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죽이는자에게 죽음은 없고
삶을 살려는자에게 삶은 없다'는 말은.. 진리자 예수의 진언이며, 진실된 지식.. 즉 인간관념으로는 사유쟈체가 불가능한.. '비밀의 언어'이다.
무슨뜻이냐 하면, 사실 인간들 누구나 다 똑 같이..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지만,
사실은 삶도 경험할 수 없고, 죽음 또한 경험할 수 없는.. 무지몽매한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라고 본다면.. 이시대의 현자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하근기는 박장대소하고, 중근기는 반신반의하고, 상근기는 도를 깨닫기 위해서 목숨도 건다'는.. '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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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수 말하기를..
나는 어디에나 있다. (나는 진리, 만유, 빛, 새생명'이다)
돌맹이를 들어 보라, 거기에 나가 있고..
나는 깨진 기왓장 속에도 있고, 쪼개진 장작 속에도 '나'가 있다... 는 말과 같이..
'도는 만물의 근원이며.. 도는 어디에나 있다고 자세히 설명했던 인물들이.. 노자, 장자이며, 소크라테스이며.. 석가모니이다.
도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며.. 심지어 미천한 개구리 속에도 깃들어 있다는 '노자, 장자'의 이야기와 같이.. 일체중생 개유불성이라는.. 석가모니의 말과 같이.. '그것'은.. '진리'는.. '깨달음'은.. '도'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어디에나 있다는 말이지만.. 어리석은자들은 그들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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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심불가득.. 현제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렇다.
그대는 마음이 있으되, 과거의 마음을 찾을 수 없고, 현제의 마음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다. 사실은.. 과거가 있기 때문에.. 즉 과거가 있다는 관념에 의해서 현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현제가 있기 때문에.. 미래가 있다고 믿겠지만.. 과거, 현제, 미래 또한 개개인 인간들 저마다의 기억속에만 있는 '환상, 몽상'일 뿐.. '사실'이거나 '진실'이 아니라는 말로서.. 비유를 든다면.. "사람들은 모두 다 거짓되다'는 예수의 말과 같이... 인간류의 무지와 어리석음의 한계가 우주보다 더 무한하다는 뜻으로 본다면... 이시대의 현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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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 참..
'죽은자'가 어디에 있는가?
죽은자가.. 땅 속에 묻혀 있는가?
아니다.
죽은자에게는.. 죽음이 없고,
이와 같이 산자에게는 삶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는 게 아니다'는 뜻이다.
우주는 어디에 있는가?
사실은.. 만약에 우주가 있다면.. 만상만물들 모두 다 우주이며, 우주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대의 '몸 속에 있다고 여겨지는.. 오장육부.. 혈액.. 살, 뼈, 세포.. 세균.. 등의 모든 것들이... 그대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모두가 다 그대이며, 그대의 몸인 것과 같이.. 우주에서 본다면, 인간을 비롯하여 세상 모든 것들 또한 우주에 속한 것이며.. 우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주이다.
참으로 어리석은자들이.. '천문학'을 연구한다며.. 빅뱅이 어떻고, 공룡이 어떻고, 별에 대해서 연구한다며.. 왈가왈부 마구 지껄여대지만.. 선각자들에 의해서 창조된 '언어'로서의 '우주'가.. '집 우.. 집 주..' 자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사실은 인간들 또한 우주에 속한 것으로서.. 본래 우주라고 본다면.. 이시대의 현자일까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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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산자들의 망상망념.. 망언일 뿐...
'죽은자'에게는.. '내가 죽었다'는 기억이나 생각이나, 내가 죽었다는 마음이나 의식이나 지식이나, 영혼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죽은자들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게 아니라, 삶이 있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 서로 평화롭게 살라는 뜻이며, 죽음 또한 본래 없다는 사실을.. '일념법명상, 일념법수행'을 통해서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뜻이며.. 남들에 대해서, 죽은자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알라는 뜻이며..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진실된 뜻이 그러하다.
명제의.. 아래의 이야기들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기에..
진실로 귀하고 귀한 인연있는 인물들을 위해서나마.. 간략히 설명하는 것이다.
--- 아 래 ---
'콧줄' 단 채 생의 마지막을 맞아야 하는가
송병기 입력 2019.09.12. 12:19
“또 곡기를요? 그러다 엄니가 다시 펄펄 힘이 나서 일어나시면 그때는 큰딸이 언제까장이나 여기 곁에 남아서 뒷감당을 책임져주실라요? 그러다 아직 저렇게 기력이 허하신 양반한테 외려 해가 되시지 않을랑가 걱정이 되요마는….” 이청준의 소설 에서 ‘외동댁’은 늦은 밤 어머니의 곡기를 걱정하는 광주 큰시누이에게 원망스러운 듯 목청을 높인다. 노인의 아들 내외와 딸들은 며느리인 외동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가 30대에 남편을 잃고 그 후로도 30년 가까이 어머니를 홀로 모셔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6년간 노인은 치매를 앓았다. 돌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돌아가신 줄만 알았던 87세 어머니가 극적으로 회생하자 장례를 모실 줄 알고 시골집에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은 이제 노인의 먹고 사는 문제가 난감하다. 방안에 말없이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한 번 더 곡기를 입에 넣어드리는 것이 해가 될지 득이 될지 모르겠으나, 시누이는 먹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갈등을 잘 이해하고 있는 노인의 아들은 침묵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한다. 눈치를 보던 아들의 부인이 조용히 녹두 미음을 들고 와서 노인의 닫힌 입술 사이로 음식을 흘려 넣는다.
가족이 스스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는 노인의 먹고 사는 문제로 한바탕 시끄럽다. 미수(米壽)를 한 해 앞둔 어머니를 걱정하며 ‘윤리적’ 태도를 취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이 상황이 노인에게도 마땅했을까. 명확하지 않다. 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무엇이 그에게 최선의 돌봄인지에 대한 논의도 부재하다. 가족들이 윤리적이라 여기는 행위는 명시적 가치규범인 효(孝)와 각자의 처지를 반영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가족 사이의 도리가 강조되고, 며느리의 ‘나 홀로’ 돌봄은 간과되며, 노인의 목소리는 소외된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를 통한 가족의 오래된 질서를 돌보고 있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도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무연고자 노인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돌봄이 제공된다. 2014년 한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ㄱ노인요양원’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서울 강북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노숙자와 행려병자를 위한 사회복지시설이었다. 200명이 넘는 입소자 대부분이 80대와 90대였다. 요양원에서 특히 눈여겨본 곳은 가장 중증인 노인이 모여 있는 1층이었다. 중환자실을 연상케 하는 공간에 노인 10여 명이 눈을 감고 웅크린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간호부장은 이들이 이곳에서 평균 10년쯤 살다가 사망한다고 했다. 그는 1층 노인들이 각별한 돌봄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ㄱ노인요양원의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들은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어르신을 모시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르신이 먹고 사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간호부장이 가장 강조한 건 생명의 신성함이었다. 그에 따르면, 생명은 신의 영역이므로 인간이 함부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명은 지속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그는 약자를 향한 인간적 의무를 말했다. 갈 곳 없고 음식물을 스스로 섭취할 수 없는 노인 환자는 우리 사회에서 최약자이므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환자가 굶어 죽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수분·영양 공급은 의료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돌봄이라고 설명했다.
삶의 질과 관련 없는 비위관 삽입정작 내 눈길을 끈 건 이들이 ‘식사’하는 모습이었다. 1층 노인들은 입을 통해서 먹지 않았다. ‘콧줄’이라 불리는 비위관 삽입(L튜브:Levin tube insertion)을 통해서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았다. 비위관 삽입은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환자의 코를 통해 식도를 지나 위까지 삽입하는 관(管)으로 음식물이나 약물을 투여하는 의료적 시술을 뜻한다. 이는 서구에서 신경계 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 환자를 대상으로 1980년부터 빠른 속도로 확대됐다. 한국에서는 2008년 도입된 장기요양보험제도와 더불어 늘어난 요양병원과 요양원에서 일상적 시술로 자리 잡았다.
중요한 건 비위관 삽입이 어디까지나 ‘의료적 시술’이라는 점이다. 이 시술이 상당 기간 진행된 알츠하이머-치매, 신경질환과 연하곤란(삼킴 장애)을 겪고 있는 와상(臥牀) 환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의학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근거는 미비하다. 의료인은 환자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비위관 삽입을 결정해야 한다. 환자의 상태와 삶의 질을 ‘충분하게’ 향상시키지 않고 수명만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비위관 삽입에 대해 입소자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노숙 생활을 하다가 아픈 몸으로 길에서 발견되고, 응급실을 거쳐 요양원으로 들어온 노인들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이들이 이 의료행위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의사를 밝히면서 자기결정권을 주장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들의 뜻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줄 가족이나 지인도 없는 상황이다.
온갖 윤리적 수사로 뒤덮인 그 돌봄의 대상은 노인들의 생명 그 자체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는 정해진 시간에 콧줄을 통해서 노인들에게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고, 기저귀를 관리하며, 욕창을 예방한다. 숨 쉬고 먹는 콧구멍을 가진 존재로 전락한 노인들은 10여 년간의 조용한 와상 생활 끝에 ‘자연사’한다. 이렇게 간호사와 요양보호사는 무연고 노인들의 생명을 존중하고 있다. 이 ‘생명 존중’이 곧 요양원의 운영 원리이고 질서다.
ㄱ노인요양원 간호부장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요양원에 입소할 수 있는데, 그때 여기 노인들처럼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해서 비위관 삽입을 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간호부장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저는 절대 싫어요. 저는 이러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나이가 좀 더 들면 사전의료의향서를 꼼꼼하게 써놓을 생각이에요. 가족들에게도 내 생각을 명확하게 이야기해놓아야죠.”
비슷한 시기 서울 강남 지역의 ‘ㄴ구립요양원’도 살펴봤다. 최소 5년은 대기해야 입소가 가능하다는 이 요양원은 지역 내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원장은 입소자들의 수분·영양 공급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콧줄이라 불리는 비위관 삽입은 노인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어르신들이 입으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은 돌봄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이 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입소자들의 식사 수발을 든다고 했다. 이 요양원은 비위관 삽입을 하고 있는 노인은 애초 입소 과정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이곳을 노인들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는 “생의 마지막 집”이라고 표현했다. 원장과 간호사들은 좋은 죽음을 “잠자듯, 고통 없이 죽는 것” 또는 “노화에 의해서 자연스레 죽는 것”으로 정의했다. 자연사가 좋은 죽음이라는 의미였다. 이 관점에서 콧구멍으로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 된다. 보호자들도 비위관 삽입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역시 콧줄이 노인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연장하는 의료라고 규정했다. 고통스러운 생애 말기를 연장하는 것은 보호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더욱이 생애 말기 돌봄 경험은 보호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은 노부모를 돌볼 때 무엇을 참고하고, 믿고,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문제를 ‘알아서’ 해왔다. 친족 자원을 동원하고, 사보험의 도움을 받고, 소문과 인터넷 정보를 참고하면서 노부모를 집에서, 응급실에서, 대학병원에서, 요양병원에서, 이제는 요양원에서 돌보고 있었다. 보호자들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집이 아닌 요양원에 모셨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고 고백했다.
요양원에서 맞이하는 가장 좋은 죽음요양보호사들은 식사 수발을 ‘전쟁’으로 표현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아 보였다. 넓은 거실에서 요양보호사 2명이 10명이 넘는 노인을 챙겼다. 다수의 입소자는 음식에 관심이 없거나 스스로 식사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촘촘한 업무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 안에 식사 수발을 마쳐야 했다. 좀처럼 음식에 관심이 없는 노인을 달래는 것도, 밥 한술 먹고 한참을 우물거리는 노인을 무한정 기다리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요양보호사들은 반찬을 으깨고 물에 밥을 말아 목 넘김이 수월하도록 유동식을 만들었다. 거기에 살포시 약을 올려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부드럽고 신속하게 노인들의 입속으로 수분과 영양을 공급했다. 이 요양원에서 노인은 집중적인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환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노인들은 인지 및 신체적 불편을 겪고 있었고, 그 불편은 의료 전문가에 의해서 치매·당뇨병·식이장애·우울증 등으로 진단됐다.
‘인공적인’ 비위관 삽입을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생애 말기 돌봄을 받고 있는 이 요양원의 입소자들은 어떻게 임종할까. 생긴 지 5년이 넘은 이 시설 안에서 사망한 노인은 단 2명이었다. 밤에 자다가 자연스럽게 돌아가셨다고 했다. 요양원에서 좋은 죽음으로 여기는 바로 그 자연사다. 이들 외에 임종한 노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머지는 모두 시설 밖인 병원에서 임종했다. 간호사들은 입소 노인에게서 임종 증세를 발견하면 곧바로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해 응급실로 가기를 요청했다. 간호부장은 이곳이 노인들의 여생을 보내는 마지막 집이지만 임종 장소는 아니라고 했다. 요양원은 병원도 호스피스도 아니라는 이유였다. 임종은 의사가 있는 병원이나 집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가 없는 요양원에서 노인이 임종했을 때 보호자가 의혹이라도 제기한다면 요양원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보호자에게는 이러한 상황이 큰 스트레스였다. 한 보호자는 현재 본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근심이 “임종이 임박했다는 연락을 받고 부모님을 응급실에 모셨는데 부모님의 몸 상태가 좋아져서 다시 시설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어렵게 입소한, 평판 좋은 요양원에서 짐을 빼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강연집 (동녘, 2016)에서 윤리는 특정 시대의 제도·담론·지식·기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생애 말기에 이르러 유독 강조되는 ‘윤리’ 역시 마찬가지다. 연명의료결정법처럼 각 개인에게 부여되는 가치 체계는 개개인이 갖고 있는 ‘일상적 윤리’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문제는 이러한 윤리가 당사자인 노인을 끊임없이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령화사회가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된 문제를 윤리의 이름으로 가족, 특히 여성(요양보호사·간호사·딸·며느리 등) 책임으로 전가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존엄하지 못한 돌봄의 경험은 결국 존엄하지 못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생애 말기 돌봄을 담당하는 주체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지 않으면서 의료적·생물학적 돌봄만을 최선인 양 여긴다. 대부분 병원에서 죽고 있기 때문에 그 ‘나머지’ 죽음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터부와 혐오는 그 위에서 싹튼다.
송병기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인류학)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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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the-truth.com '진실된 말은 꾸밈이 없고, 꾸며진말에는 진실이 없다'
설령 시공간(時空間)이 있다고 하더라도..
설령, 삶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죽기 위해서 사는 일에 대해서.. '인생'이라고 부르는 무지몽매한 거것이.. 명색(名色)이 인간이다.
'명색'이라는 구절은.. 붓다의 12연기법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 중에서 4번째 등장하는 말로서.. 인간이 본래 인간이 아니라, '이름' + '형상'으로 이루어진.. 허구적인 것이며, 유명무실한 것이며, 허무맹랑한 것'으로서... '실체'가 없다는 뜻이며, 단지 기억의 오류에 의해서 생겨난 '환상'이라는 뜻이며.. '몽상' 즉, 인간들의 인생은.. 꿈과 같은 '생각'이라는 뜻이며.
이는 또한.. 독일 영국의 뇌신경과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사실과 같이.. '인간은 뇌에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이라는 말과 같이... 인간들 누구나 다 똑 같이.. '기억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로 이해 한다면.. 이시대의 현자이며.. 사실은 '도가'의 진실된 일념법구도자들만이.. 일념삼매를 통해서 깨달아 알 수 있는.. '진실된 지식'이며.. 인간세상에 알려질 수 없는.. '새로운 지식'이며.. 인간류, 중생들에게는 영원히 비밀이 아닐 수 없는.. '비밀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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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벌 3세 들이.. 마약에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들이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까지도 술에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들이 방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삶에.. 인생에.. 뚜렷한 답,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노후를 위해서 돈을 벌 일이 아니라, 올바른 지식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는..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발견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의.. '너희에게 올바른 앎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생겨난다면.. 기적을 행 할 수 있다'는 말과 같이... 올바른 앎, 인간세상에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인간관념으로는 영원히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식'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며.. 지식 너머.. 진리를 발견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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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리석은자들이... 권력에 눈이 멀어서 권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이.. 재물이나 명예 눈 먼들이.. 온 갖 질병에 걸려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살 일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최소한 자신의 건강 만큼이라도.. 스스로 책임 질 수 있는.. '진실된 지식'을 깨달아 알라는 뜻이다.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만 생견나다면..
설령 죽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죽는 날까지.. 죽는 그 순간까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설령 죽음 앞에 다가 선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나는 기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이 있는 것이며.. 그런 지식에 대해서.. '진실된 지식'이라고.. '새로운 지식'이라고 설명했던 인물들이.. '석가모니, 노자, 장자, 예수, 소크라테스.. 까비르, 상카라, 라마나 마하리쉬' 등의 '진리자' '인간 이상의 존재' '유일자, 절대자'들이라고 본다면.. 이시대의 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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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예수가 재림하거나, 미륵부처가 나툰다고 하더라도..
21세기로 알려져 있는 현시대의 보편적인 언어로..
이와 같은 '진실된 지식'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
헛 참..
어찌하여.. 생의 마지막 집이.. 양노원이나 요양원이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왜 그다지도, 비참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가 말이다.
왜? 살아 있는 동안에..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가 말이다.
이와 같이.. 무지몽매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전지전능한 지식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지몽매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참된이칠치라는.. '진리'가 있는 것이다.
'일념법'이 진리이며, 진리를 향한.. 진리를 위한 유한 법이다.
무거운 짐진자여.. 모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줄 것이니..
나를 먹고, 나를 마시고.. 진리로 거듭나라.
진리, 오직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