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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열풍의 그 허구 - 위르겐-하버마스 / 미셀-푸코의 통합적 사회구성에 대한 사고방식

일념법진원 2014. 9. 5. 06:39

인문학의 열풍... 자주 학자들의 지식언어는  사람들의 삶의 핵심에서 만들어내는 문제라는 것의 제기와 그것에 대한  답변을 찾기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 문제라는 것....있다면 있는 것이어서 사회현상을 바라보는데는 이 문제라는 것의 있음은 공히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 마음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그 근원에서 확인하지 않는 선상에서는 이 세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때문이며 다양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겪는 일은 원리나 원칙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너무도 다른 경험을 하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통합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건, 사회가 보다 복잡한 메커니즘의 지형속에서 오리무중으로 지속적으로 변화의 선상에 있다고 보건 이견이 없는 문제의 인식...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는 학자들의 지식언어들간에 쟁점이 된다.

 

소위 근대성 이라는 단어, 개념, 실체... 논쟁의 지점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들이 각축한다. 지식, 권력, 민중, 삶의 질, 평등, 자유, 연대, 발전, 지속가능한 개발, 질병, 폭력, 여성, 성, 장애, 빈곤, 복지..... 등등...  사람들이 언어로 만들어낸 사람간, 사람과 자연간, 국가간, 민족간....수많은 가치들의 분배가 어떻게, 왜 불평등하며,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 라는 것의 해답찾기는 같은 맥락에서 인문학의 열풍속에서도 주변적 관심거리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사안들에 대해서 민감할 수 밖에 없으며  소위 전문가라 불리는 지식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자신을 대변해주는 언어(방법)을 찾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지식언어의 생산을 통해 사람들의 욕망, 입장 등이 일반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문제의 인식과 함께 하는 지식언어의 논쟁은 사람들의 구체화되지 않은 욕망과 함께 한다.

 

사람들의 마음, 생각, 언어는 항상 이미 형성된 기존 언어의 반영을 토대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의 언어로는 모호한, 명확한 언어로 구성되기 전의 느낌이나 감정,보다 구체적으로는 의견과 같은 것들이 학자적 지식언어를 통해 보다 분명한 것으로 드러나곤 한다. 즉 사람들의  있음직한 욕망을 분명하게 있게 하는 것으로 학자들의 지식언어가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식의 권위, 혹은 파워는 바로 사람들의 이러한 욕망을 토대로 형성되고 사람들은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언어로 각색된 자신의 정체성, 나라는 생각의 범위들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지식언어의  생산의 배경하에서 아래의 학자들이 추구하는 논리, 그들의 논쟁 지점을 간략하게 살펴 보자. 

 

 

위르게 하버마스는 "근대성"의 논의 안에서 명색이 의사소통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성의 한계들의 극복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일반성, 보편성, 본질론,.... 등등의 용어로 맹렬한 비판을 받으면서 결국 근대의 합리성의 발전논리가 어떻게 인간간의 소외의 문제를 낳고 자연을 파괴해 왔으면 국가와 국가간의 불평등을 야기시켜왔는지에 대한 것들과  철저히 대면한다.

 

그의합리성에 대한 성찰로서 새로운 합리성은 그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합리성의 개념의 변형으로 원칙을 다원화 유연스럽게 하면서 원칙을 폐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사회정의의 완전한 폐기보다는 보다 느슨한 형태의 정의의 개념을 유지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지극히 단순화 시킨 감이 있지만 크게 보면. 아마 이런 입장이 하버마스 합리성 이론류에 합류하는 지식언어들 인것 같다. 하버마스는 합리성이라는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여전한 신뢰를 보여준다.

 

 

반면 명색이 탈근대를 논의하는 측이 미쉘 푸코 등의 부류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근대성, 합리성 이론의 토대인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통해 철저하게 근대성, 합리성의 문제를 파헤친다. 이성이 해온 역할도 문제이지만 합리성의 개념하에 묶여진 사회라는 것이,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그렇게 일반적,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존재의 다양성에 주목한다. 

 

누가 옳으며 누가 그른가?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러한 의문은 푸코가 합리성을 배격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푸코는 권력은 지식, 즉 담론(언어, 생각)의 힘으로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것으로 언어의 힘에 의해 언제든지 위치변경이 되는 것이다. 권력은 계급이나 개인, 혹은 국가가 직접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참도 거짓도 아니면서 참 행세를 하는 담론, 즉 언어의 힘을 통해서 발현되기 때문에 누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어떻게 새롭게 생산해 내느냐에 따라서 기존의 권력지형이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푸코에게 "사회정의" 라는 것은 애초 없는 것이다. 담론, 언어의 힘에 의해 그것을 사실화 할 뿐인 것이다. 만약에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으로서 그에게 해결점이 있다면 작은 이야기들, 다양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이 조우하는 다양한 문제들 앞에서 사안에 따라 그때그때 연대하고 헤어지는, 그럼으로써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일 것이다.

 

주변인 혹은 소외등의 개념으로 자신을 묶는 사람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이 두 입장에서 장단점 모두를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이 상대적 언어 안에서 구성되어있다보니  이렇게 보면 이것이 옮은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것이 옮은 것 같고..... 원래 언어가 그런 것이기에 논쟁은 끝이 없는 것이다.

 

새로운 합리성의 적용과 합리성의 원칙의 포기...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언어 안이기 때문에 새로운 합리성의 적용과 합리성의 원칙의 포기는 여전히 자신의 견해에서 가치/  옳음 /선 이라는 이분법적인 상대적 언어의 문제를 극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이다. 문제는 이것이 문제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피해갈 수 없다는 것에 있다는 것.... 답이 없는 이유이다. 상대성과 옮음 확인의 원천,

바로 자신의 "나" 의 존재성에 대한 무지가 답이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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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 소위 지식층들... 그들의 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논쟁들... 그들의 난해하고 복잡 다양한 말, 말, 말들... 그 말들속에서 다시 다른 말들로써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이 나라의 학지들, 인문학의 대가라는 사람들... 그들의 tv 강연들.... 그들의 말재간에 빠져드는 사람들. 그들은 또 하나의 다른 사치스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놀이문화와 다르지 않은 헤괴한 방법이며, 게임중독에 빠지는 아아들과 같은 것들이며, 술주정꾼들의 말재간과 같은 언술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들의 말을 보면, 한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허접한 것들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과 같이. 어떤 무식한 자가 학자들을 무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의 제각각의 주장들은 말만 무성할 뿐, 그 말에는 근거가 없는 말이며,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이 글을 시작한 것이다. 

 

지식인, 학자, 박사들...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지식으로써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주장을 하겠지만, 그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리라.   

 

 

옛날, 아주 옛날. 책들을 모두 불태워버린 임금이 있었단다. 탁상공론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왕보다 지식이 더 많은 사람들의 논란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들의 앎이 이토록 무모한 것들이다. 하지만 모은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며, '인생에 딱히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지만, 인간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인식하므로써 서로가 '유구무언'을 약속한 탓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서로가 잘났다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으면서, 말재간을 부리는 것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옛말에 모르면, 가많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상 그 말은 '침묵이 금이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써 '올바른 앎일 때'에는 인간들의 서로가 잘난체 하는 주장들에 대해서 유구무언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근본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말, 말, 말들로써 서로간의 주장만 난무하기 때문이다.  

 

 

위의 세계 인문학의 거장이라는 두 인물에 대한 요약 내용은  '도가의 화원'이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대학에서. 여성학 강의 준비를 위해서 골머리를 썩혀가면서 원문을 보고 해석해야 했던 서적들... 지금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위한 불쏘시개로 사용되고 있는 책들이지만... 그 책의 저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고급 언어를 사용했던 인물들이 소위, 위르겐-하버마스와 '미셀-푸코'란다. 

 

언젠가. '미셀-푸코'와 '락캉'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한 적이 있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카페의 글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인간세상의 지식들, 이제 모두 버려져야만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에 바탕을 둔 언어로써는 올바른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사회통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금, 아주 조금이나마 사회통합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니 그들. 학자들은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지만, 주장들만 무성할 뿐, 여전히 해답은 없다. 사실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언어가 상대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인물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며, 기초상식에 해당하는 것으로써의 보편타당한 앎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도'를 이해 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한다는 것이며, 생각의 원리를 이해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인생의 해답을 찾는 것이며, 자아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다.  

 

사실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대단한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 조차 망각한 것이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말, 말, 말들로써 자신의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방식으로 자신을 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들일 뿐, 사실은 버려져야할 쓰레기들이다.

이곳 카페의 덧글들에는 소위 '의학박사'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쓰레기', '권위를 내세우는 자들'이라는 방식의 욕설 같지만 욕설이 아닌 진실된 말들이 있다. 그들은 '도가의 조언과 함께, 도가의 약식으로써 불치병, 난치병이라는 질병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현실을 경험 했기 때문이며, 무위자연의 원리에 따른 이치를 이해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은 단지 지식인들 뿐만이 아니라, 지식의 총체적인 무지를 밝히기 위한 말이며,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 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말이며, 주장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둔 말들이다. 

 

 

이런 말들에 대해서 이해 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바 아니다. '도'를 이해 한다는 것은 지식의 무지를 보는 것이다. 비난하기 전에... 인류의 역사는 기록으로 보다라도 수천수만년이라는 사실. 수천수만년 동안이지만 인간세상이 평화로운 적은 단 한시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식한다면, 이제라도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 인간세상은 평화로울 수 없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실 수천수만년 역사이래 현시대만큼 '도'를 이해 했던 인물들이 있던 시대는 없었다. 소위 철학자로 알려진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기원전 6세기 경에 했던 말이 기록으로 전해져 온다. 그가 했다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모르는 지식인은 없다. 노장사상으로 알려진 '노자' 또한 그 시대 인물이며, 졸지에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우상화가 되어버린 '싯다르타 고타마' 역시 기원전 6세기 인물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언어가 다를 뿐, 모두가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이 또한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라 그들의 말의 해석을 통한 사실에 바탕을 둔 말이며 사실적인 말이다.

 

 

하버드대학의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 라는 제목의 강의가 지난 20여년간 하버드 대 수강 학생수가 14000명이며, 한학기에 11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EBS 교육방송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내용이라는데. 

 

일념을 깨달아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강론들이 말을 배우는 아이들의 재롱쯤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에 '마이클 셑댈'의 강의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하겠지만. 

 

 

사실 사람들은 '정의'를 외치지만 정작 '정의'라는 말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라는 말, 말, 말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추상적으로 다른 말을 지어내서 '정의'라는 추상적인 말에 대해서 자신의 기억된 생각들을 조합하여 추상적인 말들로써 합리화 시키려고 노력한다. 헛짓이다. 왜냐하면 인간 관념으로써는 '정의'라는 말의 본래의 뜻 조차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정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의식'이라는 말과 '정의' 라는 낱말이 모순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조차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正義' 라는 말의 한자의 뜻을 보니. '바를 정' 자와 '옳을 의' 자이다. 그리고 '의식'이라는 낱말의 한자의 표기는 '意識'으로써 '뜻 의' 자와 '앎 식'자이다. 

 

'정의'라는 말은 '옳은 것' 이 있기 때문에 그 옳은 것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 것이며, 무엇이 옳지 않은 것일까? '의식'이라는 낱말은 '앎은 앎인데, 뜻'에 대한 앎이다. 어떤 뜻에 대한 앎을 이르는 말일까? 

그렇다. 언어, 말, 말, 말을 아는 것이 의식이며, 언어에 대해서 올바르게 앎으로서 언어를 세우는 것이 '정의'이다. 

 

 

중요한 것은 '정의'라는 말을 누구의 입장에서 '정의'를 주장해야 하는 것일까? 

가령 그대가 남자라면, 남자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것이 정의이며, 그대가 여자라면 여자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그대가 선생이라면 선생의 입장에서의 주장이 정의이며, 그대가 학생이라면 학생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것이 정의이다. 공산주의 입장에서 보면 공산주의의 주장이 정의이며, 자유주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주의가 정의이다. 전쟁터에서는 서로가 정의이며, 인간들의 삶 역시 오직 자기가 정의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선함의 입장에서 보면 선함이 옳은 것 같지만, 악함의 입장에서 보면, 악함이 정의이다. 누가 선한 사람이며, 누가 악한 사람인가? 과연 어디에 가까운 것이 정의이며, 어디에 가까운 것이 불정의 인가? 개개인의 욕망은 어쩌란 말인가? 누구의 욕망은 정의이며, 다른 사람의 욕망은 정의가 아니란 말인가? 말은 말이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가 정의라는 말이다.

 

만약에 다수결의 원칙이 정의라면... 그 원칙을 따르는 것이 정의이다. 다수결의 원칙이 정의라면, 대통령의 말이 정의가 되는 시대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들과 대통령 중에 누구의 주장이 정의이겠는가?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에 여전히 국민의 뜻이 정의일까? 아니면, 국민이 다수결로 정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정의일까?

 

만약에 정의를 주장하려 한다면, 최소한 국민이 다수결로 선출한 대통령의 말을 모두 따라야 하는 것이 진정한 정의 일 수 있다는 뜻이다. 사소한 일들 중에서 단지 하나의 비유를 든 것이다. 만약에 무식한 자가 따로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 '대통령'에게 무지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며, 대통령에게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자들이다.

 

정의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는 논란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의라는 말 또한 상대적인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왜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무지에 빠져 있다. 그져 다른 사람들이 '내가 사람이다'라고 하니. '나도 사람이다'고 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 하니, 나도 두려워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장엘 가니, 나도 따라간다는 방식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면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가?

 

허헛.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내가 사람이다'는 말 또한 사람들의 '내가 '정의'다'라고 주장하는 말들과 같이 근거가 없는 말 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글을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웃어버릴 수밖에 없겠지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낯선 말도 아니며, 생소한 말도 아니며, 보편타당한 말로 여길 것이다. 알고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보면 단순한, 아주 단순한 말이다.

진리는 단순하다는 말과 같이 너무나도 단순한 말이다.

인문학 강좌와 같이 복잡하거나 어지러운 말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가 가능한 단순한 말이기 때문이다. 

 

너무 깊이 생각하려 하지 말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져 말을 말 그대로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물론 이런 말은 일념을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일념을 깨달은 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누군가가 그대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네' 라고 대답한다.  

이름을 부를때는, 그대의 이름이 그대 자신이 된다.

그리고 그 이름은 그대가 지은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지어준 것이다. 

그대는 그 이름을 누가 지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지어준 것인지, 아빠가 지어준 것인지. 

할아버지가 지어준 것인지. 작명소에서 지어진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엄마에게 물어보든지, 아바에게 물어보든지... 물어 봐야만 알겠지만, 그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만약에 그대가 그대의 이름을 짓던 그날에 대해서 기억(경험)할 수 있었다면... 굳이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대의 생년월시 또한 그러하다. 

 

그대는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으며, 내 나이가 몇살이며, 내가 여자거나 남자'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내가 안다, 내가 경험했다'는 듯이, 그런 방식으로 주장한다. 그런 사건들은 그대가 스스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것에 대해서 기억(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타인들의 말에 대해서 경험했다고 생각,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런데 그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앎, 주장하는 일 또한 그와 같다.

그대의 '내가 여자다'는 앎이나, '내가 남자다'는 앎 또한 그대의 이름이나 생년월시와 같이 그대가 '오늘 아침의 일을 저녁에 기억하는 것과 같이 '경험한 사실'에 대해서 기억(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수 없는 시절에 누군가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며, 그것들에 대해서 거부감 없이 사실이라고 생각(착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어린아이에게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없다. 

그대가 그 시절에 '내가 여자다'거나 '내가 남자다'는 생각이 없었듯이,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도 없었다는 말이다.

강아지 또한 그러하다.

강아지에게는 '내가 강아지'라는 주체의식이 없다.

강아지가 커서 성체가 되더라도 그것들에게는 '내가 개다' 라는 고정관념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대는 '내가 사람이다'는 고정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생각은 생각인데,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생각이 '고정관념'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이다. 

'관념'이라는 말은 '볼 관' 자와 '생각 념'자로써 보고 느끼는 생각이라는 뜻이다. 

 

 

사실 '내가 있다'는 말과 '내가 없다'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사실 '내가 있다'는 말과 '내가 없다'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사실 '내가 있다'는 말과 '내가 없다'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사실 '내가 있다'는 말과 '내가 없다'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그리고 상대적인 것들은 주체가 사라짐과 동시에 대상도 사라진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손뼉이 마주쳐야만 소리가 난다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손이 두개이기 때문에 마주쳐서 나는 소리가 손뼉소리이다. 손 하나가 없다면, 그 소리는 생겨날 수 없다는 방식의 가장 단순한 이치이다. 

 

 

언어는 '내가 있다'는 말에서 부터 시작된다. 

언어는 '내가 있다'는 말에서 부터 시작된다.

언어는 '내가 있다'는 말에서 부터 시작된다.

 

'내가 없다'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없다는 말 또한 내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없다'고 가정해 볼 수는 있다. '내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너'가 없으며,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대상들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경험의 오류'라고 했다. 

 

사람들 누구나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말, 뜻, 생각, 느낌)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앎은 경험에 대해서 기억하는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무의식, 잠재의식, 순수의식서)에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생각(오인)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대에게는 너무나도 사실적인 현상계가 있으며, 그것을 경험한다. 그런데 정작 그 경험자 자체는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것'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모든 사람들의 '내가 있다'는 앎이 자신 스스로의 경험에 의한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기억할 수 없는 시절에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앎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근거가 없다. '내가 사람이다'는 말에도 근가가 없다는 뜻이다. 겨우 근거가 있다면,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이 근거이다. 

 

그것이 사실적인 근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다시 말을 바꾸어서 '너는 본래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한다면... 그대는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아마 그대의 할아버지가 '너는 본래 사람이 아니거든' 이라고 한다면... 그대는. 할아버지 치매걸렸다고 걱정할 것이다.

허헛. 그렇지 않은까?    

 

 

 

개개인의 인생에 대한 뚜렷한 해답이 없는 이유이며, 사회 통합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사고방식의 바탕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기억할 수 없는 시절에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에 대해서 사실이라고 인식하는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 이라는 앎(말, 뜻, 지식) 자체가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식해야만 한다. 

 

인간세상이 말세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리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인간이 아니다. 

본래 사람이 아닌데, 사회적 동물로 세뇌 당한 것이다. 

만약에 인간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이제라도 그릇된 앎에서 벗어나야 하며, 사고방식이 바뀌어 져야 한다. 그대가 지성인이라면,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식할 때, 그때 비로소 '정의'가 무엇인지,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런 사실에 바탕을 둔 교육이 이루어 져야 한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 대해서 '나'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대의 이름도 나가 아니며, 그대의 마음도 나가 아니며, 그대의 감정도 나가 아니며, 그대의 몸 조차도 본래의 나가 아니다. 

 

나의 몸이라고 한다. 

나의 마음이라고 한다.

나의 감정, 느낌이라고 한다.  

나의 컴퓨터라고 한다. 

나의 집이라고 한다. 

나의 자동차라고 한다. 

 

지금 그대는 똑 같은 '나의 것'들이지만 어떤 것(몸, 마음, 생각, 느낌, 감정)은 '자신과 동일시' 하며, 어떤 것(컴퓨터, 자동차, 집 등)은 '나'의 것이지만, '나'와 동일시 하지 않는다. 

모순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것들(몸, 마음, 감정, 컴퓨터, 자동차, 집.. 등)은 그대의 '나' 도 아니며, 그대의 '내것' 도 아니며, 그대의 '나와 비슷한 것' 들도 아니다. 

 

'마음과 현상계'를 초월한 그대의 '나'가 있다.

'마음과 현상계'를 초월한 그대의 '나'가 있다.

'마음과 현상계'를 초월한 그대의 '나'가 있다. 

 

그 '나'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 '나'를 찾는 길, 방법이 곧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다. 

 

그 '나'의 말을 들으라. 

듣고 옳거든 그 길을 가라.

듣고 옳거든 그 길을 가라.

현 세상에서는 오직 그 '나'의 말 만이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자유와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