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어 · 불이일원론

깨달음(진리. 도. 불성. 성령) - 의 올바른 앎, 지식의 허구와 진리/ 진리란?

일념법진원 2014. 12. 15. 03:54

여기서 설명되는 '깨달음' 이라는 낱말은 본래 '노자의 '도가도비상도' 라는 말로 표현되는 '道' 와 석가모니의 '법, 중도' 라는 낱말 등에 대한 한국언어이며, 한글문자이다. 

 

소위 깨달음에 대해서 '득도(得道)' 라는 말로 표현된다면, 한글로는 '깨달음을 얻음' 이라는 말이다. '깨달음'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 무수히도 많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석가모니의 말이 어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더 많은 말들로 재창조된 것이며, '불성'이라는 말과 '성령'이라는 말 또한 본래는 '깨달음을 얻음' 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사실. 깨달음은 '진리'를 일컷는 말이며, 진리는 사전적 의미와 같이 '우주의 근본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이다. 단지 자신의 영원한 자유 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며, 방법론이며, 개개인의 인간들에게는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위한 인생론이며, 참된 삶을 위한 유일한 방법론이다. 참다운 인생의 길이기 때문에 '진리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 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게 알아야만 하는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 득도)은 어떤 우상숭배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자신 이외의 다른 대상들을 통해서도 얻어질 수 있는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절대자, 신, 영혼 등을 상상하므로써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개개인 자신의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아차림으로써의 올바른 앎(識)이기 때문이다.  

 

 

현세상에는 '그것(깨달음. 진리. 올바른 앎)에 대해서 '석가모니 불'의 '부처'라는 말로 이해 하는 것 같다.

'그것'에 대해서 부처, 불성 등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런 '성품'이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본무'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만들어진 또 다른 '이름'이다.

석가모니의 말이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 변질된 불경에 흔히 등장하는 '是名' 이라는 말의 뜻이 그러하다. '시명'이라는 낱말은 '바를 시' 자와 '이름 명' 자로써 '바르게, 올바르게 본다면 '불성, 부처, 성령'이라는 말들 또한 '명색의 동일시'로써의 또 다른 '이름' 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각기 다른 소리이며, 그 소리들이 화합하여 언어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 낱말들은 '명색' 즉 '이름과 형상의 동일시' 로써 구성된 것이다.

 

예를 든다면, '까마귀'라는 동물이 있다.

'까마귀' 가 본래 까마귀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동물에 대해서 '까마귀'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는 말은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는 '어떤 동물=까마귀' 라는 방식으로써의 '형상, 모양있는 것과 '이름'과의 동일시이다.

 

'어떤 동물' 과 '까마귀'라는 이름은 분명히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그런데 '이름'이 지어지면서... '동물=까마귀'의 두 낱말이 '까마귀' 라는 한구절의 말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까마귀는 본래 까마귀가 아니다' 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깨달음'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실. 까마귀라는 동물을 분석해 보더라도 근원물질을 찾을 수는 없다. 인간이 인체를 분석하더라도 인체의 근본원인물질을 찾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인간이 우주를 탐사하더라도 우주의 근원인자를 찾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인간이 생명의 비밀을 찾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이와같이 '까마귀'는 본래 까마귀가 아니라, 어떤 물질에 대해서 '까마귀' 라고 이름 지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명색의 동일시'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인간들의 모든 말(언어, 낱말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앎이 아니라, 착각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 이라는 말 또한 '까마귀'라는 이름을 짓고, 그것에 대해서 '까마귀'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바와 같은 방식으로 '이름'지어진 것이다. 다만, 인간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명색의 동일시'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앎(지식)이 명색의 동일시일 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에 대해서 '깨달음, 진리, 도' 라는 말(이름)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본래 사람이 아니다' 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대해서 올바른 앎이라고 하는 것이며, 진리이며, 깨달음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이 겪어야만 하는 생로병사의 모든 고통은 언어를 사실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언어를 사실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신을 구성하는 구성요소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명색의 동일시에 대한 착각으로 구성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고통이라는 말이 없다면, 고통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죽음'이라는 말이 없다면, 그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말이 없다면... 그것 또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시대는 문자가 밝은 시대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말이 '깨달음, 도, 진리' 라는 말이다. 물론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논리적'이라는 말의 뜻 조차 이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관념, 지식으로써는 '언어'의 근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언어에는 '생각'이라는 낱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낱말에 바탕을 둔 논리로써 '깨달음. 도' 에 대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말과 예수의 말,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말, 노자와 장자의 말에 대해서 인간들의 지식으로써 이해 조차 불가능한 까닭은 그들이 존재했던 시대에는 논리적이라는 말이나, 문법이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시대는 논리적이라는 말과 육하원칙이라는 언어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지적으로써도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올바른 이해로써 실천할 수 있는 앎이 올바른 앎인 것이며, 더 나아가 올바른 이해로써 '진리의 길, 좁은 문을 여는 사람들만이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언어의 시작, 즉 언어의 기원은 '생각'이라는 낱말이다. 

물론 '생각'이라는 낱말 또한 궁극에서는 '명색의 동일시'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 본래 없는 것이지만. 

 

문명, 즉 문자가 밝아졌기 때문에 '생각의 원리'라는 말로써 '진리, 도, 깨달음'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며, 지적으로나마 이해는 가능할 수 있는 것이며, 올바른 이해로써 스스로 진리와 하나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어리석어서 단군신화와 같은 '전설'을 믿고 그 전설들, 신화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 같다. 사실. 예수와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노자와 장자 등의 말들... 진리와 하나된 인물들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위대한 가르침이다.

 

 

'생각'이라는 낱말에 바탕을 둔 논리로써의 '도, 깨달음, 진리'에 대한 설명은 한글을 깨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다.

올바른 앎이라면 한생각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며, 내생각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착각 중에서 가장 큰 착각이,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누구나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사람이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내가 절대자, 신이다' 라고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은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생각과 상대적인 생각이다. 다만 어린아이서절부터 '내가 사람이다'는 사고방식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말을 흉내내는 '앵무새'에게도 '나는 사람이다' 라는 말을 가르친다면, 앵무새 또한 '나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이다' 라고 말 할 수 있다. 사실.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과정을 봄으로써도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고 익히는 일이 곧 '명색'의 동일시에 대해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놓고 말을 배운다.

'이것은 사과, 이것은 까마귀, 이것은 원숭이, 이것은 자동차, 이것은 어머니, 이것은 아버지, 이것은 하늘, 이것은 땅, 이것은 태양, 이것은 별, 이것은 달... 등으로써 '어떤 것=이름'으로써의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방식으로써의 세뇌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언어, 낱말들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말'이 있지만 서로가 다른 것과 같이.... 아버지라는 말이 있지만 서로가 다르게 해석하듯이, 어머니라는 말 또한 그렇듯이, 행복이라는 말, 평화라는 말, 자유라는 말, 말, 말들에 대해서 분명히 정의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 인간이 복을 얻기 위해서 행위하거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 행위하는 일들 또한 그러하며, 성공이라는 말 또한 그러하다. 자신 스스로 행복, 평화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이유는 타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웠던 말들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 '자아' 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스스로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서 또는 타인들과의 비교에 의해서 자신에 대해서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어의 근원은 '생각'이라는 낱말이다. 

다만, 인간은 언어, 말은 더하거나 덜할 수 있겠지만, 생각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은 생각에 대해서 '나의 생각'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은 신출귀몰하다는 말과 같이, 시작도 중간도 끝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며, 연속성이며,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그 '생각'의 '생멸현상'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신, 절대자, 영혼' 등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본래의 나를 알아차리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일념법, 일념명상법, 일념윤회법'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런 생각의 생멸을 반복순환하는 윤회현상에 대해서 깨달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나.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삶과 죽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절대자. 신, 영혼, 성령, 불성, 도, 깨달음... 그대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다.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