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서'라는 말은 몇 가지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라는 글자에 대한 한자의 뜻에는 '죽을 死' 자와 '스승 師' 자 등이 있으며, '서'자는 '글 書' 자로써 '죽은 사람의 글'이라는 뜻과 '스승의 글'이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사자의 서' 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말도 안되는 소리' 즉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사자의 서'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몸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 아니다. 종교적인 의미는 '환생이나 재생, 윤회, 왕생... 등의 죽은 후 3일만에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표현되면서 그들을 우상화 하기에 여념이 없으나... 인간 세상의 모든 말들이 그러 하듯이 근거가 없는 낭설이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옛 속담과 같은 말로써 사실무근인 말, 말, 말들이다.
소위 '사자의 서'라는 말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초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한글로써의 표현은 '도를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 되는 말로 이해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남겨져 있으며, '진리' 또는 '진리의 말씀' 등으로 표현 되는 것 같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볼때, 그들의 세계 즉 '인도네시아'에서는 '정신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자'들에 대해서 '살아 있는 신' 또는 '인격신' 등으로 표현되면서 신성화 되어 있는 것 같다.
석가모니의 말은 한글로는 '깨달음' "그것"에 대해서 '해탈'이라는 말, '심해탈'이라는 말 등으로 표현되며, 석가모니 스스로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말과 함께 '여래' 등으로 표현하였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로써 '세상에 나와 비견할 자는 없다'는 방식으로 '진리(올바른 앎, 참된 이치)를 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노자와 장자의 글에서는 '도와 하나된 사람' 또는 '도와 간격이 없는 사람' 등으로 표현되며, 죽음이 없는 사람, 죽을 수 없는 사람' '죽음으로도 위협할 수 없는 사람' '죽지 않는 사람' '물이나 불로써도 죽을 수 없는 사람' 등의 신비스러운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는 스스로 '나의 말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말로써 '하나님의 대변인'처럼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는 '네 안에 있다'는 방식으로 답변했다고 한다. 종교는 그를 '구원자' 또는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것 같다.
어떻게 표현하든지 상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말은 시대나 조건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는 어떤 부분적인 공통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던 시대와 상황 조건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 표현 되는 언어가 다를 뿐, 똑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사자의 서'라는 말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호흡이 멈추거나 맥박이 없음에 대해서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이란 비단 육체의 죽음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아상' 즉 '나라는 생각'이 '죽는 것', '사라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나라는 생각'의 죽음. '육체가 나라는 생각의 죽음'이 사실적인 죽음이라는 뜻이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다. 하지만 현 시대에는 이런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며, 일념법. 일념명상법 이라는 수행방법으로써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지적으로나마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말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도가의 일념법 강좌'를 통해서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도가의 화원'의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이해의 정도는 미미하겠지만...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환상이 아니라... 사실적인 이해가 다가올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것들이 아니라, 그들의 말 즉 한글로 표현되는 '도를 깨달은 자'들의 말은 다소 현학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겠지만... 환상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적인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실적인 말'이라는 말의 뜻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말, 또는 이사람의 말은 인간들의 자기주장과 같이 자기만의 지식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서 백골이 진토된 인간들, 즉 인간의 죽은 조상들의 '유언(侑言)'과 다르지 않은 말들이라는 것이다. 그대의 조상의 간절한 유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대에게 그만큼 큰 이익이 따르기 때문이다.
'유언'이라는 낱말 또한 한자의 뜻으로써는 여러가지로 표현되는데... '생각할 유' 그리고 '끼칠 유, 오직 유, 용서할 유' 등이 있다. 그져 '조상의 유언'이라는 말로 이해 하는 편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죽은 자이며,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들은 누구나 '예수가 인간들을 길잃은 어린 양에 비유'하는 것과 같이,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행복이나 평화를 위한 길이 아니라 스스로 고통을 겪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천태만상이다.
천가지 형태와 만 가지의 모양,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보이거나... 인간의 내면, 즉 개개인의 마음 속은 항상 좌불안석이라는 말과 같이 갈등의 연속이며, 한시도 마음이 편안할 날이 없다. 아니. 사실은 마음이 편안한 날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말 또한 이해 할 수 없다. 다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만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절대적으로 감성적일 수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이성적일 수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선함일 수도 없으며, 절대적인 악함일 수도 없다.
절대적인 사랑도 없으며, 절대적인 증오도 없다.
죽는 날까지 더 좋은 것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지만... 절대적으로 좋은 것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나쁜 것도 없다.
근심걱정, 번뇌망상은 끊일 날이 없다.
물론 근심 걱정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생에 해답, 정답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관념이란... '내 몸'이라고 아는 앎, '내마음'이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의심조차 해 볼 수 없으며, '내 생각'이라는 생각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해 볼만한 여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근심 걱정,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서 인생사, 세상사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에 속아서 죽음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 인간들의 인생이라는 삶이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 누구나 사람이 왜 사람인 것인지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의 기원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차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 세상에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다.
이런 사살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사람들... 그들이 소위 '도를 깨달은 자'들이며, '사자의 서'를 쓴 사람들, 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말이 진리인 까닭은 기원전 6세기 경의 인물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석가모니'의 말과 '노자'의 말이 똑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듯이... 그리고 기원전 3세기 경의 인물이라는 '장자'의 말과 기원 후 1세기 경의 인물이라는 예수의 말이 같은 듯의 다른 표현이듯이... 그리고 불과 100여년 전의 인물로써 '라마나-마하리쉬'라는 '인도의 성자'라는 인물의 말이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듯이... 지금 이곳에 설명되는 말들 또한 사용되는 언어가 다를 뿐, 그들의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듯이... 지금 이사람이 그들의 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 하듯이... 즉 '사자의 서'를 남겼던 인물들의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이며, 진리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말은 그들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 모든 인간들의 행복한 삶, 자유로운 삶,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다.
그들의 모습이 남루한 차림세와 함께 비천해 보이거나 가난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남들에게 보여야 할 '나'가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육체가 나다, 라는 집착, 착각, 고정관념, 높고 험난하다는 업(嶪)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석가모니의 말은 '원리전도몽상'에서 깨어남'으로 표현되며, 예수의 말은 '어린아이의 순수의식으로 깨어남'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예수의 말 중에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이 네 안에 있으며, 너희가 깨어나는 날... '몸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그들의 말은 아득한 옛날이나 지금 현 시대거나... 모두가 진리이며, 방편설들로써 모든 인간들에게 이익 되는 말들이다.
이곳의 글들은 출판된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라는 착과 "비밀의 언어"라는 책에 대한 부연 설명들이며, 더 나아가 인간들이 서로가 화합하여 평화로울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한 방편설들과 함께 인간 생명체에 나타나는 각종 다양한 불치병이나 난치병 등의 모든 질병들에 대한 원인과 치유 방법 까지도 설명된다는 것이다.
현 세상에 오직 도가에서만 제공 할 수 있는 "도가의 선식. 도가의 약식" 또한 인간 생명체의 근본원인에 바탕을 둔 것으로써 모든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어떤 상술로써 욕망을 채우기 위한 상품으로 제조된 것이 아니며, 시중에 광고 하거나, 시판되는 것이 아니라, 인연 있는 사람들만이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백천만겁 난조우라는 말과 같이 귀한 인연 있는 이들만이 얻을 수 있겠지만...
지성체의 모든 주장들은 유명무실한, 사실 무근인 주장들일 뿐 해답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주장이니 해답이나 정답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사자의 서'를 쓰는 사람들의 주장은 해결방법이 없는 주장이 아니라, 전식자(全識自)라는 말과 같이 모든 것의 근원을 아는 앎에 바탕을 둔 말로써... 인간사 세상사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과 함께 이치에 어긋날 수 없는 분명한 해법(해결방법)을 說(言, 書)한다는 것이다.
인연 있는 이여. 들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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