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은 경험이전의 사고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된 말이 '무의식, 잠재의식, 순수의식' 등의 말, 낱말들이다.
사실. 인간의 지식으로써의 앎은 언어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말, 낱말들에 대해서 추측하는 것이며, 상상하는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말이나, 잠재의식, 순수의식이라는 말은 누구나 아는 말인 것 같지만 딱히 정의될 수 없는 말이다. 그 상태를 경험하여 아는 이해가 아니라, 그 낱말들에 대해서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아니면 다를 것이다' 라는 방식으로써의 추측이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 뿐만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말도 그러하며, 평화라는 말도 그러하며, 자유라는 말들 또한 그러하다. 사실. 모든 언어가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언어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 첫째이며, 둘째는 '언어가 본래 없는 것이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가 불가능한 인간들이 갈망하는 하는 것이 행복, 자유, 평화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어떤 절대자, 신 등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사실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갈망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라고 알면서도 마음이 평온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세상을 갈망하게 된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깨달음' 이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만족할만한 말을 남겼던 인물들이 소위 깨달은 인물들이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예수와 석가모니'이다.
그들의 말의 요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소크라테스의 말로 전해지는 '유일한 선은 올바른 앎, 즉 진리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다'는 말이다.
사실은 인간들의 인위적으로 가공된 마음이 모두 사라져야만 순수의식의 어린아이들과 같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뜻이며, 모든 근심과 걱정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평화이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뜻이며, 마음에 바탕을 두고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 순환하므로써 윤회하는 생각들이 고통의 근본원인이라는 뜻이며, 이를 통칭하는 말이 '識'이라는 낱말이다. 사실 '식'이라는 말은 석가모니의 말이 한자로 번역되면서 변화된 말이며, 인간들의 '지식'을 이르는 말이다. 지식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써는 마음과 지식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육하원칙이라는 법칙으로써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웠던 말, 말, 말들에 의해서 지식이 생겨난 것이며, 지식이 곧 마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
어느 사전을 보니.
삼매라는 낱말에 대해서 "인간이 최상의 정신집중 상태에서 절대자와이 합일됨" 이라는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참으로 옳은 표현이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오는 동안 내내 그런 '집중'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실. 정신통일이라는 말이 있으나, 정신통일, 정신통일, 정신통일.... 이라는 말을 반복한다고 하더라도 정신이 통일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사실상 '집중'이라는 낱말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집중'이라는 말에 대해서 추측하는 것이며, 상상하는 것들로써 '깨달음'에 대해서 까지도, 진리에 대해서 까지도 서로가 옳다고 주장만 하는 것이다.
'집중'이라는 낱말에 대한 사전적 의미 또한 그러하다.
집중 (執中)【명사】【~하다|자동사】 과부족·치우침이 없이 마땅하고 떳떳한 도리를 잡음.
집중 (集中)【명사】【~하다|자동사·타동사】 한 곳으로 모임. 또는 모이게 함.
¶ 음주 운전을 ∼ 단속하다/ 인구가 대도시로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수상자에게 ∼되었다/ 범인 검거에 온 수사력을 ∼시키다.
사실. 삼매라는 낱말의 뜻이 '집중'이라는 말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다. 물론 절대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자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에 대해서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해서는 오직 '일념법, 일념명상법'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깊이 생각한다는 생각이거나, 낮게 생각한다는 생각이거나, 똑 같은 생각이다. 윗빠사나라는 말 또한 본래는 강한 윗빠사나와 약한 윗빠사나라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니. 또한 강하게 집중된 생각 또는 약하게 집중된 생각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 인간의 관념으로써 이해 하는 명상은 명상이 아니다. 사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명상'이라는 말에 대해서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것일뿐, 명상이라는 낱말의 본래의 뜻 조차 이해 할 수 없다. '요가'라는 낱말 또한 그러하다. 본래는 요가 또한 생각의 집중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위빠사나 또한 생각의 집중을 위한 방편이며, 태권도, 유도, 차를 마시는 차도... 등의 모든 '도' 라는 말들 또한 본래에는 '생각의 집중을 위한 방편으로써 창조된 말, 말, 말들이다.
사실. 인간의 관념으로써 '생각의 집중'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가 불가능한 까닭은 '생각을 집중한다는 생각 또한 기억세포에 저장된 수많은 생각들 중 하나의 또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을 한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생각을 할 수 없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생각이 있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끊어졌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생각을 안하겠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생각을 생각한다는 낱말이 있는데, '사유(思惟)' 라는 말로써 '생각할 상' 자와 '생각할 유' 자로써의 또 다른 '생각'이다. 이렇듯 인간은 생각의 유희. 생각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은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생각이며, 내가 죽는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생각이다. 사실. 내가 죽었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내가 살았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생각이다. 다만 인간은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 고정관념화 된 것이며, '육체가 나다'라는 고정된 생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생각으로 본다면, 생각의 원리로 본다면, 육체가 나다는 생각이나,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은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다. 생각의 논리로 본다면, 내가 절대자라고 생각한다거나,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또한 한생각의 차이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다른 것들이 아니라,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웠던 낱말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스스로 일어나는 생각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다니는 것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생각들이거나,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생각들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 적인 것들이다. 왜냐하면 개개인들마다 듣고 배운 것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서로 다른 사람들로 부터 듣고 배웠던 말들이 기억세포에 저장된 것들이며, 그것들 즉 기억세포에 저장된 낱말들에 한정된 생각들이 스스로 생멸을 반복순환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주가 시작도 없으며, 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들의... 그대의 생각이 시작도 없으며 끝도 없이 스스로 생멸을 반복순환하는 것이며, 윤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 생각, 생각들이 모든 고통의 원인인 것이다.
현시대는 문자가 밝은 시대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말로써, 생각이 논리에 따라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며, 석가모니가 이런 논리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시대에는 논리적이라는 말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현시대는 지적수준이 높아진 시대이기 때문에 생각의 원리, 생각의 논리에 바탕을 두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석가모니의 12 연기법은 '앎(識)'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설명으로써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모든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설명하는 이유는...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요점과 같이 '언어'가 본래 없는 것' 이라는 말에 대해서 절대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매, 집중. 윗빠사나. 명상, 요가... 등의 모든 수행법들, 허구적인 것이며, 근본이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없는 자들의 망상에서 비롯된 망언들이 아닐 수 없다. 허긴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인간들의 환상이며, 망상의 세계이니, 어찌 하겠는가만은.
진리가 있다.
진리의 길이 있다.
인간들의 주장과 같이 무턱대고 주장하는 앎이 아니라, 누구나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의 다툼이 있을 수 없는 올바른 앎이 있다. 타인들의 말에 세뇌당하여 아는 앎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만이 올바른 앎이다.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우거나 세뇌당하여 아는 앎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앎으로써 해답이 없는 것이며, 마음 밖에서 절대자, 신, 하나님, 부처님을 찾는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지식의 무한한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진리'가 있는 것이다.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일념명상법'이다.
일념명상법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일때, 그때 비로소 타인들의 말들, 지식들 따위에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들의 말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에 대해서 불변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윗빠사나, 명상, 요가, 참선, 화두수행을 비롯한 인간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나부랭이들을 비롯하여 기타 모든 마음수련집단들, 과학을 운운하는 집단들, 모두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신, 절대자' 등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합집산들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절대로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우주가 있다는 생각 또한 우주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그릇된 사고방식에 바탕을 둔 생각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라고 말하는 까닭은 인간의 관념으로써 생각의 원리를 이해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자유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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