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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생각의 관계

일념법진원 2009. 5. 9. 10:48

찰나지간에 일어나고 죽음을 반복 순환하는 생각의 미묘함을 생사 윤회라 하였다.

생각은 마음과 육체의 행위 이전에 이미 일어나 있었지만 인간은 이를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석가모니와 예수, 노자와 장자, 소크라테스 등의 성인들은 미묘한 생각의 이치, 즉 생사이치를 깨달아 해탈한 인물들이다.

 

생각의 미묘함에 대해서는 설명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종교를 위해 쓰여진 경전들이지만, 꿈에서 깨어나라는 말을 한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기도하여, 참선하여 꿈에서 깨어나라 라고 말하였다.

 

생각과 꿈을 비유하면 생각의 이치에 대해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다.

생각의 이치를 모르기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모르기에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모두가 나이면서도 다른 나를 짓밟아야만 성공이며 행복이다라고 착각하고 있기에 투쟁을 교육하는 것이다.

다른 나를 짓밟는 일이 당연시 되었다.

석가모니와 예수는 무아와 무위, 무위자연을 말하면서 우주만물의 평등성을 말한다.

무아와 무위, 즉 나를 버리고 다른 나를 사랑하여야만 행복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자신의 생각이 끌려다니는 인간들에게는 최선의 가르침이다.

 

그들의 생존 당시에는 생각의 이치에 대한 설명을 하기에는 지적 수준이 낮았었기에 생각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 한 실정이었다.

지금의 지성인들 역시 우매하기는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 조차도 가공된 것이니 섭섭해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생각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일념의 무념처가 무엇인지, 삼매의 뜻이 무엇인지, 왜 하루종일 기도하여 꿈에서 깨어나라 하는 것인지, 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오만으로 자신의 나만이 옳다며 투쟁을 하고 있다.

지구만큼 큰 파이하나를 놓고 누가 누가 더 많이 갖을 수 있는지 싸움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땅따먹기를 하는것과 같이......

 

꿈은 생각의 또 다른 유희이다.

자신도 모르게 윤회하는 생각의 미묘한 모습이다.

이 글을 통해서 생각의 미묘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의 고정관념에서 깨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의 흐름에 대해서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찰나지간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시작과 끝은 물과 물고기와의 사이와 같이 거리가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거리가 없지만 없는 것도 아니다. 오직 일념의 무념처인 삼매에서 확인할 수 있기에 밝혀지지 않는것일 뿐이다.

 

한 시간 전에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기억할 수 있는가?

삼십분 전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는가?

십분 전에는?

5분 전에는?

1분 전에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10초 뒤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측할 수 있는가?

 

어제 하루종일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지금 생각해 보라.

어제 하루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떠올려서 기록해 보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가", 라고 생각해 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해 볼 일이다>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었다.

생각의 끊임없는 윤회에 따라서 조금 전에 했던 생각조차도 기억할 수가 없다.

생각은 그만큼 미묘하여 그대의 생각과 감각보다 빠르다.

감각기관으로는 절대로 생각 이전의 생각을 추월할 수가 없다.

 

그런데 생각은 휴식을 취해야만 된다.

육체와 마음을 지배하던 생각은 잠을 통해서 휴식을 취한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사람이다, 아니다 라는 생각도 없다.

아무것도 없음이지만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존재와 실존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다른 나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나는 다른 나와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휴식을 끝내면서 행위를 시작함과 동시에, 기억해 내는 것이 꿈이다.

잠들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던 망념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는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므로) 휴식이 끝남과 동시에 기억에 남는 것이 꿈이다.

일념이 지속되면 꿈을 꿀수도 없는 시기가 오게되기에, 수행이 깊어진 수행자는 꿈을 꾸지 않는 이치와 같다.

 

생각의 누적된 기억이 마음이라는 것이다.

태교를 하듯이 좋은 생각과 좋은 음악, 그리고 좋은 말들을 들음으로서 마음은 고요해지며 평화를 느낀다.

마음은 생각으로 조절이 되는 것이기에 생각으로 마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화두를 드는 일념집중을 위한 수행의 뜻을 이해하기 바란다.

 

생각과 마음은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며, 둘이지만 둘이 아니다.

단지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음에 대해서만 이해를 하더라도, 기도나, 염불, 화두일념 수행의 목적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찰 벽화, 심우도의 내용이 생각의 이치를 알기 위해 화두하나 들고 자신과의 싸움을 표현하는 것임에 대해서 알면 다행이다.

화두를 들고 수행을 해본 사람들은 몇 개월 동안의 노력으로 심우도의 뜻을 헤아린다.

나이 60세가 넘은 여인이 화두를 들다가 심우도를 이해할 때, 그녀는 이미 마음의 고요함을 찾았으며 힘겹게 살아오는 동안의 가슴앓이와 속병들이 깨끗이 사라졌기에 항상 빙긋이 미소를 짓고 살아간다. 그 많던 약들을 다 버리고.

화두하나 지니고서,,,,,,

 

석가모니와 예수의 말이 종교에 의해 진리로 포장되었으나, 진리의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래전, 옛날의 원시시대 사람들에 의해 전해져온 말들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따질 일은 아니다.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인생의 정답을 찾아서 떠나는 여정,

위 없는 고귀한 길이 아니겠는가.

 

본래없는 이름지어 고통이라 말을하고

본래없는 이름지어 소멸이라 말을하네

본래없는 이름지어 공덕이라 말을하고

본래없는 이름지어 해탈이라 말을하네

인생살이 답없음은 본래없어 없음인데

날 모르는 부처들은

부처에게 설법하네

하심하라 부르짓네

마음을 어디에서 찾으려는가?

그대 안에 우주가 있거늘,,,,,,

말 변사랍니다.

부처님들이시여, 오해 마시길......

이해와 오해는 같은 말임도,,,,,,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