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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의 본질/상카라의 불이일원론적(不二一元論的) 철학???

일념법진원 2009. 5. 2. 07:27

인도의 철학?자, 상카라는 불이일원론적(不二一元論的) 베단타 철학파의 가장 유명한 대표자이다. 오늘날 인도 사상의 주요흐름은 그의 학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브라마 수트라 Brahma-sūtra〉와 주요 〈우파니샤드 Upaniṣads〉에 대한 주석서를 써서 유일하고 영원불변한 실재인 브라만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고 다양성과 차별성은 환상이다 라는 상카라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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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특징 <종교의 기원?
■ 아트만-브라만의 교설 <아트만, 브라만=본래성품=진아=순수의식>
영원불변하고, 전우주의 근원이자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이라는 중성적 원리가 있으며, 이것은 곧 인간 내면의 참다운 자아, 즉 아트만과 동일하다. 브라만 자체는 무속성이며 비인격적이지만 비슈누(Viṣṇu)·시바(Śiva)라는 인격적 최고신으로 나타날 수 있다.
■ 이슈타데바타와 트리무르티
힌두인들에게는 특별히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신은 많지만 이들은 본질에 있어 단일한 존재이며, 최고신격을 가진 창조신 브라마, 유지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는 단일한 실재의 세 측면(Trimūrti 三神一體說)이다.
■ 베다와 브라만 계급의 권위
가장 오래된 종교 문헌인 베다(Veda : '지식'이라는 뜻)는 근본적이고 완전한 진리의 계시서(슈루티)로 믿어진다. 브라만 계급은 브라만의 특수한 현현이며, 베다의 교사이자 전승자로서 신성시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힌두교는 그러한 의의를 다소 상실했다.
■ 아힘사[不殺生]
모든 생명의 근본적 단일성에 근거한 생명에 대한 존중을 내용으로 하는 아힘사는 채식주의, 소의 도살 금지 등으로 표현되었다.
■ 윤회(삼사라)와 업(카르마)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현재의 삶은 반드시 과거의 행위(카르마)의 결과라는 업설은 생사(生死)의 반복적 순환, 즉 윤회사상과 연관된다. 업이 있는 한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해탈)이 힌두교의 궁극적 목표이다.
해탈에 이르는 3가지 길
해탈에의 길(마르가 또는 요가)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중요한 힌두교 성전인 〈바가바드기타 Bhagavadgῑtā〉('至尊의 노래')에서는 다음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행동(카르마)의 길로 카르마를 생성시키는 것은 욕망이지 카르마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결과에 대한 이기적 집착심이 없는 의무의 수행은 과보를 낳지 않으며, 따라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둘째는 지식(지냐나)의 길로 참다운 자아는 육체나 감관이나 사고 등이 아니라 영원불멸하는 아트만이며, 이것은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직관적 통찰에 이른다. 셋째는 신애(信愛 : '박애')의 길로 인격신(비슈누 또는 시바)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길이다. 이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길로서 독리된 교파로 발전된 것은 신애주의이다. 또 행동의 길은 간디의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반적 힌두인들에게 힌두교란 심원한 교리나 해탈의 실현보다는 전통적인 종교적 관행·의식·규정을 준수함으로써 현세에서 행복을 얻고, 내세에서 좋은 곳에 태어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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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는 인간의 본질인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의 설명인 불이론이나 단일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기에 학파나 또는 다른 사상으로 분류할 수 밖에 없다.

석가모니와 예수, 노자와 장자, 소크라테스와 아인슈타인, 마이드터 에크하르트,...... 이 모든 인물들이 생각의 윤회에서 벗어난 인물들임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기에 당연할 일일 수 밖에 없다.

 

그 이치를 알아차림에 대한 설명들이 에고의 생각에 의해서 신비로운 신으로 둔갑된 것이다.

생사윤회라는 말은 생각의 끊임없는 삶과 죽음의 반복, 순환됨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며, 생각의 윤회를 끊기 위해서는 일념의 기도나, 염불, 또는 행위의 관찰, 화두공안 등의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인간의 욕망은 육체=나다라는 집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교육을 통해서 강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욕망을 모두 버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명시대라는 현 시대는 태어나서 부터 나 말고 다른 사람보다 성공해야 된다며 철저하게 세뇌를 당한다.

성공 = 승리 = 부자 = 행복, 또는 평화, 

그런데 행복이라는 낱말에 대한 뜻을 바로 알고 있는 사람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세뇌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에 끄달려 욕망의 노예로 살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허무한 나그네가 되어 회한의 눈믈을 흘린다.  

 

종교 = 하늘나라 = 천국 = 행복 = 기쁨..... 
종교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기생하는 또 다른 에고의 집단이다.

 

생각은 그만큼 교묘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기에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죽을때 까지도 깨어나지 못하며, 착각인줄 조차도 모르고 살다가 가는 것이 에고의 삶이다. 

 

내 생각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음에 대해서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라고 말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라도 알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대는 현자이다.  

 

불이 일원론, 즉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도 옳은 말은 아니며,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도 또한 옳은 표현일 수는 없다. 

본질은 아무것도 없음이지만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기에 에고의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이다. 

아무것도 없음이지만, 에고는 나의 부재를 상상할 수 없다. 

오직 삼매에서 그 실체를 알아차림일 뿐이다. 

 

실체를 알아차림은 경험이 아니다.

경험은 미래에 반복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만, 알아차림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를 표현할 수 없기에 이해를 돕기 위한 말로 만들어진 소리로 표현해 보는 것일 뿐이다. 

죽은자의 생각 속에서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천국?, 지옥?,....... 아무것도 없듬도 없음이다.  

깊은 잠 속에서 무엇을 경함하는가? 

 

생각없음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는 없다. 

 

오직  나만이 존재할 뿐,......

출처 : 생사자유자재
글쓴이 : 진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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