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말과 '생활'이라는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실 '생활'이라는 말은 '생명활동'이라는 뜻으로써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약육강식'이라고 생각하며, 생태고리 현상이라고 주장하지만, 인간들의 삶은 자연과는 뭔가 다른 차원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자연계라는 말이나 또는 '생태고리 현상'이라는 말은 자연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관념(인간의 척도)(편견, 소견 단견)일뿐 올바른 앎일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계는 스스로 '내가 자연계다'라는 '주관(관념, 말, 뜻,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라는 말 또한 그러하다. 말을 배우기 이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말을 모르는, 말이 없는) 아이에게는 '내가 어린아이다'라는 생각이 없으며, '내가 사람이다'라는 생각 조차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삶이 자연계의 존재들과 같은 단순한 생명 유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동물들과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이 창조되기도 한 것이겠지만... 사실 짐승보다 더 뛰어난 인간은 없는 것 같다.
만약에 인간이 '우리는 짐승보다 더 뛰어난 동물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에는 어떤 근거가 있는 걸일까?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는 어떤 근거를 두고서 인간이 뭇 짐승들보다 더 뛰어난 동물들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아니면 인간의 어떤 면이 짐승들보다 더 뛰어난 것일까?
문명, 발전, 문학... 학문들... 그런 것들이 인간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일까? 인간이 그런 것들로써 행복이나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것들로써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은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는 자유로운 사람, 자유를 찾았다는 사람, 자유를 누린다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아니. 자유라는 말 조차도 사람마다 제각기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 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것이 자유다 또는 저런 것이 자유다' 라는 주장들만 무성할 뿐, 자유라는 낱말 하나 조차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이 인간들의 지식이라는 무지이며, 지식의 허구이다. '자유'라는 낱믈의 뜻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 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자유'에 대한 이해는 '무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위자연'에 대해서 자유라고 하는 것이다.
자연은 무위이며 자유 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이 곧 자유 이다.
인간드의 삶... 모두가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자연스럽지 못하기 대문에 꾸미는 것이며, 꾸미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이니... 어찌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답게, 인간답게' 살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과연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답게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부류들의 삶에 대해서 인간답게 사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인간답게 산다는' 기준은 어떤 인간이 정하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의 기준을 말하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에게... 인간들끼리...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기준을 정한 것이다. 기준도 없는 기준을 정한 것이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인간이기 때문이며, 인간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이며, 누구나 제각기 자신의 관념으로써는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착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답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며,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나타나 보이든 간에.... 똑 같이.
서로가 자신이 더 옳다는 주장들... 그 자체가 모순이며, 인간답다는 말 자체가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라는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이다. 사실 인간을 짐승과 비교하여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거나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면... 짐승들이 비웃는다. 왜냐하면 최소한 짐승들은 '내가 더 옳다'고 주장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며, 인간들과 같은 '유위'가 아니라 '무위'이기 때문이다.
'무위'라는 말... 행위함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행위자'라는 생각이 없다는 뜻이며, 행위하는 주체가 없는 행위을 이르는 말이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인간들의 삶과 동물들의 삶의 차이가 무엇일까?
인간들이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난 것이 겨우 다른 생명체들을 이용하여 먹고 사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가 잘났다며 잘난체 하거나, 경쟁하거나, 투쟁하거나, 전쟁을 일삼는 짓들일까? 죽는 날까지 해야 하는 짓들이... 서로간에 잘난체 하기 위해서일까? 행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한 것일까?
사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온전히 변합없이 사랑할 수 있는 지혜는 있는 것일까?
새끼를 온전하게 지키려는 행위에는 짐승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 있는 것이 인간일까?
자세히 관찰해 본다면 사실 인간이 짐승들보다 더 뛰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아니다. 꼭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늙은 부모를 죽는 날까지 부양하는 것이겠지만... 그 또한 아득한 옛 날의 이야기로 남겨지는 것 같다. 요양원이니, 양노원이니... 등등의 시설들이 늘어가는 것을 보니 말이다.
도대체 인간들의 삶에는 어던 의미가 있는 것일까?
종족을 보전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동물이나 짐승들보다 더 잘먹기 위해서 사는 것일까?
잘 먹는 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을 어떻게 먹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먹는 것에 대해서 잘먹는 것이며, 잘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잘먹고 잘산다는 것에 대한 논란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어어져 오는 논란들이며,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 또한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논란일 뿐, 세상에는 '내가 잘사는 사람이며, 나처럼 사는 삶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이 인간들의 삶인 것 같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은 하는데, 옳다는 주장은 끝이 없는데... 정작 '나 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노인들 하는 말이 참으로 걸작이다.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말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 그리고 '잘살아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통념이다. 누구나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근거가 없는 말이며, 사실적인 말이 아니라 허구적인 말이라는 뜻이다.
모두 옳은 말인 것 같지만, 사실상 근거가 없는 말들이며, 참으로 허무맹랑한 말들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누구도 인생의 해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신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여 평화로움을 누리거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져 남들로부터 주어 들었던 말에 대해서 사실인냥 주절거리는 것들일뿐, 근거가 없는 말들이며 낭설들이 아닐 수 없다는 뜻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런 망령스러운 말들을 할 수 있겠는가말이다. 그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가족들에게, 자식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된다거나 저렇게 살아야 된다는 말들 또한 그런 말들과 다르지 않은 그대만의 착각이며,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라는 뜻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났다고 생각하는 인간동물들의 삶과 (인간의 관념으로 볼때에만...) 지능이 낮다고 생각하는 자연계... 동물들의 삶을 비교해 본다면, 과연 인간들의 삶이 동물들의 삶보다 더 잘 사는 삶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말이다.
사실 자세히 관찰해 본니 인간들의 삶이 짐승들의 삶보다 더 뛰어난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또한 인간들에게 '너희가 짐승보다 더 뛰어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라고 물었던 것 같다. 허긴 석가모니 또한 인간들이나 짐승들이나 똑 같은 중생이라고 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들 또한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동물들보다 더 뛰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본 것 같다.
소크라테스 또한 '너 자신을 모른다면 살아갈 가치도 없다'는 말로써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 알아야만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이해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가치 있는 삶'이란 노자의 말과 같이 '천지만물과 자아와의 분별이 사라진 지인'의 삶을 이르는 말이며, '도'를 이해 하는 삶을 이르는 말이며,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의 삶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 선함과 악함이라는 분별심은 인간들에게만 있는 관념, 통념일 뿐, 동물들에게는 선함과 악함이라는 분별심이 없다. 불경이라는 어느 구절에 보면 "법성 원융 무이상" 이라는 말이 있다. 법의 성품, 즉 인간의 본성 또는 부처의 성품이 넓고도 넓어서 두가지의 '상'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두가지의 상'이라는 말이 곧 '선과 악이라는 분별된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써... 상대적인 모든 앎(지식)들로써는 이해 할 수 없겠지만... 올바른 앎이라면, 선함과 악함, 삶과 죽음, 인간과 신, 인간과 우주... 등의 분별심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의 진언이 왜곡된 '원죄와 천국'이라는 말이 허구적이라는 말이며, 석가모니의 진언이 변질된 '육도윤회' '극락왕생'이 허구적이며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관념으로 볼때에는 새가 벌래를 잡아 먹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새의 입장에서 보면 새는 벌래를 잡아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먹는 것이며, 벌래 또한 잡아먹힌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은 자신이 기르는 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벌래를 잡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새는 살려야 되며, 벌래는 죽여도 된다는 사고방식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쥐와 고양이 역시 그러함에 대해서는 책 비밀의 언어에 여러가지의 비유를 들어 자세히 설명되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동물들의 삶과 인간들의 삶의 차이가 그러하다.
동물들도 먹기 위해서 살며, 인간들도 먹기 위해서 산다. 그런데 인간들의 삶에는 단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을 넘어 동물들과 다른 것이 있는데... 그 다른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죽는 날까지 남들과의 다툼이나 논쟁, 경쟁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후회, 회한이 없는 삶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고통과 회한만이 남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상의 삶이 전쟁이니... 어찌 행복이나 평화... 자유를 누릴 수 있겠는가?
간혹 인간들은 인생의 지혜라는 말을 쓰기도 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자고 떠들기도 하는 것 같다. 과연 인간들의 지혜로은 삶이라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 적용되는 말일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인간세상의 '지혜로은 자'라고 하는 것들의 일상이 겨우 타인들의 욕망을 부추기는 짓들이며, 그로 인하여 명성을 얻거나 재물을 모으는 것들이다.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 서로가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라고 가르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우주보다 더 무한한 어리석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소위 '난 사람, 된 사람, 든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의 말인지, 왜 그런 말을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큰바위 얼굴이라는 동화를 비유로 들었던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아니다. 그런 비유 보다는 '바다의 노인'이라는 책의 노인의 삶과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의 삶에 대한 비유가 더 적절할 것 같다.
'바다의 노인'이라는 책의 내용은 노인이지만... 꿈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며, 젊은이들에게 힘을 과시하기 위한 노인의 투지를 그려내는 것 같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인간들의 삶은 항상 논쟁이나 경쟁, 투쟁, 전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닷가에서 작은 배한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바다의 노인'과는 사뭇 다르게 전해지는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매일매일 열심히 고기를 잡는데,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 하는데, 그 노인은 고기를 잡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묻기를... "노인께서는 날씨도 좋은데, 왜 고기를 잡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으니. 노인 말하기를. '나는 아직 먹을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라고 답변하더라는 것이다. 먹을 것이 남아 있는데, 굳이 배를 저어 고생 고생해가면서 고기를 더 잡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행복과 평화,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 같다.
'헤밍웨이'의 바다의 노인과 후자의 바다의 노인. 누가 현명한 자이며, 누가 지혜 있는 자이며, 누가 삶의 의미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자겠는가?
지금 이 순간 순간들... 현실에서 만족하여 평화를 즐길 수 있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욕망을 욕망하는 것일뿐, 만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 '도'를 이해 할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삶이라는 뜻이다.
'공자'의 '나는 오늘 저녁에 도를 깨닫는다면 내일 아침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한이 없겠다'는 말과 같이 '올바른 앎'으로써의 삶 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뜻이며, 자신의 나를 알아야만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대의 나, 그대의 나 아닌 나.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윤회법이 진리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법 수행터.
일념명상의 집 '도가' 바로가기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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