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도 안심(安心)이나 입명(立命)에는 먼 상태. 하기는 지금 이 시대는 그런 고전적인 해탈의 길은 막혔다고 한다. 출처 : 최인훈, 회색인
불교의 교리 사성제에서 이미 설명되었다.
윤회와 해탈이 별개의 행위, 또는 다른 낱말로 표현되어 있기에 혼란이 가중된 것으로 보이기에 다시 설명해 보려 한다.
종교를 목적으로 경전이 쓰여지다보니 윤회라는 말이 몸이 죽고난 뒤에 업에 의해 다시 태어남으로 알고 있으며 이를 당연시 하면서 모든 종교는 인간을 죄인으로 취급하게 된듯 하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들이 조금이나마 교화될 수 있었을 것이기에 원시시대에는 인간을 죄인 취금하는 방법이 필요한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을 것이나,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를 사는 지성인들 마져 윤회와 해탈이라는 말에 대해서 헤매고 있기에 이를 좀더 분명하게 설명하려 한다.
생각의 미묘한 이치와 속성에 대한 선 이해가 있어야만 윤회와 해탈에 대해서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괴로움은 그릇된 앎에 의한 고정관념, 즉 고착화된 생각메서 시작되었다.
완전할 수 없는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하여 나와 다른 대상들과를 비교하여 분별하는 습관된 생각에 의해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깊은 잠에서는 생각이 휴식을 취하는 상태이기에 괴로움이나 고통따위가 없는 것이며, 깊은 명상에 들었을 때에 평화를 느끼는 이유는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던 생각이 깊은 잠과는 다른 방법에 의해 윤회가 끊어짐에 따른 결과이다.
명상이나 명상과 유사한 집중을 위한 육체의 행위에서도 기쁨과 평화로움을 느끼기도 하며, 단 시간동안의 집중에 의해 통곡을 하거나 괴성을 지르거나 하는 등의 갑작스러운 격렬한 행위에 의해서 고질병이 치유되기도 하는 사례는 종종 있는 일이다.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삶과 죽음을 반복 순환하던 생각이 집중에 의해서 잠시 휴식을 취함에 따라 마음 깊이 간직되어 억압되었던 생각들이 출구를 찾아서 튀어 나오는 결과이다.
육체는 생각에 의해 창조된 물질이기에 생각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며 끊임없이 반복 순환되는 생각에 의해 상처받았던 일들에 대한 아픈 기억들이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고통과 괴로움의 기억들은 잠재의식에 저장되어 신경조직을을 억압하고 있었으며 일념의 집중이 이어짐으로써 생각의 윤회가 끊어짐에 따라 묵은 감정이 튀어나오면서 통증이 치유되는 현상이다.
인간은 생각의 이치를 간파할 수 없기에 자신이 알아차릴 수 없는 생각의 미묘함에 대해서 영혼이나 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은 스스로 일어나고 죽음을 반복하지만 에고는 이를 감지조차 할 수 없기에 연구할 수도 없다.
그토록 미묘한 생각의 이치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많은 성자들이다.
나라는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반복 순환되고 있었으며, 잠을 통하여 휴식을 취하는 신비한 것이다. 이렇게 자아를 인식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삶과 죽음을 반복 순환하는 생각에 대해서 생각의 삶과 죽음의 반복 순환, 즉 생사 윤회라 했던 것이다.
불교의 교리인 사성제는 마음의 작용이 12연기법을 운운하며 애매하게 표현이 되었기에 육체의 윤회를당연시 하는 종교지도자들이나 그들로부터 세뇌된 견해로는 이를 이해할 수가 없을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보면, 12연기법 및 감각기관의 작용이 윤회함으로 되어 있으며, 모든 감각기관은 마음의 작용이며, 마음은 생각에 의한 작용이기에 생각의 윤회를 설명한 것임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윤회를 끊어냄이 해탈이며, 해탈은 괴로움과 고통의 소멸이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고통에 대해서는 반야심경에 설명되어 있다.
깨달음은 불생불명이며, 늙음도 없으며 병에 대한 고통도 없다.
안심 입명이라는 생각이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말들일 뿐이기에 생각에 의해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이 불행이라는 생각이 없다.
동물과 같이 지능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무위 자연이다.
아는 것이 없지만 모르는 것이 없다.
능한 것이 없지만 능하지 못한 것이 없다.
유일자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다.
현자의 기원이며, 우주의 기원이다.
있다하는 모든 것의 어버이이며 씨앗이다.
노자와 장자는 그것을 '도'라 이름하였다.
예수는 오직 나, 하나님이라 하였다.
석가모니는 부처, 참 나, 인간의 본성이라 하였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였다.
삼매라는 단어의 뜻과 같이 인간이 육체에 얽매여 있는 동안의 최상의 집중의 결과는 절대자와의 합일이며, 이는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에 다다른다.
태어남 이후 자아를 인식하면서 살아오는 동안의 모든 앎이 그릇된 분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까지도 생각에 의한 분별이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육체가 내가 아님을 알아차림에 대해서 무아, 무위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 알았던 모든 지식이 쓰레기였음을 알기에 그 이치를 전하는 것이다.
육체와 현상계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나라는 생각으로 보는자에 의한 환영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상대성 이론으로 설명하였다.
무한한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이 삼매이다.
육체가 나다, 아니다???
한 생각의 차이이다.
죽음의 쇠사슬을 끌고 바삐 가는 곳은 어디인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