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간은 자연계에 대해서 생태고리 현상이라고 보며, 각각의 유기체들마다 천적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오직 인간동물들에게만은 천적이 없다. 인간동물들에게 천적이 없는 까닭은 인간의 지식이 곧 인간의 천적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천적인 까닭은 그 지식의 바탕이 올바른 앎이 아니라, 편견이며 단견이며, 소견이기 때문이다. 인간 지식이 편견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내가 있다'는 앎 자체가 상대적인 앎이며 편견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 라는 분별심이 모든 지식의 바탕이기 때문이며,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나외 너' 라는 분별심이나, 선과 악이라는 분별심이 없었다는 뜻이다.
소위 '도' '깨달음'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앎은 이원성이나 다양성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 '육체가 나다'는 생각과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은 한 생각의 차이이며 상대적인 말로써 이분법적인 분별이다.
사실 인간들의 '육체가 나다'라는 주장은 이와 같이 상대적이다.
분명한 것은 '육체가 나다'라는 상대적인 앎이 올바른 앏이 아니라 착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댜로 아는 앎에 대해서 깨달음이라는 말로, '도' 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시절에는 '육체가 나다'는 생각이 없었으며,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마조어록이나 조주어록, 임제어록 등, 그리고 기타 옛 선사라는 중생들의 말재간들에 대해서 옳음과 옳지 않음을 분별된 언어로써 설명하려 한다. 중생들의 무지를 비난하려는 목적도 아니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자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인류가 평화롭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나의 본래마음을 깨달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의 진의 여부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대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오직 그대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며,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깨달음의 목적은 지식을 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대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며 방법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깨달음으로써 그 길, 진리의 길을 밝혔던 인물들이 있다면, 오직 예수와 석거모니이며, 그 방법의 오묘함이나 미묘함, 신비로움에 대해서, 올바른 앎에 대해서 설명했던 인물들이 있다면, 노자와 장자이며, 소크라테스 등이다.
아래의 내용은 어떤 '중생'이 옛 선사라는 중생들의 말재간에 대한 해석이라는 '마조어록'이라는 책에 대한 광고 내용이다. 이 글만으로써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기에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마조어록 (개정판)
시리즈 제목: 현대인을 위한 선어록 읽기 1
부제: 이 마음이 부처다
김태완 지음/ 신국판(152x225)/ 256쪽/ 값 12,000원/ ISBN 978-89-89590-29-3 03220/
2012년 8월 22일 발행/ 침묵의향기 (T.031-905-9425)
책 소개
선(禪)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마조도일 선사의 어록을 무심선원 김태완 원장이 원문의 뜻을 엄밀하게 해석하여 번역했으며, 선 공부의 입문자를 위해서 풍부한 주석을 붙였고, 본격적으로 선을 공부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선의 정수를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는 ‘도움말’을 추가했다.
보리달마 스님이 선을 중국에 전하고, 육조 혜능 스님이 조사선을 일으켰다면, 마조도일 스님은 이 조사선을 일상생활 속에서 보편적으로 실현한 인물이다. 그래서 역자는 조사선의 역사에서 마조 스님을 혜능 스님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한다.
<마조어록>은 총 3부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 행록’에서는 마조도일 스님이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입멸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제2부 상당시중’에서는 설법을, ‘제3부 만남의 인연’에서는 수행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법을 깨우쳐 주는 일화들을 보여 준다. ‘부록’에서는 마조의 생애, 마조선 해설, 중국 선종 법계보, 중국 선종 지도 등을 실어 마조 스님과 중국 선종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했다.
2005년에 발행된 초판을 상당 부분 개정하여 새로 펴냈다.
차례
생략
부록
1. 마조의 생애
2. 마조선(馬祖禪) 해설
3. 마조를 전후한 선종 법계보
4. 중국 선종 연보
5. 중국 선종 지도
지은이 김태완
무심선원 원장
(저서 및 역서)
《간화선 창시자의 禪》(상, 하)《선으로 읽는 금강경》《선으로 읽는 반야심경》《선으로 읽는 신심명》《선으로 읽는 대승찬》《바로 이것!》《참선의 길잡이》《조사선의 실천과 사상》《임제 100할》《선문염송 염송설화》《대혜보각선사어록》 등이 있다.
본문 중에서
그대들은 각자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 상승의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그대들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능가경』을 인용하여 중생의 마음을 확인시킨 것은, 그대들이 거꾸로 되어 이 하나의 마음이 그대들 각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45쪽)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1) 만약 닦아서 얻는다고 하면,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시 부서지니 곧 성문과 같을 것이다. 만약 닦지 않는다고 하면, 곧 범부(凡夫)와 같을 것이다. (58쪽)
자성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 일에 머물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다. --- (2) 선에 머물고 악을 제거하며,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 등은 곧 조작에 속한다. 만약 다시 밖으로 치달려 구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삼계를 헤아리는 마음이 없게만 하여라. 한 생각 허망한 마음이 곧 삼계에서 태어나고 죽는 뿌리가 되니, 다만 한 생각이 없기만 하면, 곧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의 뿌리를 없애는 것이다. (61쪽)
(3)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 어떤 것이 더럽히는 것인가?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조작하고 추구하기만 하면 모두 바로 더럽히는 것이다. (82쪽)
즉시 도를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이다.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함이 없고, 옳고 그름을 따짐이 없으며, 취하거나 버림이 없고, 끊어짐과 이어짐이 없으며,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는 것이 바로 평상심이다. (84쪽)
출판사 서평
선(禪)의 황금시대를 연 마조도일 선사
대매산의 법상 선사가 처음 마조를 찾아와서 물었다.
(4)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바로 이 마음이 부처이다.”
법상은 곧 크게 깨달았다.
마조도일(馬祖道一) 스님은 당나라 시대의 선사로서 조사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선승이다. 6조 혜능 스님의 법제자인 남악회양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뒤 조사선(祖師禪)을 크게 부흥시켰다. 709년에 태어나 788년에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마조도일 스님이 남악회양 스님을 통해 깨달은 이야기는 이른바 ‘남악마전(남악 회양이 벽돌을 갈아서 법을 보여 준 일)’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건이다.(본문 20-22쪽 참조)
그 뒤 강서 지방에서 가르침을 펼쳐 강서의 마조도일이라 불리며, 호남에서 가르침을 펼친 청원행사 문하의 석두희천과 쌍벽을 이루었다. 당송 대 중국 선종의 황금기를 이룬 오가칠종(五家七宗)의 문파는 모두 마조와 석두의 문하이다. 마조는 문하에 백장회해, 위산영우, 남전보원, 서장지장, 대매법상, 마곡보철, 대주혜해, 귀종지상 등등 많은 뛰어난 선승들과 방거사를 배출하였다.
보리달마 스님이 선을 중국에 전하고, 혜능 스님이 그 근본을 세웠다면, 마조는 그 조사선을 자유자재하게 일상생활 속에서 구사하여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끈 뛰어난 지도자였다. 중국 당나라 시대 선종의 종파인 오가(五家) 가운데 임제종과 위앙종의 두 종파가 마조의 문하에서 건립되었다. 임제종은 다시 양기파와 황룡파로 분립되었는데, 이 두 문파에서 화두를 통한 조사선의 공부가 창시되어 간화선(看話禪)이 나타난다. 간화선은 지금까지도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서 선종의 정통이 되어 있다. 우리나라 통일신라 말에 성립한 구산선문 가운데 8개의 선문은 마조 계통의 선법(禪法)을 계승하여 성립한 것이다.
마조 선사의 위대한 점은 무엇보다도 선(禪)을 일상생활 속에서 보편적으로 실현하였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선이라고 하면, 세상과 격리된 고요한 선방에서 홀로 깊은 침묵 속에 내면으로 침잠해 가거나 정신을 집중하여 수행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마조는 일상생활 가운데의 대화 속에서 즉각 사람의 본래 마음을 가리킴으로써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달음이 일어나도록 가르쳤다. 이것이 바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조사선의 모습이다. 이러한 조사선을 일으킨 사람은 6조 혜능이지만, 이러한 조사선을 일상생활 속에서 보편적으로 실현한 사람은 바로 마조도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조 선사는 조사선의 역사에서 혜능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 마음이 부처다
마조 선사의 가르침은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로 대표된다. 다른 말로 하면 ‘평상심이 곧 도’라는 것이다. 삼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며 우리의 현재 이 마음이 곧 부처이므로, 만약 다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오히려 이 욕심 때문에 본래 부처인 자신을 잊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도를 닦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범부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릇 진리[法]를 찾는 자는 찾는 것이 없어야 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善)이라고 하여 취하지도 말고 악(惡)이라고 하여 버리지도 말며, 깨끗함과 더러움의 어느 쪽에도 기대거나 믿지 말아야 한다.”
마조 선사가 말하는 참된 수행은 취사선택하거나 조작하거나 찾는 노력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사는 다시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 어떤 것이 더럽히는 것인가?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들이 바로 더럽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선(禪)의 요체이며, 선이란 결국 수행을 하여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다른 무엇이 되려는 노력을 멈춤으로써 본래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는 이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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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들.
만약에 도를 잘 깨달은 석가모니가 본다면, '쓸모 없는 놈'이라고 말할 것이며,
만약에 노자가 본다면, 무용지용이 아니라, 무용지물이라고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본다면,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갈 가치도 없는 것이다, 라고 히겠지.
그 이유는 이러하다.
(1. 2. 3)의 내용은... '도를 닭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며, 단만 더럽히지 말라는 말이다.
만약에 예수가 본다면, 정신 나간 놈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을 빌자면... 부패하고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패하고 부패한 미음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 '하루종일 기도하라'는 방식으로 설명했던 인물이 예수이다.
그 부패한 마음을 단지... '내가 부처다' 또는 '내마음이 부처다' 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뜻이니, 어리석음이 우주보다 더 문한 한 자이다. 그 제자라는 '방거사'라는 중생의 글을 보니. '우주가 없다'는 말에 대해서 '무주'라는 이름을 지은 자이다. 그러니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우주가 있을 뿐, 그것을 인식하는 '나'가 없다면, 우주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 한 무지한 자의 망상이기 때문이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괴변이라고 하는 까닭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근본이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다, 수생행식도 이와 같다, 그러니. 그것을 관찰하라'는 말로써 원리정도몽상에서 깨어나라는 가르침이 그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법에 대해서 일념명상법으로 설명한 것이며, 생각의 원리를 깨달아 알라는 뜻이 이곳 카페의 모든 글들의 요지이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이 마음이 무처이다.
그 말에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대체 무엇을 깨달았다고 주절거리는 것일까?
육체가 나다, 육체가 나가 아니다, 라는 앎, 말 자체가 분별이다.
그 분별심에서 깨어나라는 말이 석가모니의 근본 가르침이다.
육체가 나다라는 앎, 그 앎이 그릇된 앎이기 때문이며, 모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선에도 머물지 말고 악에도 머물지 말라. 라는 말, 말은 옳은 말인 것 같지만, 정신 나간자들의 망언이다. 왜냐하면.... 선악의 분별심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스스로 일어나는 생각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들 또한 하근기 중생들에게는 우이독경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바 아니다.
다만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을 깨달아 아는 이들이 무수히도 많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며, 일념법으로써 그 이치를 깨달아 알때, 그때 비로소 올바른 앎, 진리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증거하는 말이 '별은 별이 아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더 나아가 '나는 나가 아니다'는 말로써 '육체가 나다'는 착각에서 벗어났음을 이르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너희가 어린아이시절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라고 말한 것이며, 석가모니는 '원리전도몽상'에서 깨어나라고 한 것이며,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니, 그것을 관찰하여 깨어나라고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석가모니는 '나는 하늘의 용도 아니며, 바다의 용도 아니며, 더 나아가 나는 사람도 아니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상대적인 언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 말, 말, 말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말변사라는 말... 말로 지어진 것들일 뿐, 본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마음의 근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 자여,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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