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중도 · 방편설 - 말변사

나는 누구인가 / 마음과 깨달음 그 오해와 진실 - (11-1) 마음과 부처, 순수의식과 자아, 두려움의 원인

일념법진원 2014. 9. 10. 05:05

시작하기 전에 여담하나 하고 넘어가자.

여담은 여담이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인천에 있는 '용화사'라는 절간에는 '송담'이라는 주지가 있는데, 산중에서 십여년간 묵언수행을 했다는 중생이라고 한다. 그 이전의 주지였다는 중생이 소위 가장 작은 나이에 성불을 했다고 주장했던 명색이 '전강선자'라는 중생으로써, 옛 선사라는 여섯명의 중생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이곳 어딘가에 기록되어있다. 소위 그들의 선문답에서. '저 하늘에 떠 있는 별들 중에 네 별이 어느것이냐'는 질문에. 땅을 더듬거리며, 별을 찾는 흉내를 내므로써 인가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하근기 중생들은 그저 그런가보다, 라는 방식으로 이해 하겠지만, 일념을 깨달은 인물들, 명색의 동일시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난 인물들 보기에는... 싱겁게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말도 안되는 소리들이다. 명색이 별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제 익곳에 왔던 여인이 있었는데, 마음수련... 이라는 곳에서 헤매던 사람이다. 그가 말하기를 '도가의 화원'의 강의 내용에 있는 방법으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한구절에 집중하던 중에 언뜻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는 말의 뜻이 분명해지더라는것이다. 석가모니의 초기경전에 나와 있는 말을 보면.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증거하는 말이  '별은 별이 아니다'는 말인데. 그 말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하게 된 것이다. 대도무문이라는 말에서의 큰 도에는 문이 없다는 그 없는 '문을 본 것'이며,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도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어떤 비구니가 유방암에 걸렸는데, 그들은 '불성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에 대한 오해로써 부엌에도 신이 있으며, 화장실에도 신이 있으며, 나무에도 신이 있다고 믿는 중생들이다. 물론  이 말은 또한 노자의 도관에서 볼 수 있는 말인데. '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며, 개구리보다 더 미천한 것들 속에도 있다'는 방식이다. 물론 예수의 말에도 그와 같은 말이 있는데. '성령'은 쪼개진 장작 속에도 있으며, 깨진 기왓장 속에도 있다는 말과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 비구니는 소위 깨달았다고 알려진 송담이라는 중생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수술을 해야 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묻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유명하다는 무속인을 찾아가서 물어보니. 몸에 칼을 대면 안된다는데. 과연 수술하면 쉽게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무속인의 말을 들어야하는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중생들은 그를 깨달은 도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지'를 만나고 싶어서 간청했는데. 여지없이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그 비구니는 결국 100일동안의 단식으로써 완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위 '깨달은 자'들의 '유구무언'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이다.

소위 불가에서 깨달았다는 자들이 사람들 만나기를 두려워 하여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가. '유구무언'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에 대해서 물어오면 '올바른 앎이 단 하나도 없으니' 마땅히 답변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 만나기를 기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데,  마음샌타라는 집단들이나 유사 종교, 유사 명상센타 등에서도 '나는 마음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소위 깨달았다는 자들이 무수히도 많은데. 말을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각자무언, 유구무언'이라는 말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올바른 앎이란. 그들이 존재하는 시대와 조건, 상황에 따라서 가장 평범한 보편적인 언어로써 누구에게나 올바른 앎. 참된 이치를 전하는 것이며, 그 앎으로써 중생들에게 무한히 베푸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알기 때문이며, 심지어 불치병. 난치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에 이르기 까지 분명히 아는 앎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찰의 지혜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실 예수의 말이 왜곡되어 전해지는 말 중에.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어라' 하니 일어나서 걸었다'는 비유가 있다. 사실 올바르게 아는 앎이라면 사실적인 말이며, 인간들의 모든 질병의 근원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앎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불치병이나 난치병 등의 어떤 질병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질병들에 대해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며, 치료 방법까지도 알려줄 수 있는 분명한 앎이 곧 '도'를 깨달아 아는 앎이다. 사실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 또한 이와 유사한 것이다.  

 

'메뉴의 '의학의 한계'에 설명하는 방식이며, 도가의 약식과 관련된 '유기체'라는 말에 대한 설명과 같은 방식이다. 하지만 인간의 관념으로써나, 의학들의 무지로써는 절대로  납득할 수 없는 사건들이며, 이해 조차 불가능한 것이며, 오직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만이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을 뿐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지성체들이 '인간은 유기체'라는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면... 불치병이나 난치병 등에 이르기 까지 모두 완치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성체들이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신경성' 질병들 또한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한가지 더 이해 하고 넘어가자.

앞장에서 '내가 있다'는 말이 '내가 없다'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있다'는 말과 '내가 없다는 말' 그리고 '마음이 있다'는 말과 '마음이 없다'는 말 또한 상대적인 말이다. 더 나아가 '선이 있다는 말'과 '악이 있다'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며, '좋은 것이 있다는 말과 좋은 것이 없다'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며, 옳다 옳지 않다는'말이 상대적인 말이며 분별이다.

 

물론 모든 언어의 분별이 시작된 시점은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 시절이며, 타인들로부터 말을 배우던 시기이다. 언어를 인식하기 전에 이미, '내가 있다'는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그 생각이 최초의 분별된 생각이며, 나와 너라는 생각이 일어난 최초의 사건이다. '책'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와 책 비밀의 언어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을 것이다.

 

 

현시대의 사회 구조가 이런 모순 속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많이 아는거룩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말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면 그들의 말들이 모두 허구적인 말잔치들이며, 전혀 말도 안되는 주장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례를 들자면.

사실은 지성체들의 모든 주장들이 그러하지만.

 

소위 미래를 위해서는, 발전을 위해서는 인력을 최소화 하기 위한 방법으로 더 능력이 뛰어난 인공지능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편에서는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부족하다며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논리이다. 논리적 모순이지만, 그런 사실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니. 무한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질 말든지, 사람들의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주장하질 말든지 둘 중 하나만 주장해야 하지 않겠는가말이다. 아득한 예날에. 기계라는 말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인간들은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으며, 로마시대의 웅장한 건물들을 짓기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도대체 인간들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천국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의 삶이 지옥이기 때문이에 천국을 갈망하는 것이며, 지옥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의 삶이 고통이지만 죽음은 더 큰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렇게 세뇌당한 것이다. 말을 배우기 전의 어린아이에게는 그런 분별심이 없었는데, 타인들의 말에 의해서 마음이 생겨났듯이, 또 다른 타인들로부터 그런 사고방식으로 세뇌 당한 것이다.  

 

인간은 유기체다. 

자연계에는 무수히도 많은  유기체들이 존재한다. 그 유기체들 중에 오직 인간유기체들만이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현시대의 인간유기체들의 삶의 목적이 '경제발전'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경제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들인가? 아니면, 인간을 위해서 경제발전이 필요한 것인가? 

 

유기체인 지성체들의 지식 또한 그러하다. 

지성체들은 '지식이 끝이 없다'는 말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끝이 없는 지식을 창조해 내기 위한 도구라는 말이다. 인간을 위해서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을 위해서 인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말이 되는 소리인가?

어불성설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말들. 지적으로써 이해가 불가능한 말들일까?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옳은 말인가? 옳지 않은 말인가? 

 

 

이런 말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면, 상근기이다. 더 나아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라며,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념법으로써 '무위'를 실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하루종일 걸어다니면서도, 단 한순간도 '내가 지금 걷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그런데 누가 물어보면, '내가 걸었다'고 대답한다. 매사가 그런 방식이다. 전에 본적이 있는 사람이지만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전에 본적이 없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따라서 전부터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 아. 그때 어떤 모임에서 악수를 했는데요. 라고 하면, 아 그래요' 하는 방식이다. 거기다가 그 아는체 하는 사람이 자신보다 더 돈이 많다거나,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라면... 실제로 전부터 알던 사람보다 더 친근한척 하며, 반가워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의 나는 무엇인가? 

 

자세히 관찰해 보라.

그대의 뇌. 기억세포에 저장되어 있는 낱말(생각)들이 그대의 나를 구성하는 구성 요소들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말, 말, 말들, 언어들이 그대 마음의 구성요소들이다. 반사체에 비친 모습이 그대가 아니라, 기억세포에 저장된 '언어'들이 그대이며, 그대를 구성하는 것들은 사실상 다른 것이 아닌, 말, 말, 말들, 낱말들, 언어들이다. 언어가 그대를 규정하는 것이며, 언어가 그대 자신이다. 그대가 주장하는 그대 자신이 곧 언어로 구성된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마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며, 심지어 마음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는 세상이다. 더 나아가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며,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심지어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며, '말씀'이 주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며, 내가 주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과연 누가 사실적인 것들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며, 누가 허구적이 것들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일까? 

사실 그대 자신의 구성요소들이 말, 말, 말 뿐인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분별 조차 할 수 있는 능력조차 상실된 것이다. 

 

'도'를 깨닫는다는 것은 환상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환상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신'이나 또는 '영혼, 성령, 불성' 그리고 '귀신 신자의 '신경'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모든 주장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어떤 과실의 아름인 '사과'라는 과일과 같이 사실적인 것이라면 감히 내가 옳다고, 우리가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사과'를 앞에 놓고 '이것이 사실적인 것인가, 허구적인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 물음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사과'라는 과실 또한 그 근본원인은 없는 것이다. 닭이 먼져냐, 닭의 알이 면저냐는 논란과 같이, 우주의 근원이 없는 것이듯, 그것들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인간의 사고방식으로써는 이해 할 수도 없으며,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도'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것이며, '본래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 바와 같다. 

 

 

인간은 실체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 '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나'라는 것은 수많은 말, 말, 말들 중에 하나의 '말, 낱말'이다. 

 

헤아릴 수 없는 조각조각의 수많은 생각들 중의 하나의 생각이 '나'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언어' 라는 것들 또한 그 근원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이라는 말도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가 없다'는 말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을 뿐, '언어 없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 동안의 상태에 대해서 '공, 무, 도' 라는 이름으로 표현 되는 것이다. 기억할 수 없는 시간동안이지만... 그대가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 다른 언어로 표현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립문자, 언어도단'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라는 말에서의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며,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하지만 '모든 지식'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있으며, 그 방법은 유일한 방법이며, 그 방법에 대해서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 방법만이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방법은 내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에 대해서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된 것이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또한 이 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에 대해서 스스로  깨달아 안 것이며, 그렇기 알면 '세상에 나와 비견할 자는 없다'고 알게됨을 안다고 했던 것이다. 예수의 '전지전능한 하나남'이라는 말 또한 같은 맥락이다. 다만 예수는 '내가 창안한 것이 아니다'는 말 대신에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로써 대신한 것이다. 

 

여기서 '나'라는 말은 '육체가 나라는 말도 아니며, 내가 사람이다는 말도 아니며, 내가 영혼이다는 말도 아니며, 내가 신이라는 말도 아니며, 내가 부처라는 말도 아니다. 이것도 아니며, 저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닌 것에 대해서 '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까? 라고 묻는다.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상대적인 것이란 주체나 객체가 사라지므로써 동시에 그 대상 또한 사라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라. 인생이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자살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며, 올바른 앎으로써 가치 있는 삶, 죽음 앞에서도 여여할 수 있는 검증된 삶, 준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진리갈급'이라는 사람이 도가의 '일념법 강죄'를 신청하여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주로 이단과 사이비라는 종교들을 찾아다니면서 진리를 갈구했기 때문에 이름을 '진리갈급'이라고 지었다고 했으며, 두권의 책을 다섯차례 정독 했다고 했다. 궁금한 점이 많아서 목사들에게 물어보고, 불교에도 기웃거려 보았으나... 궁금증을 해결할 수는 없었단다. 그런데 끊임없이 찾아 헤매다 보니.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나, 불교의 부처님이라는 말이 같은 맥락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도가'를 찾았다는 것이다. 

 

강좌 마지막날.  

그대의 '진리갈급'이라는 이름은 너무 조급하니, 그 이름부터 조급함이 없는 이름으로 바꾸는게 어떻겠느나고 물으니. 바꾸고 싶은데 이름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성이 '서'씨라고 하기에 '서락'이라는 이름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徐' 자가 '천천히 서' 자이다. 그리고  '樂' 자는 '풍류 락' 자이다. 물론 풍류를 즐기라는 뜻이 아니라,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천천히 즐거움을 누리라는 의미이다. 

물론 '올바른 앎'일 때, 서두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며, '일일시호일'이라는 말에서의 '옳을 시' 자의 뜻과 같이 '올바른 앎'으로써 근심과 걱정 없이 편안한 날들로 창조해 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부지런히 달려 나간다. 이는 감옥에서 탈옥한 죄수가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를 향해서 부지런히 달려 나가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둘 다 달려나가서 다다르는 곳은 병든 몸과 함께 고통과 두려움만 가득한 죽음앞에 다가선다는 것이다. 

 

희망과 상대적인 말이 절망이다. 

희망이 있기 때문에 절망이 있는 것이다. 

사실 전정한 희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시한부생명을 선고  받아서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던 사람이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그 사람의 희망이 가장 큰 희망이며, 기쁨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 또한 병이 완치되고 나면, 그 기쁨은 기쁨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이며, 현실이다. 다른 건강한 사람들과 다른 것이 별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더 큰 욕망이 생겨나게 되니. 몸이 아파서 이룰 수 없던 또 다른 욕망이 고개를 들고 우루루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욕이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 고통과 슬픔, 환상의 세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없는 세상이 있다. 

희로애락, 생로병사가 있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없는 세상이 있다. 

언어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며, 상대적인 언어가 없는 세상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에 대해서 '도' 라고 이름 지은 것이며, '부처'라고 이름 지은 것이며, '성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을 보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