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생각한다'는 말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인류가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나는 생각한다'는 말이 옳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 사실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볼 수 있다는 말은. 그런 사실. 즉 '나는 생각한다'는 말이 사실적인 말이 아니라 허구적인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가족이거나 이웃이거나 인간세상이거나.
인류의 역사를 통털어 살펴보더라도 인간세상이 평화로운 적은 단 한시도 없었다. 현 시대 또한 어디에도 행복한 사람이나, 평화로운 사람은 없다.
만약에 그대가 스스로 만족하여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며, 자신의 삶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운 삶이라면, 이런 글을 볼 까닭도 없을 것이며, 여행을 다니거나, 더 좋은 것을 찾아다니거나, 더 즐거운 일을 찾아 다니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명성을 얻기 위해서 분주하게 쫒아다닐 까닭도 없을 것이다.
인류는. 아니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 이순간 순간에 만족할 수 없다. 결코 현실에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달려 나간다. 바쁘다. 분주하기만 하다. 한가로이 즐길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 그대의 삶에 있어서는 최후의 미래라는 사실에 대해서 기억하라.
항상 기억하라.
항상 기억하라.
항상 기억하라.
지금 이 순간순간이 그대 삶에 있어서 최후의 미래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과거와 현제 그리고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만약에 시공간이 있다면, 그대는 항상 과거에 바탕을 두고 다시 과거를 창조해 나갈 뿐, 현제를 경험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과거이며 과거 진행형이다. 사실 이런 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다.
사실 인간의 '내가 생각한다'는 말과 '내가 있다'는 말, 그리고 '자존심'이라는 말이 인류의 자유와 평화로 가는 길에서의 가장 큰 걸림돌이며, 착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조차 불가능 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에 대해서 누구나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사실적인 말인지 사실적인 말이 아닌지에 대해서 궁리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의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생각한다'는 말이 말도 안되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면... 세상사람들 누구나 '아니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주장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 아니라고 하는 것인지. 최소한 확인은 해 본 다음에 '아니다'라고 해야만 하는 것이며,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 인간들이 서로가 다툼 없는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이유가 '나는 생각한다'는 그릇된 앎에 대해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생각할 수 있으며, 내 생각이 옳다는 사고방식이 모든 논쟁, 분쟁, 논란, 다툼, 전쟁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것에 대해서 '자아'라고 하며, 자신이 남들보다 더 존귀하다는 뜻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 같다.
사실. 수억겁 전생에 '목숨걸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면, 그들에게는 분명히 그런 말을 할만한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한다면, 무조건 아니다 라고 주장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구나 살아오는 동안 내내. 자신의 기억세포에 저장된 말들 중의 일부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두권의 책과 이곳 카페의 모든 글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사실적인 말이 아니라, 허구적인 말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둔 말들이다. 단지 그대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의아스럽거나,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단 한구절에 대해서도 이해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근거에 바탕을 둔 말이며, 사실에 바탕을 둔 말이다.
만약에 그대가 현명한 자라면, 이런 사실에 대해 깊이 성찰해 봄으로써 그대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며, 더 나아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 하게 될 것이며,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삶의 짐의 무게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본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 글이나, 또는 이곳의 모든 글들을 보기 위해서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 있다. 그대의 경혐 중에는 기억할 수 없는 경험이 있다.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 시절이며, 나와 너라는 분별심이 없던 시절이며, 언어, 말, 말, 말을 몰랐던 시절이다. 그대 또한 '내가 있다'는 사실, '내마음이 있다는 말'에 대해서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염두에 두라는 말이다.
그것에 대해서 순수의식, 무의 식, 잠재의식 등의 말로 표현 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나는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며, 더 나아가 '내생각'이 있다는 말이다. 이는 생각의 주체가 '나'라는 말이다.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자.
그 하나는. 사실. 인간은 누구도 내가 생각한다는 말과 같이 '스스로 생각하는 자'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물론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보편타당한 앎이며, 상식적인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해야만 한다. 최소한 이 카페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고도 많기 때문이다.
그 둘은. '내가 생각한다'는 말,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 몇 가지의 사례로써 사실 여부를 가늠해 보자는 것이다.
사실 그대는 이런 말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틀린 말이 아니라, 단지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그대의 기억포에 저장된 말이 아니기 때문에 낯선 말일 뿐이다. 사실 이 작은 나라에서도 제주도 사투리를 처음 듣게되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몇차례 또는 함께 생활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만 사투리와 같이 낯선 말들일 뿐, 사실적인 말이라는 뜻이다.
말은 같은 말이지만 그 뜻은 천지차이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말과 '내가 생각할 수 없다는 말, 그 한구절의 말에 대한 이해와 오해는 삶과 죽음의 차이만큼 크기 때문이다. 만약에 세상살이 힘겨워서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의 멧세지일 것이며, 삶이 고달픈 사람에게는 기쁨의 노래일 것이다. 그져 삶이 시들한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멧세지일 것이며, 병든 자에게는 약이 될 것이며, 죽어가는 자에게는 영원한 삶을 위한 등불이 될 수 있는 말이다.
이곳의 모든 글들. 오직 인간세상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것이며, 인간 삶의 유일한 길, 법, 방법에 대한 방편설들이다.
자. 다시 시작하자.
사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은 그 말 자체에 오류가 있다.
사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것이 있다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는 만큼, 꼭 그만큼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언어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이 하나이며, 둘은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생각과 생각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생각이 항상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이다. 사실 생각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수행론에 설명되어 있으니 생략한다.
그대는 단 하룻동안이라도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다.
그대는 단 한시간동안이라도 '나는 불행하다'는 생각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다.
그대는 '내가 살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대는 '내가 잠시 슬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루종일 슬프다고 생각할 수도 없으며, 내가 기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또한 단 한시간동안도 기쁘다는 한생각만을 이어나갈 수 없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내생각'이라고 주장은 하지만, 내가 항상 마음이 편안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위의 사례들에 대해서 '뭐, 그럴 수 있지' 라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따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대가 그대의 생각의 주체라면, 주인공이라면... '나는 신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 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생각할 수 없단 말인가?
'내가 신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나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내생각이라고 주장하질 말든지, 내가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질 말든지, 내사 신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질 말든지...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나는 생각한다'는 말과 같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내가 내생각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영혼이다, 나는 귀신이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부처다... 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대는 '내가 태어났다'고 당연시 한다.
사실 그대의 기억세포에 저장되어 있는 말들 중에는 '내가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대의 기억세포에 저장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낱말들 중에 그 말, 즉 '내가 태어났다'는 말은 그대가 경험한 사실적인 사건에 대해서 기억하는 생각이 아니라, 그대가 아닌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와 같이.
그대의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주장은, 그대가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말들과 그대가 경험하지 않고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들이 모두 포함되어 기억세포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세포에 저장된 말들 중에서 '내가 있다'는 말을 기억해 내면서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내가 안다, 내가 옳다' 고 주장하는 것이다.
누가 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그대의 답변은 모두. 하나같이 모두가... 이미 지나간 날들에 대한 기억된 생각들 중에서 그 일부를 끄집어 내어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 기억세포에 저장된 낱말들 중에는. 말의 뜻도 모르는채 소리로 시작된 말들이 대다수이다. 가령. 원숭이. 똥구멍. 빨강. 사과. 맛있어, 바나나, 길어, 기차, 빨라, 호랑이. 곶감. 맘마. 빠빠. 등 등의 말, 말, 말들이다. 물론 그 말들 중에는 '내가 있다'는 말과 '내가 사람이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으며, 내마음이 있다'는 말 또한 그러하다.
사실. 사실. 사실.
그대의 기억세포에 저장된 모든 낱말들... 그 어느것 하나도 '그대의 나의 것'은 없다.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말이거나 생각해 낼 수 없는 말들... 그 어떤 말들 또한 그대의 앎이 아니라, 타인들의 앎이다. 타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워서 아는 것들이며, 그것들이 기역세포에 저장된 생각들이다.
그대의 '내가 있다'는 말도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에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이 기억세포에 저장된 것이며, '내가 사람이다'는 말 또한 그러하며, 내가 여자다거나 내가 남자다'는 말 또한 그대 스스로 깨달아서 알게된 앎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들이며, 기억세포에 저장된 말, 말, 말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사실. 지금. 그대의 나를 구성하는 것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들이다.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들, 낱말들 하나 하나가. 원숭이. 빨강. 기차. 바나나... 등의 소리, 소리, 소리들이 기억세포에 각각, 조각 조각들로써 저장된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낱말들이 저장되면서... 그 낱낱의 말조각들이 빛에 반사되어 현란한 색채를 뿜어내는 유리알들의 유희와 같이 유기적 작용에 의해서 말, 말, 말... 언어화 된 것이다. 더 많은 각각의 소리들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 순환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방식으로 구체화 된 것이다.
지금 그대의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말에 대한 구성요소들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마음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기에서 '고유' 라는 말은 '옛 고' 자와 '있을 유' 자로써의 고유이다.
옛날부터 나만의 고유한 '내마음이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 그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드의 말, 말, 말에 의해서 구성된 것들이기 때문에 허구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사람들의 '내마음'은 사실 내마음이 아니라, '기억세포'에 저장된 타인들의 말들 뿐이다.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들, 배웠던 말들... 그 말들에 대해서 '내마음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지 아니할까?
이 말은 사실적인 말이다.
사실에 바탕을 둔 말이다.
사실 지성체들의 모든 주장은 사실적인 것들이 아니라, 거짓된 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모든 주장들에 대해서 허구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는 말들이며, 말들만 무성할 뿐,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내마음'이 아니라, 수많은 타인들의 마음을 끌어 모아서 '내마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타인들 또한 다른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워서 알게된 낱말들, 말, 말, 말들에 대해서 '내마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존귀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다면, '내인생'이라는 말. 어불성설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이런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어찌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내가 옳다'는 주장이 어찌 무한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있겠는가?
서로가 죽는 날까지 자신만의 허구적인 자존심을 주장해야만 하니. 어찌 서로가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사실.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저 오는 말이 '도' 라는 말이며, '깨달음'이라는 말이며, '해탈'이라는 말이며, '안심입명'이라는 말이며, 하늘나라, 천국, 지옥, 불국도, 부처님' 이라는 말, 말, 말들이다. 자신의 마음이 이토록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난 또 다른 환상적인 말들이다.
사실. '도' 또는 '깨달음' 이라는 말은 신비의 세계에 대한 환상적인 말이 아니라, 위의 설명과 같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에 '일체유심조의 더 깊은 뜻'에 대한 글이 있다.
부처, 하나님이 네 안에 있다는 말도 아니며, 네 밖에 있다는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와 너'라는 말이 사실적인 말이 아니라 허구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모든 고통은 그런 그릇된 앎에서 비롯된 환상이다.
'나 라는 것, 내마음이라는 것, 내생각이라는 것' '내 느낌이라는 것들... 위의 설명과 같이 모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다.
지식이 끝이 없는 이유이며, 인생에 해답이 없는 이유이다.
마음, 마음, 마음들... 모두 허구적인 것들에 대한 환상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대의 허구적인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유일한 법,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자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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