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 원효대사
若依法界 始遊行者 於四威儀 無一唐遊 (약의법계 시유행자 어사위의 무일당유)
만약 법계(法界)에 의지하여 처음으로 두루 겪으면서 수행하고자 하는 자라면 사위의(四威儀, 行住坐臥)에 있어서 어느 것에도 헛되이 유행(遊行)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念諸佛 不思議德 常思實相 朽銷業障 (염제불 부사의덕 상사실상 후소업장)
모든 부처님들의 불가사의한 덕을 마음에 새기고 언제나 실상(實相)을 생각하여 업장(業障)을 삭이며
普爲六道 無邊衆生 歸命十方 無量諸佛 (보위육도 무변중생 귀명시방 무량제불)
널리 육도(六道)에 가없는 중생을 두루 위하여 시방 세계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로 귀의하여야 한다.
諸佛不異 而亦非一 一卽一切 一切卽一 (제불불이 이역비일 일즉일체 일체즉일)
모든 부처님은 서로 다르지 않지만 또한 하나도 아니고, 하나이므로 곧 일체이며, 일체가 곧 하나이다.
雖無所住 而無不住 雖無所爲 而無不爲 (수무소주 이무부주 수무소위 이무불위)
비록 머무는 바가 없으시나, 머물지 않음이 없으시고 비록 하시는 바가 없으시나, 하지 않으시는 바도 없으시다.
一一相好 一一毛孔 遍無邊界 盡未來際 (일일상호 일일모공 변무변계 진미래제)
낱낱의 상호(相好), 낱낱의 털구멍이 가없는 세계에 두루하여 미래제가 다 하도록
無障無礙 無有差別 敎化衆生 無有休息 (무장무애 무유차별 교화중생 무유휴식)
막힘도 없으시고 걸림도 없으시며 차별도 없이 중생을 교화하심에 쉬지 않으신다.
所以者何 (소이자하)
어찌하여 그러한가.
生死涅槃 無二無別 十方三世 一塵一念 (생사열반 무이무별 시방삼세 일진일념)
시방 세계가 한 티끌이고, 삼세가 한 생각일 뿐이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大悲般若 不取不捨 以得不共 法相應故 (대비반야 불취불사 이득불공 법상응고)
대비와 반야를 취하시지도 않고 버리시지도 않으시니 이는 '함께 하지 않는 법(不共法)'을 얻으셨으므로 서로 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今於此處 蓮花藏界 盧舍那佛 坐蓮花臺 (금어차처 연화장계 노사나불 좌연화대)
지금 이곳 연화장세계에서는 노사나부처님이 연화대에 앉아 계시며
放無邊光 集無量衆生 轉無所轉 大乘法輪 (방무량광 집무량중생 전무소전 대승법륜)
가없는 빛을 발하시어, 한량없는 중생을 모으사 설할 바 없는 대승의 법륜을 설하시니
菩薩大衆 遍滿虛空 受無所受 大乘法樂 (보살대중 변만허공 수무소수 대승법락)
보살의 큰 무리가 두루 허공에 가득 차고 누릴 바 없는 대승 진리의 즐거움(法樂)을 받아 누린다.
而今我等 同在於此 一實三寶 無過之處 (이금아등 동재어차 일실삼보 무과지처)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함께 여기에서 한결같은 진실(一實)과 삼보의 허물이 없는 곳에 있으면서도
不見不聞 如聾如盲 無有佛性 何爲如是 (불견불문 여농여맹 무유불성 하위여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귀머거리 같고 장님과 다름없으니 불성이 없음인가 어찌하여 이러한가.
無明顚倒 妄作外塵 執我我所 造種種業 (무명전도 망작외진 집아아소 조종종업)
무명으로 전도되어 망령되이 바깥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나와 내것에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짓고
自以覆弊 不得見聞 猶如餓鬼臨河見火 (자이부폐 부득견문 유여아귀 임하견화)
스스로 무명에 덮히고 가리워져서, 보고 들을 수 없으니 마치 아귀(餓鬼)가 강에 다다르나 강물이 불로 보이는 것과 같구나.
故今佛前 深生慙愧 發菩提心 誠心懺悔 (금불전심 심생참괴 발보리심 성심참회)
그러므로 이제 부처님 앞에서 깊이 부끄러움을 일으키고 보리심을 내서 정성어린 마음으로 참회합니다.
我及衆生 無始以來 無明所醉 作罪無量 (아급중생 무시이래 무명소취 작죄무량)
저와 중생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무명에 취한 바 되어 지은 죄 한량없고
自作敎他 見作隨喜 五逆十惡 無所不造 (자작교타 견작수희 오역십악 무소부조)
오역죄(五逆罪)와 열 가지 나쁜 죄(十惡) 중에 아니 지은 것이 없으며 스스로도 짓고 남에게도 가르쳐서 남이 짓는 것을 보고 따라 기뻐하였습니다.
如是衆罪 不可稱數 諸佛賢聖 之所證知 (여시중죄 불가칭수 제불현성 지소증지)
이와 같은 갖가지 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이며 여러 부처님과 성현(聖賢)들이 다 아시고 계시니
已作之罪 深生慙愧 所未作者 更不敢作 (이작지죄 심생참괴 소미작자 갱불감작)
이미 지은 죄에 대해서는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고 아직 짓지 않은 죄는 감히 다시 짓지 않겠습니다.
此諸罪 實無所有 衆緣和合假名爲業 (차제죄 실무소유 중연화합 가명위업)
그러나 이 모든 죄(罪)라는 것이 실제로는 '있는 바'가 없으며 뭇 인연이 화합하는 것을 거짓으로 '업(業)'이라 이름하였을 뿐이니
卽緣無業 離緣亦無 非內非外 不在中間 (즉연무업 이연역무 비내비외 부재중간)
연(緣)자체에 업이 없고, 연(緣)을 떠나서도 또한 업이 없으며 연(緣)의 안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으며, 중간에도 업은 있지 아니하다.
過去已滅 未來未生 現在無住 (과거이멸 미래미생 현재무주)
시간적으로 과거는 이미 없어졌고,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으며, 현재는 머무름이 없다.
故所作 以其無住 故亦無生 (고소작 이기무주 고역무생)
그러므로 짓는 바 업도 그러하여, 머무름이 없는 까닭에 또한 '생겨남'도 없다.
先有非生 先無誰生 (선유비생 선무수생)
먼저부터 있었다면 '생겨남'이라 할 수 없고, 먼저는 없었다면 무엇이 생겼는가.
若言本無 及與今有 二義和合 名爲生者 (약언본무 급여금유 이의화합 명위생자)
만약 '본래 없음(本無)'과 더불어 '지금 있다(今有)'는 것으로 그 두 뜻이 화합한 것을 일컬어 '생겨남'이라 말한다면,
當本無時 卽無今有 當今有時 非有本無 (당본무시 즉무금유 당금유시 비유본무)
응당 '본래 없는' 그 때에는 곧 '지금 있음'이 없고, 응당 '지금 있다'는 때에는 '본래 없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先後不及 有無不合 二義無合 何處有生 (선후불급 유무불합 이의무합 하처유생)
'먼저'와 '나중'은 서로 미치지 못하고, '있음(有)'과 '‘없음(無)'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이 두 가지 뜻이 화합됨이 없으니, 어느 자리에 '생겨남'이 있겠는가.
合義旣壞 散亦不成 不合不散 非有非無 (합의기괴 산역불성 불합불산 비유비무)
화합의 뜻은 이미 깨어져 있기에, 그것의 흩어짐 또한 성립되지 않아서 화합(合)도 아니고 흩어짐(散)도 아니니,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다.
無時無有 對何爲無 有時無無 待誰爲有 (무시무유 대하위유 유시무무 대수위유)
'없는' 때에는 '있음'이 없으니, 무엇에 상대하여 '없음'이 되며 '있는' 때에는 '없음'이 없으니 무엇을 기다려서 '있음'이 되는가.
先後有無 皆不得成 當知業性 本來無生 (선후유무 개부득성 당지업성 본래무생)
먼저․나중․있음․없음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땅히 업의 성품을 알아라 본래 '생겨남'이 없느니라.
從本以來 不得有生 當於何處 得有無生 (종본이래 부득유생 당어하처 득유무생)
본래부터 '생겨남'을 얻을 수 없는데 과연 어느 자리에 '생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이 얻어지겠는가.
有生無生 俱不可得 言不可得 亦不可得 (유생무생 구불가득 언불가득 역불가득)
생겨나고 말고 하는 것이 모두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다는 말까지도 얻을 수 없다.
業性如是 諸佛亦爾 (업성여시 제불역이)
업의 성품이 이러하듯 모든 부처님 또한 그러하다.
如經說言 (여경설언)
경에 말씀한 바와 같이,
譬如衆生 造作諸業 若善若惡 非內非外 (비여중생 조작제업 약선약악 비내비외)
비유컨데 중생은 갖가지 업을 짓고 있는데, 선하건 악하건 간에, 그것이 중생의 안에 있는 것도 아니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如是業性 非有非無 (여시업성 비유비무)
이와 마찬가지로 업의 성품은 '있음(有)'도 아니요 '없음(無)'도 아니다.
亦復如是 本無今有 非無因生 (역부여시 본무금유 비무인생)
또한 마찬가지로 본래 없던 것이 이제 있는 것은 원인 없이 생긴 것이 아니다.
無作無受 時節和合 故得果報 (무작무수 시절화합 고득과보)
'지음'도 없고 '받음'도 없으나 시절이 화합하여 과보(果報)를 이룬다.
行者若能 數數思惟 如是實相 而懺悔者 (행자약능 삭삭사유 여시실상 이참회자)
수행하는 이가 능히 이와 같은 실상을 자주자주 생각하여 참회하는 사람에게는
四重五逆 無所能爲 猶如虛空 不爲火燒 (사중오역 무소능위 유여허공 불위화소)
네 가지 중죄(重罪)와 오역죄(五逆罪)를 지었다해도 아무 일이 없게 되나니 마치 불이 허공을 태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如其放逸 無慙無愧 不能思惟 業實相者 (여기방일 무참무괴 불능사유 업실상자)
그러나 방일하고 부끄러워 할 줄 모르며 업의 실상이라는 것을 사유(思惟)하지 못하는 사람은
雖無罪性 將入泥梨 猶如幻虎 還呑幻師 (수무죄성 장입니리 유여환호 환탄환사)
비록 죄는 본래 자기 성품(自性)이 없는 것이나, 장차 지옥에 떨어지리니 마치 요술로 만든 환상의 호랑이가 도리어 요술쟁이(幻師)를 삼켜버림과 같다.
是故當於 十方佛前 深生慙愧 而作懺悔 (시고당어 시방불전 심생참괴 이작참회)
그러므로 마땅히 시방 세계의 부처님들 앞에서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뉘우쳐 참회를 해야 한다.
作是悔時 莫以爲作 卽應思惟 懺悔實相 (작시회시 막이위작 즉응사유 참회실상)
뉘우칠 때에는 억지로 지어서 할 것이 아니라 응당 바로 참회의 실상을 사유해야 한다.
所悔之罪 旣無所有 云何得有 能懺悔者 (소회지죄 기무소유 운하득유 능참회자)
그 뉘우칠 바 죄라는 것이 이미 있는 바가 없는데 어찌 참회하는 자가 있다고 하겠는가.
能悔所悔 皆不可得 當於何處 得有悔法 (능회소회 개불가득 당어하처 득유회법)
참회하는 주체와 참회할 대상이 모두 있지 않으니 과연 어느 자리에 뉘우칠 법이 있는가.
於諸業障 作是悔已 亦應懺悔 六情放逸 (어제업장 작시회이 역응참회 육정방일)
모든 업의 장애에 대해 이와 같이 뉘우치고 나서는 또한 응당 여섯 가지 감각의 방일함에 대하여서도 참회해야 한다.
我及衆生 無始已來 不解諸法 本來無生 (아급중생 무시이래 불해제법 본래무생)
나와 모든 중생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모든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妄想顚倒 計我我所 內立六情 依而生識 (망상전도 계아아소 내립육정 의이생식)
망령된 생각에 전도(顚倒)되어 나와 내것을 헤아려서, 안으로는 여섯 가지 감각(六情)을 세워 놓고 거기에 의지하여 분별식(識)을 일으키고
外作六塵 執爲實有 不知皆是 自心所作 (외작육진 집위실유 부지개시 자심소작)
밖으로는 육진(六塵) 경계의 대상을 지어서 실재 '그 자체가 있다'고 여겨 집착하니 그 모두가 자기 마음으로 지어낸 것임을 알지 못한다.
如幻如夢 永無所有 於中橫計 男女等相 (여환여몽 영무소유 어중횡계 남녀등상)
환상 같고 꿈 같아서 결국에는 있는 바가 없는데, 그런 가운데 멋대로 남녀 등의 모양을 헤아려서
起諸煩惱 自以纏縛 長沒苦海 不求出要 (기제번뇌 자이전박 장몰고해 불구출요)
온갖 번뇌를 일으켜서는 스스로 옭아매어 놓고 오래도록 괴로움의 바다에 빠진 채 벗어날 요체를 구하지도 않으니
靜慮之時 甚可怪哉 (정려지시 심가괴재)
선정에 들었을 때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라.
猶如眠時 睡蓋覆心 妄見己身 大水所漂 (유여면시 수개부심 망견기신 대수소표)
비유컨데 잘 때에 잠이 마음을 덮어서, 망녕되이 제 몸이 큰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不知但是 夢心所作 謂實流溺 生大怖懅 (부지단시 몽심소작 위실유익 생대포거)
그게 단지 꿈꾸는 마음이 빚어내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실제로 물에 빠진 줄로 알고 큰 두려움이 생긴다.
未覺之時 更作異夢 謂我所見 是夢非實 (미각지시 갱작이몽 위아소견 시몽비실)
꿈이 미처 깨지 못한 채로 또 다른 꿈을 꾸기도 하거니와, '내게 보이는 것 이게 꿈이지 현실이 아니다'하고 이를 수 있으나
心性聰故 夢內之夢 卽於其溺 不生其懅 (심성총고 몽내지몽 즉어기익 불생기거)
심성이 밝은 이는 꿈 속에서 꿈인 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물에 빠졌다 해도 그리 두려워하지는 않으나,
而未能知 身臥床上 動頭搖手 勤求永覺 (이미능지 신와상상 동두요수 근구영각)
아직 제 몸이 침상에 누워 있음을 알지 못하니 머리를 흔들고 손을 내저으면서 완전히 깨어나려고 애를 쓴다.
永覺之時 追緣前夢 水與流身 皆無所有 (영각지시 추연전몽 수여유신 개무소유)
꿈이 완전히 깨었을 때에 그 꿈을 더듬어 돌이켜 보면 물과 더불어 물에 떠다니던 몸도 다 실재가 아니며
唯見本來 靜臥於床 (유견본래 정와어상)
단지 본래 침상에 고요히 누워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長夢亦爾 (장몽역이)
인생의 긴 꿈도 또한 그러하니,
無明覆心 妄作六道 流轉八苦 (무명부심 망작육도 유전팔고)
무명으로 덮은 마음이 망령되이 여섯 가지 윤회의 길을 지어내고 윤회의 여덟 가지 고(苦)에 흘러 다닌다.
內因諸佛 不思議薰 外依諸佛 大悲願力 (내인제불 부사의훈 외의제불 대비원력)
안으로는 여러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훈습에 말미암고 밖으로는 여러 부처님의 큰 자비의 원력에 의지하여
髣髴信解 (방불신해)
겨우 믿음과 이해에 가까워지리라.
我及衆生 (아급중생)
나와 중생은
唯寢長夢 妄計爲實 違順六塵 男女二相 (유침장몽 망개위실 위순육진 남녀이상)
다만 인생의 긴 꿈을 꾸면서 허망하게 실재라 헤아리고 육진 경계와 남녀의 두 가지 모습에 마음에 거슬리거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並是我夢 永無實事 何所憂喜 何所貪瞋 (병시아몽 영무실사 하소우희 하소탐진)
모두 다 내 꿈이고, 길이 실다운 일이 아니거늘 무엇을 걱정하고 기뻐하며, 무엇을 탐내고 성내리오.
數數思惟 如是夢觀 漸漸修得 如夢三昧 (삭삭사유 여시몽관 점점수득 여몽삼매)
자꾸자꾸 사유하여, 이와 같이 꿈으로 보면 점점 닦아 여몽삼매(如夢三昧)를 얻으리니,
由此三昧 得無生忍 從於長夢 豁然而覺 (유차삼매 득무생인 종어장몽 환연이각)
이 삼매로 인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고 그리하여 긴 꿈으로부터 활연이 깨어나면
卽知本來 永無流轉 但是一心 臥一如床 (즉지본래 영무유전 단시일심 와일여상)
곧, 본래부터 윤회하여 흘러다니는 것이 영원히 없으며 다만 '한 마음(一心)'이 '한결같이 진여(一如)'의 침상에 누워 있을 뿐임을 바로 알게 되리라.
若離能如是 數數思惟 雖緣六塵 不以爲實 (약리능여시 삭삭사유 수연육진 불이위실)
만약 이와 같이 거듭거듭 사유하여 꿈을 능히 여읠 수 있고, 비록 육진(六塵)을 반연할지라도 그것을 실다운 것으로 삼지 않을 것이며
煩惱羞愧 不能自逸 是名大乘六情懺悔 (번뇌치괴 불능자일 시명대승육정참회)
번뇌를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방일하지 않을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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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 출처... 다음 TIP 에서 옮겨온 것이다.
옛 성인들의 말에는... 지식에 대해서 '무지몽매한 것'이라고 하거나 또는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는 것' 이라고 하거나, 더 나아가 인간을 인간이라고 보지 않고... 길잃은 어린양으로 보거나, 짐승들보다 더 뛰어날 것이 없는 것들이라고 표현 한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플라톤이라는 중생에 의해서 전해지다 보니... 인간들의 앎은 '지식'이며, 자신의 앎은 '眞知' 라는 말로써... 진실된 앎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된 것 같다.
간혹....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이라도 있다면..." 이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일념법수행으로써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을 뜻하는 말이며... 진리를 이해 하여 실천하는 이들을 이르는 말이다.
일념수행으로써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한다는 것은... 언어의 상대성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며, 명색의 동일시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허구를 보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들과의 갈등이나 다툼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스스로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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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들... 사실,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일념법 수행으로써 '생각의 원리'... 즉 생각의 속성과 이치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 하는 인물이라면... 부처의 견해가 아니라, 하근기 중생의 견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싯다르타의 말을 보니... '정견' 이라는 말에 대한 설명에서... 정견이란,... 인간들의 지식들과 같이....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것' 이라고 했기 때문이며, 또한 중됴란... 세상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본다면... 세상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세상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본다면... 세상의 소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중도'에 대해서 현시대의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 한다면... 언어가 본래 없는 것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본다면 언어가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언어가 있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본다면 언어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이는 또한... '죽은자' 의 입장에서 본다면 삶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자에게는, 산 자들과 같이... 생각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멸멸이, 적멸위락... 이라는 말... 의 본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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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아닌, 용수보살 등의 옛 말들에 집착하여 언술을 겨루는 것 같다. 위 원효대사의 '대승육정참회' 라는 글 또한 하근기 중생의 견해로써...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것들이며, 위의 글들에서 참고할 만한 구절이 있다면.... 인간들의 삶이 꿈과 다르지 않다는 비유 내용으로써... 꿈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이... 삶 또한 그렇다는 내용이니 그 구절만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이 쯤에서... 전의 글 중에 '서산대사'의 게송 중에... '생각이 화롯불에 떨어지는 흰 눈과 같이 소렴되어 사라진다' 는... 구절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일념수행으로써 일념이 깊어져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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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승' 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어긋난 것이며, 대승과 소승을 분멸한다는 일 또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진리를 구하는 일이며, 진리를 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보기 위한 수행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경전들은... 진리를 구하기 위한 방법론이 아니라... 우상숭배사상을 목적으로 쓰여진 것들이며, 하근기 중생들의 말 재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말하기를... '나의 말을 옮기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이다' 라고 했던 것이다.
"불 법 승" 을 삼보, 즉 세 가지의 보물로 여기는 자들... 석가모니의 입장으로 본다면... 짐승보다 더 미천한 중생들인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시명불성. 시명중도' 라는 말과 같이... 일념법수행으로써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이라도 생겨나게 된다면... 부처 또한 '이름' 으로써만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양자물리학에 의해서 밝혀진 사실과 같이 물질이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까지도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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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그대가 우상숭배사상에 길들여진 하근기 중생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글로써... 위의 대승육정참회라는 글이나 인간세상의 모든 경전들의 오류를 볼 수 있다면... 상근기 인물이다. 그들의 가르침... 우상숭배사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보라는 말이며, 마음의 실체를 찾아서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싯다르타, 노자, 예수... 등의 가르침이 있다면... 그 첫째는 진리를 구하기 위한 방법론 즉 수행론이며... 그 다음이 방편설이다. 그런데... 인간세상의 모든 경전들을 보니, 방법론은 사라지고 방편설들만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볼 수 있다면... 그대는 현명한 사람이며, 열정만 있다면... 이곳에 설명된 '일념명상법'으로써 진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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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육정참회론... 길들여진 사냥개와 같이, 우상숭배사상에 길들여진... 하근기 중생들이 본다면, 합장하거나.... 관세음 보살... 어저고 저쩌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일념수행법으로써 생각의 윈리에 대해서 다만,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기만 하더라도...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밀재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일이다.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의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 는 말' 그리고 싯다르타의 -네 본래성품이 부처다- 는 말...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는 말들...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써 자신을 보라는 뜻이며, 진리란 지식과 같이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일념수행법으로써 '스스로 아는 것' 으로서의 진실된 앎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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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상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말이 있다면... 사람들의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말이며, 사람들 모두가...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해서 애쓰는 일이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더 신비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이상한 이상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인간들의 삶들, 경쟁들... 서로가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 성공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돈에 목숨 거는 사람들... 욕망에 찌들어 자살 하는 사람들, 범죄자들... 더 나아가...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런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신비스럽기만 하다.
왜 그럴까?
왜?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사람들을 신비스러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일까?
인간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은... 인간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자신이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진짜 자신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 애 쓰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서로간의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며, 사라질 수 없는 것이며... 다툼 또한 생겨나기만 할 뿐,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죽은 다음엔 모두(그대와 우주 까지도...) 소멸된다.
그 속에서 행복??? 자유??? 평화??? 어불성설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 내마음을 내마음이라고 안다는 것... 그 앎이 착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한다는 것... 그것에 대해서 진리를 이해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본래 있던 것으로써의 그대의 마음이 아니라... 어린아이시절부터 남들에게 말을 배웠듯이, 남들로부터 배웠던 지식들로 구성된 것으로써, 그대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남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남들의 마음을... '내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남들의 마음으로/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여러 남들의 마음이 지금 그대의 "내 마음"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결코 평화로울 수 없는, 결코 기쁨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본래 결핍된 존재가 아니라... 올바른 앎이 아닌 것이다.
진리가 아닌... 지식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아는 것... '도'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며, 진리라는 낱말의 뜻을 이해 하는 것이다.
진리와 인연있는 이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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