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념, 즉 한 생각이라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참으로 다양하다.
일념이라는 말과 "한 생각"이라는 말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또 다른 표현이 있다면 화두수행, 염불, 염송, 참선, 묵상, 기도 등의 정신적인 모든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다른 앎들과 같이 그져 그럴 것이다, 라는 앎, 지식은 쓸모없는 것이다.
이럴 것이다, 그럴 것이다 라는 앎은 내가 숨을 쉬거나 내가 생각한다는 앎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그릇된 앎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내가 생각한다"는 앎에 대한 당연함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한다.
인간의 생로병사에 따른 모든 고통은 "내가 생각한다"는 그릇된 앎이 원인이다.
이 말은 내가 생각한다.
내 마음이다.
내 생각이다.
내 몸이다. 라는 앎이 그릇된 앎이라는 뜻이지만 여기까지만 읽는다면 이상한 말로 오해하게 된다.
일념에 대해서 이해한다 함은 내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아는 앎과 같은 앎이기에 오해하는 것이다.
일념의 깨침은 무엇일까?
일념의 깨침 첫째는. 내 생각이, 내 생각이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림이다.
둘째는 일념집중을 통해서 마음이 생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앎이다.
일념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말은 문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며 글자를 아는 것일 뿐이니. 이해와 오해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일념이라는 글자, 한 생각이라는 글자와 그 뜻이 그럴 것이다, 라는 앎을 알아서 무엇에 쓸 것인가? 사실상 인간의 모든 앎이 그러하니 인생에 해답이 없는 것이다.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일념의 깨우침에 대해서 심우도에는 4단계의 견성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일념의 깨침이 있을때 비로소 참다운 앎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첫째 일념을 깨치기 위해서는 시계초침에 맞추어서라도 체험을 해봐야만 하며, 둘째 일념을 깨치기 위해서는 열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째 일념의 깨침에 다다르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아는 참다운 앎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생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참다운 앎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기억된 생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듣거나 글을 보거나, 생각하여 아는 앎은 참다운 앎이 아니다. 숙고하고 생각하여 아는 지식으로써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념중에 툭, 하고 일어나는 한 생각이 있다. "어? 마음이 생각에 불과한 것이네" 라는 알아차림. 그것이 초견성이며 일념의 깨침이며 두려움의 실체를 보는 참다운 앎이다.
2차 일념을 깨친 인물들은 카페의 어느 글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2차 일념을 깨친 이후부터 비로소 올바른 구도자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1차 일념, 2차 일념을 깨치지 못한다면 여전히 장님이다.
불교를 통해서 수행한다는 자들, 명상센타에서 공부한다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이런 글들이 우이독경이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그들에게 검증되지 않은 삶이니 살아갈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질 않겠는가?
우주보다 더 무한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이다.
그대의 참 자아를 회복하기 위한 길이다.
그대의 참 나,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