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깨달음. 해탈. 삼매. 적정열반. 성령. 불성. 순수의식. 본래성품. 무위자연. 자유. 우주. 진아. 참나...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말들...
문화와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더 많아지는 것들. 그것들은 다른 것이 아나라 말, 말, 말들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어 속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려고 하는데, 그것의 다른 이름, 말들이 자유와 평화로운 삶이며, 행복이다.
언어 속에서 다른 언어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현주소가 인종갈등과 같은 인간과 인간들간의 치열한 전쟁이다. 인간이 인간과 인간들끼리...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들.
그 역사들...
수레바퀴와 같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상이 곧 인간 세상의 윤회이며, 역사의 윤회이다. 그것의 근원은 제각기 '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의 윤회가 원인이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이루는 사람들, 개개인의 생각의 윤회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인간세상의 고통을 야기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생각의 윤회, 라는 말. 이런 말들 또한 하근기 중생이 들으면 크게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말이다. 사실 하근기 중생들 뿐만이 아니라,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을 깨닫지 못하거나, 또는 이곳의 글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중생들 모두가 함께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에서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이지만,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윤회, 생각의 원리, 생각의 이치와 속성' 이라는 말에 대해서 전에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말은 인간세상에서는 전에 없던 말이다.
사실 '생각의 원리, 생각의 윤회'라는 말은 인간세상에서는 전에 들어볼 수 없는 말이며, 오직 이곳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며, 도, 깨달음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말이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도' 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도'의 실마리가 있다면... '언어도단, 불립문자'라는 말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하는 것이다. 불립문자. 언어도단. 본래무일물 등의 말은 사실 '언어 없음' 이라는 말과 과 같은 뜻으로써 그 말이... '불립문자, 언어도단'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예수를 숭배하는 자들의 '방언' 또한 이런 말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진 인류의 총체적 무지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의 산물의 표본이다.
'도' 라는 말을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일념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앎은 타인으로부터 들어서 아는 앎이며, 언어의 유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일념법. 일념명상법은 그런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이해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종간의 갈등이나, 국가간의 전쟁들, 영원한 빈곤층들, 인간들간의 끊임없는 경쟁들... 그리고 인위에 의한 참사, 자연재해... 등은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류의 윤회현상이며, 우주자연의 이치이다.
현상세계에 일어나는 일들....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 무엇이 가장 시급한 일이며,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일까?
사실 그대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인간들이 해결할 수 있는 일 또한 아무것도 없다. 그져 지켜 보면서 서로가 자기만을 주장하는 것들이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주가 멸망하든, 지구가 사라지든...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다.
남 걱정 할 일도 아니며, 세상을 걱정할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걱정해서 해결될 일은 없기 때문이며, 사실상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 자신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그것이 모든 인간들의 삶의 목적이며 존재의 이유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그대 자신의 건강한 몸과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마음이라야 한다는 뜻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지만... 욕망에 차서 올바르게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늙거나, 병들거나, 병이 깊어진 후에야 비로소 한탄할 것이다. 무한한 어리석음이다.
병든 노인들을 보면서도,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 모습이 곧, 얼마 후의 자신의 현실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 모습들과 나와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주장하겠지만.. 지금 그 사람들 또한 그대와 똑 같은 생각으로, 느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불교라는 종교가 있다. 사실 석가모니의 입장에서 본다면... 종교라는 것들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물론 예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 알았던 인물들이... 중생들에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전하고자 했던 말이 경전나부랭이들로 왜곡되면서 우상숭배사상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 카페의 글들... 모두가 그들 가르침의 핵심, 요지를 설명하는 것이며, 방편들로써 현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서 더 자세히, 분명히, 명백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하근기 중생견으로써는 크게 웃어버릴 수밖에 없을 만큼... 말은 같은 말이지만 그 뜻이 깊고 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천만겁 난조우의 인연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불교 교의의 마지막 구절이 '적정열반'이라는 말이다.
적정이라는 말은 '고요할 적' 과 '고요할 정' 으로써 '고요하고 고요한 고요함의 경지' 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리고 '삼매'라는 낱말에 대한 한자 그대로의 뜻이 '세벽 세시 경'으로써 또한 '고요함'을 표현 하는 말이다. 사실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 '고요함'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단 한순간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 '고요함의 경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삼매'상태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말, 말, 말에 집착할 뿐,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의 윤회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런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탓이 아니라, 신의 뜻이라고 해 둘 수밖에 없다. 일념법을 모르는 한...
'진리갈급'이라는 초보수행자가 일념법강좌와 더불어 일념법 실천 교육 중에서 큰것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 소위 불가에서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이 참선수행 하는 중생들에게 알음알이 상을 내기 위해서 하는 말재간들 중 하나가 - 한 소식을 일러라- 라는 말이다. 인간 관념으로써는 이해가 불가능 한 말이지만... 일념법을 실천, 실행하면서 그 뜻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진리갈급이라는 수행자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과는 연관 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온 후라서 계곡물 소리가 요란하다.
도가의 '화원'의 교육프로그램에서 제공되는 구절들, 그 구절들에 정신집중을 유도하는 시간이 있다. 길을 걸으면서 그 구절들을 암기, 암송으로써 주력, 즉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하나 예를 든다면, '나는 나가 아니다, 나는 나라는 생각이다, 생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라는 방식의 구절 들이다.
한시간 쯤 걸은 뒤. 수행자가 하는 말.
계곡물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느 순간... 그 한구절에 깊이 몰입되면서 계곡물 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경험했단다. 단지 몇 초에 불과한 시간동안이다. 그 시간 동안이 곧 삼매이며, 열반적정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지극히 고요함' 의 상태이다.
지식으로써 이해 할 수 있는 삼매란 독서삼매라는 말과 같이 어떤 상황에 집중되거나 경치에 몰입됨 등의 사건과 같이 어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잠시 정신을 빼앗긴다거나, 마음을 뺏긴다거나... 등으로 이해 하는 것이다.
찰나지간이나마 일념문구에 몰입되면서 그 시끄럽게 이어지는 계곡물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은 단지 그 물소리 뿐만이 아니라, 보되 본바 없는 것이며, 듣되 들은 바 없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된 바 있는... '행위하되 행위자가 없는 행위'를 일컷는 말이다. 사실 찰나지간이나마 '무위의 경험'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이 지적 호기심이든, 아니면 진리 갈급이든, 아니면 '하나님 말씀'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한 수단이든, 도를 깨닫기 위한 행위이든... 상관 없는 일이지만 사실상 자신의 생각의 윤회현상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실 그것이 도의 삶의 시작이며, 진리의 길이며, 자연과 같은 건강함과 함께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의 기초단계에 대한 이해이다.
이에 대한 '진리갈급' 이라는 수행자의 의문.
그렇다면 '내가 일념문구에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계곡물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라면, 그런 집중상태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라는 것이다. 그나마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라는 책을 다섯차례 정독 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말.. 그 '말씀'이라는 말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다른 말, 말, 말들을 찾아 헤매는 것들이 소위 수행자라는 중생들이다. 불교 또한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 집착하지만,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조차 불가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은 세상 모든 인간들이 말, 말, 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법에 걸린 것이다.
근거, 근본원인이 없는 말, 말, 말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나다, 는 말은 사실적인 말인 것 같지만... 근거 없는 말이며, 사실적인 말이 아니다.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 누군가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이런 글을 보면서도... 큰소리로 웃어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크게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인간들은... 보되 본바 없다. 눈이 있으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귀가 있으되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짐승보다 더 뛰어날 것이 없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크게 웃어버리는 중생에 대해서 하근기 중생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감히 웃을 수 없는 사람들, 지적으로나마 옳바른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한 사람들... 그들이 곧 '도'의 실마리를 찾은 사람들이다.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다.
인간은 마법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있다'는 '마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있다는 말과 내가 없다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며, 상대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분별이다. '내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아닐까? 허헛.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모두 상대적인 말이다.
아니 그런가?
인간은 '언어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언어의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어의 기원에는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언어의 기원이라는 말도 언어이다.
언어가 없다는 말도 언어이다.
언어의 함정이라는 말도 언어이다.
언어의 굴레라는 말도 언어이다.
'도' 라는 말도 언어이며, '깨달음'이라는 말도 언어이며, '삼매'라는 말도 언어이며, '해탈'이라는 말도 언어이다. '성령'이라는 말도 언어이며, 불성이라는 말도 언어이며, 부처라는 말도 언어이다.
그런데... '참다운 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그 말 또한 언어이다.
인간이 언어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은 '내가 있다(아상), 내가 사람이다(인상), 내가 나이를 먹었다(수자상), 내가 중생이다(중생상)... 등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말의 '상'이라는 글자가 '생각할 상' 자이다.
석가모니는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이 있으면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라는 '금강경 사구게'와 같이 현상계의 형상들이나, 소리나 음성으로써도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전자는 '생각'이 있으면, 생각으로써는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뜻이며, 후자는 말(언어)로써는, 말이 있으면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생각과 언어, 언어와 생각으로써는 '여래'를 볼 수 없다- 는 말이다.
언어 즉 말과 생각으로써는 '도'를 볼 수 없다는 말이며,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며, 불성을 볼 수 없다는 말이며, 성령을 볼 수 없다는 말이며, 순수의식을 볼 수 없다는 말이며, 그대의 진정한 나, 여래, 본래성품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적정열반. 고요함의 경지... 인간의 관념을 초월한 말들이다.
오직 일념법 명상으로써 깨달아 알았을때, 그때 비로소 지적으로나마 이해가 가능한 말들이다.
그것에 대해서 마음과 육체를 넘어선 '나' 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과 육체가 '나'라고 아는 앎, 그 앎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아닌 나'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평화... 오직 그 길, 진리의 길에서 볼 수 있기 있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