 

사실, 석가모니의 말이 왜곡되고 변질된채로 전해지는 '윤회'라는 말 또한 본래의 뜻은 '생각의 윤회'를 일컷는 말이다. 다만 석가모니가 존재하던 시대의 언어로써는 표현될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만 하더라도 그들의 언어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말들이 구전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올바르게 전해질 수 없었던 것이며, 예수의 말 또한 그러하다. 

 

물론 윤회라는 말은 '생각이 윤회' 뿐만이 아니라 '언어' 또한 그러하다. 석가모니의 말은 '언어의 윤회'라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고통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고통이라는 말이 없다면, 고통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의 기억된 생각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항상 과거를 사는 것이다. 인간은 감각기관의 작용 즉 눈과 귀, 코와 혀, 촉감 등의 감각기관의 작용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 항상 감각기관에 의존하기 때문에 눈과 귀, 코와 혀, 촉감으로써의 느낌에 대해서만 사실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웨 감각기관의 작용에 대해서, 감각기관의 작용이 아니라, 생각의 작용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한 것 같다. 사실, 불경에 기록된 '무안이비설신'이라는 말은 '감가기관이 본래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써... 지식으로써는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생각의 작용에 대한 설명으로써 왜, 감각기관이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한것인지에 대해서 지적으로써도 분명히 이해 할 수 있다. 생각이 원리로 본다면 보편타당한 앎이며, 상식에 속한 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그대는 어린아이서절에 먹었던 과일의 맛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다. 가령 오래전에 먹었던 고추장 맛과 된장 냄새에 대해서 기억해 볼때에, 그대가 기억하는 것은, 즉 그대의 기억세포에 저장되어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향기나 맛' 을 기억하는 것이지 향기를 맡는 '코'  또는 맛을 감별하는 '혀' 가 아니라는 뜻이다. 설령 옛날 보았더 사람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항을 본 '눈' 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았던 '대상'을 기억한다는 말이다.

 

 

사실, 내가 사람이라는 생각, 눈이 있다는 생각, 코가 있다는 생각, 귀가 있다는 생각, 뇌가 있다는 생각... 등의 모든 생각들의 집합체가 곧 지금 그대가 '나' 라고 주장하는 '나'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기억된 생각이 없다면... 그대의 나는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나'가 없다면... 세상이 없는 것이며, 우주가 없는 것이다. 

그대의 '나'가 있기 때문에... (기억에 바탕을 둔) 환상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네  안에 하나님, 네 안에 불성이 있다는 뜻이다. 

단지 일념명상법으로써 그대의 모든 사념(=지식)이 모두 사라져야만 드러나는 것이며, 이름하여 진리이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오직 진리 안에 있는 것이다. 

진리와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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