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2 조 년 전, 그리고 기원전 120조 년 전의 인간세상에서도 현시대와 같이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우주를 수 차레 왕복 한 수에 비로소, 지성체들은 '도'를 갈망하게 되었고, 현 시대와 같이... 수많은 집단들이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곤 했었다. 그런 세상이 멸망한 이후... 남겨졌던 인간들이 다시 세상을 건설하던 시대가 싯다르타 고타마가 존재 했던 시대인 것 같다.
인간들은 그 시대에 대해서 기원전 6 세기 경으로 추측하는 것이며... 사실 그 시대 쯤에 세상에 나투었던 인물들에 의해서 지식을 초월한 '진리' 가 전해지기 시작 한 것 같다. 인간류의 역사를 보니... 싯다르타-고타마, 그리고 소크라테스, 노자와 장자 그리고 나사렛 예수 등이... 기원 전에 존재 햇던 인물들이며... 21세기 현새대까지도 지성체들은 그들의 말을 오해 하고 왜곡하여 전쟁의 도구로 삼는 것 같다.
사실 무지를 아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라는 말을 했던 인물이 척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이다. 그리고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인물 또한 소크라테스이며... 자신의 나를 알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인물이 예수 인 것 같다. 물론 모두 추측이다. 하지만 예수의 40일 동안의 단식 이야기와 싯다르타의 고행으로 알려진 수행으로 볼때, 그들의 삶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며,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은... 뚜렷한 목적 의식 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초기경전이라는 싯다르타의 기록들 또한 싯다르타의 진언이 아니라, 언술이 뛰어난 자들에 의해서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된 것이다. 하지만 수행과정 만큼은 사실적이며, 무모하기 이를데 없는 방법으로써 인간들의 관념으로 본다면 미친 짓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미친 짓으로 보이는 것 중에 첫째가 있다면... 자신의 몸을 스스로 죽여 보기 위해서 음식을 먹지 않고 굶겨서 죽게 해보려고 시도 했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아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여 죽을 수 있는지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통념이란... 몸과 나를 동일시 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내가 음식을 먹는 것이며, 내가 숨을 쉬는 것이며, 내가 행위자라고 생각함에 대해서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상식에 대해서 남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선택한 것이며, 목숨을 끊어 보기 위해서 그런 무모한 짓들까지도 서슴치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육체가 '나, 또는 '내것'이라면... 삶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숨을 쉬거나 쉬지 않거나... 자신의 뜻대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경험,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확인하여 아는 앎에 대한 진언이... "육체는 '나' 가 아니며, '내것도 아니며' '나와 비슷한 것도 아니다'" 라는 앎이며, 지식과 같이 '남들을 의존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것'으로써의 앎이기 때문에... 정견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육체'인데... 나는 왜, 그것을 "나(我)' 라고 알게 된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 보더라도 왜, 그것을 나라고 알게 된 것인지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다만... 육체가 나다라고 알게 된 것이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히 알게된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말은... '너희가 근심과 걱정으로써 키를 한치라도 더 키울 수 있겠느나' 라고 묻는 방식으로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 같다.
싯다르타의 수행은 6 년여 동안이라고 알려져 있다.
도대체 '내가 아닌 육체를 나라고 알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사유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그에게는 오직 그 한구절에 대한 의문을 푸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 의미, 뜻이 된 것이며... 사유에 사유를 거듭한 결과 비로소... '생각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은... '육체가 나라는 생각일 뿐, 나가 아닌 것이며 또한 나가 아니라는 것 또한... 올바른 앎이 아니라 단견이라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바르게 알게된다.
뱀에 물려 죽을뻔한 사람이... 길가에 떨어진 새끼줄을 보고서 깜짝 놀라서 도망쳤다가, 다시 되돌아 가서 그것이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꿈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두려움에 떨다가... 꿈을 깨고나서, 휴우 하고 안도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 일이며... 남들의 말에 대해서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은채...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종교들이나, 기타 인간세상의 재능이나 지능을 견주는 모든 지식들 또한 꿈과 같은 무모한 짓들이며, 몽상이며, 망상일 뿐, 사실적인 앎이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나라고 아는 앎 자체가 근거가 없는 것이며, 세상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본다면 세상이 있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세상, 삶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삶은 즐거움과 평화라야 하는 것이며... 그런 삶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 '진리'를 아는 앎, 즉 진실된 지식을 얻는 것이며 그 방법이... 스스로 아는 것으로써의 '진리' 이다.
사실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 있다면... 죽음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불치병으로써의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만 이해 할 수 있을 뿐, 보는 사람 마져도 고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극심한 고통을 지켜 보는 사람 또한... 고통을 겪던 사람이 숨을 멈추는 순간,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며... 죽은 자의 고통의 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 때 비로소 죽음의 평온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늙음과 병듦으로써 양노원이나 또는 정신병동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은... 누가 보더라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인간들의 삶의 끝... 인생의 결과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도에 들어간다는 것, 진리를 이해 한다는 것은... 그런 고통의 소멸을 위한 것이며... 스스로 아는 것으로써의 올바른 앎으로써 몸을 몸이 아니라고 아는 것이며, 마음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올바른 앎으로써.... 삶 자체를 즐거움과 평온함으로 여여하게 보내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죽는 날까지도 무위자연과 같은 건강함을 유지하므로써 죽음 또한 고통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삶의 입장에서 본다면, 죽음은 두려운 것이며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죽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죽음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삶이 있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상....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와 인연있는 이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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