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나다.
나는 절대로 남들과 같을 수 없으며, 나는 절대 남들과 다를 수 없다.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없으며, 내가 남을 대신해 줄 수도 없다.
나는 절대 나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남들 또한 절대로 나만큼 나를 사랑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실존'이다- 는 주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철학이라는 무지의 산물이다.
그런 연유에 의해서 '자존심'이라는 말이 창조된다.
그런 연유에 의해서 '감정의 동물'이라는 말이 창조된다.
철학은 '내가 있다'는 (생대적인)주장이 생겨난 이후부터 서로 화합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의 동물'이라고 단정 짓게 된 것이며,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조율하기 위해서 재 창조된 말이 '이성理性'이라는 말이다. '다스릴 리' 자와 '성품 성' 자로써 마음의 다른 표현인 성품이나 성격을 다스릴 수도 있다는 뜻의 '이성'이다. 누구나 감정의 동물이지만, 감정을 다스릴 수도 있으며, 다스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 옳은 말인 것 같지만 일관성이 없는 말이다.
감정이 우선인가? 이성이 우선인가? 에 대한 토론은 토론이 아니라 끊임없는 논란일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있다'는 앎(말, 인식, 뜻) 자체가 상대적인 말로써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이 생겨나기 이전에 철학자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창조된 말이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라는 말은,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고방식이 있음을 전제하는 말이다. 경험 이전의 '무엇'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오직 경험된 생각으로써 살아가야만 한다.
다른 방법이란 없다. '불가능한 것이다' 라는 방식으로 스스로 세뇌 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세뇌 시키게 된 것이 '철학'이라는 학문의 무지에 바탕을 둔 오류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경험에 바탕을 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지만 사실은 억지 주장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 있다면, 분명히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고방식 또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 있다는 뜻이다. 만약에 철학이라는 학문이 그런 사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면,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라고 단정 짓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생각하기를. 다만, 우리는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지만 경험 이전의 사고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말자' 라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 했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모르니, 신의 뜻으로 여긴다면... 모두가 오직 신의 뜻으로 여긴다면, 그나마 조금은 더 평화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철학'이라는 학문이 그런 사고방식으로써 인류의 교육의 바탕이 되었더라면, 현 시대와 같이 인간이 인간을 반려자로 삼아 살지 못하고 짐승들을 반려자로 삼는 헤괴한 짓들까지 생겨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류는 뭔가 인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착각이다. 사실 인간이면서 인류를 위해서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다보니,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는 것 뿐이다. 어쨋거나 인류가 원하는 것이 발전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인류의 역사이래 최고로 발전된 시대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인류의 발전 따위에 관심을 두는 인간은 없다. 다만 그런 명분을 앞세워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는것이며, 행복이 무엇인지, 평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채 병들고, 늙고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 사람들 모두의 가장 최후의 미래가 '지금 이 순간이며, 그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현실'이다. 현 세상이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세상이 지금 그대가 경험할 수 있는 과거의 최후의 날이며, 최후의 미래이다. 지금, 지금, 지금... 그렇게 과거를 만들어 왔으며, 과거를 창조해 나가는 중이며, 그 과거의 창조 과정은 계속된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사실상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그대가 살아온 날들로 볼때, 그대의 최후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들. 참으로 재미 없는 말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가 진정한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곳에 쓰여지는 글들은 인간세상에서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들이기 때문이며,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인생의 해답을 찾는 방법에 대한 말이기 때문이며, '죽은 자' 즉 죽음을 수천 수만번 경험한 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없다.
스스로 만족하여 평화로운 사람도 없다.
자신이 스스로 '내가 있으며,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 하는 한, 내 인생이라고 주장하는 인간 삶의 최종 목적지는 고통과 회한만이 남겨질 수밖에 없는 죽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라는 뜻도 아니며, 다가올, 실제하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으며, 인생에 해답이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사실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것이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이 본래 없는 것이는 이치를 깨달아 삶을 기쁨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지금 그 길, 방법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려는 것이며, 한글을 깨친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이해가 가능하도록 설명하려는 것이다. 물론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들이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으나, 아이가 말을 배우듯이 천천히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며,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을때, 비로소 스스로 확신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논리 정연한 말이며, 단견이나 편견 소견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 언어의 기원에 바탕을 둔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라는 말에 의해서 최초로 생겨난 말이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라는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마음이 있다' 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 '정신, 감정, 감동, 느낌, 성품, 성격, 천성... 등의 말, 말, 말들이다. 사실 '사고 방식'이라는 말은 '생각할 사' 자와 '상고할 고' 자로써의 '개개인의 생각하는 방식'을 일컷는 말이다.
사실 인간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 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심각한 오류가 있다. 인간세상이 평화로울 수 없는 까닭은 그 경험의 오류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의 오류.
그 하나가 '사고방식'이라는 말이며, 둘이 그런 사고방식에 의해서 알게되는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는 말이다.
사실 인간은 본래 유기체이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과 똑 같은 방식으로 생명활동을 했던 동물이다. 다만 말, 말, 말을 창조해 내면서. 말에 의해서 '지성체'가 된 것이다. '지성체'라는 말은 여타 동물 무리들과 같은 '유기체'에서 이탈한 것이며, 자연과 분리됨을 의미하는 말이다. 자연계의 수많은 무리들, 개미무리들, 사슴무리들, 호랑이무리들... 등의 무리들에게는 언어가 있으되 오직 생명활동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소통을 위한 것이며, 개체적 자아를 인식하는 '주체의식'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니 특징이 아니라 본래 유기체들의 존재의 이유이며, 그것이 자연이다. (물론 자연 또한 본래 자연이 아니라, 지성체들의 관념의 산물이다)
'나와 너' 라는 상대적인 분별이 없는 상태. 그런 상태가 자연상태이며, 그것들에 대해서 유기체라고 가정한다면, '나와 너'라는 분별로써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성체'라고 하는 것이며, 지성체라는 말 또한 지성체가 만든 말이다.
사실 인간세상이 평화로울 수 없는 이유. 그리고 개개인이 행복과 자유,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있다' 또는 '나는 사람이다'는 사고방식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는 사고방식 즉 생각하는 방식은 경험이전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경험의 오류이며,착각이다. 왜냐하면 경험이전의 사고방식에서는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는 상대적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체의 '내가 있다'는 생각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있다'는 생각은 '내가 없다'는 생각과 상대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과 '내가 없다'는 생각은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의 단 하나 하나의 분별된 생각이며, 상대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은 '내가 있다'는 생각인 상대적인 생각만을 사실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며, 그 상대적인 생각을 사실적으로 여김으로써 '실존'이라는 말을 창조해 내게 된 것이다. 그것이 최초 학문의 오류이다. 착각이다.
사실. 인간의 언어는 '내가 있다'는 말, 말, 말에서 시작된다.
'내가 있기 때문에', '너' 와 '다른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 가 없다면, 너를 비롯하여 다른 것들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와 너'라는 분별이 고통의 원인이며, 서로가 사랑할 수 없는 원인이며, 인간세상이 평화로울 수 없는 원인이다. 인간의 삶의 무게는 모두가 똑 같다. 그 무게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이다'는 경험의 오류에서 비롯된 착각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실들. 지성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는 '내가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지성체들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이다'라는 주장은 상대적인 주장일 뿐만 아니라 근거가 없는 말, 말,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체의 '내가 사람이다'는 앎(생각, 말, 뜻)에는 그 근거가 없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한계이며, 지성체의 지식이지만, 지성체의 지식은 사실 지식이 아니라 무지이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주장하는 사고방식들이... 평화라야 하는 인간들의 삶을 고통으로 창조해 내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설명하는 이유는, 지성체가 올바른 앎으로써 다시 깨어나야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며, 생로병사의 고통 또한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서로가 화합할 수 있으며, 행복과 평화로운 나날들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지성체는 경험의 오류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다.
본래 자연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유기체였으며, 경험의 오류에 의해서 지성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을때, 지성체가 아니라 '진리체'로써 무위자연의 자유와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볼 수 있는 그대는 수십억 인류들 중에서 매우 특별한 선택 받은 자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기 때문이며, 올바른 이해로써 그때 비로소 삶의 짐의 무게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더 이상 삶이 고통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수 있기 때문이며, 삶을 여여하게 즐길 수 있는 바탕이 확립될 수 있는 올바른 말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죽음 앞에 다가서더라도 죽음 또한 여여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게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있다'가 아니라 '나 없음'의 상태를 경험한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상태가 그러하며,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가 그러하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나'가 없다. '나'가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나'가 있다는 생각도 없다. 그 '나'가 있을 때에는 '너' 도 있으며, '세상'도 있다. 그런데 잠듦과 동시에 '나, 너, 세상, 우주'가 모두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 조차도 없다. 깜깜하지만, 깜깜하다는 생각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없다. 목숨이 다하여 '죽은 자'의 생각과 같은 지극한 고요함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 (無. 空)
'순수의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어린아이시절' 또한 그러하다.
'그대의 입장에서 보면'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또한 사람이다. 그대의 입장에서 볼때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강아지는 강아지이며,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아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강아지에게는 '내가 강아지다'는 생각이 없으며,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나는 어린아이다'는 생각이 없다. '내가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도 없다.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이것, 저것, 다른 것이라는 이원성이나 다양성이라는 생각이 없다. 생각이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없다. 그렇다. 분별심이 없다는 뜻이다. 선과 악의 분별이 없다는 말이며, 나와 너라는 분별이 없다는 말이며, '나와 다른 것'이라는 분별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런 설명으로써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대가 지성체라면, 최소한 자신의 주장들이 사실적인 앎에 바탕을 둔 것들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들에 대한 주장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이해로써 함께하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이다'는 주장 까지도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하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앎이 오류라는 사실과 '내가 본래 없다'는 것에 대한 사실적인 것에 대한 앎에 대해서 다음에 계속하자.
세간에는 '식자우환'이라는 말이 있으며,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상대적인 지식으로써의 앎을 넘어선 절대적인 앎 일때, 그 앎에 대해서 진리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그런 진실된 앎, 참된 이치를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모두가 화합할 수 있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법이며, 길이며, 진리이다.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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