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표호랑케교 라는 종교가 있다.
석가모니의 말들 중에서 '묘법연화경'이라는 경전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깨첬다는 자의 망상에서 비롯된 종교집단 중의 하나이다. 그들의 종교에 대한 광고성 만화에는. 부자 친구를 찾아갔던 가난뱅이의 속옷에 보물을 매달아 주었는데, 그 가난뱅이는 그것도 모르는채, 여전히 걸식을 하고 다니다가. 다시 그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나서야 자신에게 값진 보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상숭배사상으로써의 우상이 보물일 수는 없다.
그대 자신의 마음의 근원을 보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 또한 불경의 내용중에 '이다라니 무진보'라는 말에 대한 비유법으로써 어떤 종교를 믿게되면 금은보화보다 더 값진 보물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 광고들이다. 대다수의 종교들이 신을 숭배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집단들이며,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없는 무지한 자들의 망상에서 비롯된 이합집산들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타인들의 말(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 그 생각 자체가 무한한 어리석음이다.
물론 마음이 편안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곳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는 필요한 것이겠지만, 이 역시 필요 악이 아닐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도'의 가르침이 왜곡된 것들이며, 석가모니의 말이나, 예수의 말, 노자의 말 등이 하근기 중생들에 의해서 왜곡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며,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말재간들일 뿐, 가치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런 집단들의 결과는 아득한 옛날부터 그러했듯이 서로가 옳다는 주장으로써 인간과 인간들간의 피를 흘리는 이념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래. 도道 란. '나와 너' 라는 분별심이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앎으로써 서로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며, 올바른 이치를 앎으로써 다툼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며,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이 본래 없는 이치를 깨달아 앎으로써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인생의 길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으뜸 가르침'으로써의 '종교'이다. 하지만 현 시대와 같이 종교화 될 수 없는 까닭은... 진리. 즉 올바른 앎이란 타인들에게 '주장할 수 있는 앎'이 아니기 때문이며, 중생들의 견해로써는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말들이지만, 언술이 뛰어난 자들에 의해서 우상숭배사상으로 변질되고 훼손되고 왜곡되어... 종교들간의 피를 흘리는 전쟁의 씨앗이 된 것이다. 그것들이 현시대의 종교들이다.
오직 일념을 깨달아서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우이독경'이라는 말로 표현 되게 된 것이다.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의 모든 앎은 올바른 앎일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이전에는 '나와 너' 라는 분별된 생각, 즉 상대적인 분별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사람이다'는 앎은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말과 같이 상대적인 것으로써 분별일 뿐, 올바른 알은 아니다. '나와 너' 라는 앎이 분별심일뿐, 사실적인 앎이 아니라,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이독경이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무식이며, 무지라고 하지만... 이런 말들 조차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하근기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에 대해서 설명하는 까닭은. 현시대에는 이런 말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많고도 많기 때문이며,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일반적인 상식과 같이 보편타당한 앎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에게 있어서 자유, 평화가 있을 수 있다면 오직 그 길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편안한 삶. 행복한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본래 없는 마음에 의존하여 고통을 사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오류이다.
사실 그 '사고방식'이라는 말. 생각하는 방식이라는 말 자체가 올바른 앎이 아니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라는 말에서의 '사고방식'이라는 말이. 왜 올브른 말이 아닌지에 대한 설명과, 마음을 찾는 길에서 어떤 이득을 얻는 것인지, 그 이득에 대체 어떤 것이기에 무진무궁한 보물이며, 가슴에 구슬을 간직한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지에 대해서이다.
ㅡ. 사실. 일념법 일념명상법 수행으로써 일념을 경험해 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대해서 의심해 볼 여지도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사고방식이 통념이다.
일념법명상. 일념명상법으로써 가장 처음 깨닫게 되는 것이 그런 사고방식이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지식의 많고 적음을 떠나 '내 생각은 내 생각인데, 내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다'는 말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말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소리가 '말도 안되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적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때, 그때 비로소 마음의 평화 또는 숨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안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앎이다.
그런 앎. 생각이 내생각이지만, 결코 그 생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올바릉 앎, 하나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내생각이 결코 내생각이 아니라는 앎으로써 비로소 그 많던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가 확립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역사를 뒤돌아 보거나, 현시대를 보더라도, 재물이 많거나 지식이 많아서 핻복한 사람이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내생각이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을 올바르게 인식하므로서 소위 '안심입명'이라는 말과 유사한 뜻의 '진정한 평화로 가는 바탕이 확립된다'는 뜻이다.
사실 인간세상에 이보다 더 값진 보석은 없다.
'내생각이 내생각이 아니다'는 앎은 단지 단순한 어떤 지식으로써의 이익이 아니라, 더 이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는 앎으로써 생로병사의 모든 고통의 소멸을 이루기 위한 올바른 앎인 것이다.
간혹 그런 큰 기쁨을 얻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 길이 아니면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쁨이다.
사실 인간 삶 모두가 그러하다.
죽을 때 까지 욕망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살지만, 욕망을 채워서 행복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욕망은 우주보다 더 무한하여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는다. 욕망이 끝이 없는 까닭은 그것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가 나다'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환상적인 것이며,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착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내생각을 내 뜻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은 '내인생이지만 내인생을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며, 내인생이 내인생이 아니라는 올바른 앎에 의해서 비로소 고요함의 경지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러하다.
자신 태어나기 전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다.
물론 태어나서 말을 배워서 자신의 나를 인식하기 이전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업다. 경험의 오류이다.
그렇듯이. 그대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그대가 살고 싶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대가 죽고 싶다고 하더라도 죽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대가 원하든 말든... 삶은 죽음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똑 같이. 태어나기 전에도, 어린아이시절에도 삶이나 죽음이라는 말에 대한 앎(말, 지식, 뜻)이 없었다. 어린아이시절에는 '나와 너'라는 분별심 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삶이 있으며, 죽음이 있다는 앎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런 사실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대해서 소위 '해탈, 깨달음' 이라는 말, 말, 말 등으로 표현된 것이다.
인간들의 삶에 있어서 행복이나 평화를 누릴 수 없는 까닭은. 본래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나'라고 아는 앎(인식. 기억된 생각, 마음)에 대해서 사실적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착각에서 깨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다.
사실.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깊이 잠들고 싶지만 근심과 걱정, 초조와 긴장감 등의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잠들 수 없을때, 불면증에 시달릴때, 그때는 괴로움을 느끼지만, 깊이 잠듦과 동시에 그 괴로움은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고통스럽다는 생각도 없으며, 깊이 잠들었기 때문에 기쁘다는 생각도 없다. 죽음 또한 깊이 잠듦과 같이 경험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는 타인들의 말, 말, 말에 의해서 '죽음은 고통이며, 공포스러운 것'이라고 단정짓는것이다. 남들이 두려워 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깨달아 알게되는 올바른 앎이라면, 죽음 또한 삶과 같이 즐거운 마음, 기쁨으로 맞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 그것은 깊은 잠과 다르지 않은 진정한 휴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깊이 이해 한다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더 이상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 하듯. 그렇게 어린아이들의 놀이와 다르지 않은 것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이 있다면, 불치병이나 난치병 등의 병마가 깃드는 것이다. 삶 자체가 고통인데, 그 병에 따른 고통은 당사자들만이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한다는 것은 그런 질병들까지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 권능이 생겨난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질병을 스스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道'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 안에 값진 보물이 있는데. 그것이 곧 다른 것들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올바른 앎을 이르는 말이다.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마음가짐으로써의 삶에서는 질병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이미 생겨났던 질병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소한 일이다. 왜냐하면 '도가의 약식'이나 또는 '도가의 원리와 원칙에 따른 '단식' 요법으로써 어떤 불치병이라도 완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몸이며
나의 마음이며
나의 감정, 느낌, 생각이다.
몸. 마음. 생각들... 그것들은 그대의 '나(我)'도 아니며, 그대의 '내것'도 아니며, 그대의 '나'와 비슷한 것도 아니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대해서 '해탈,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 방법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자여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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