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이라는 말과 광명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무명으로 시작되는 것이며, 지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無知무지로써 끝난다.
그 무지에서 깨어나 아는 앎에 대해서 광명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지혜, 참된 이치, 통찰이라고 하는 것이며, 여기서는 '올바른 앎'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사실. 인간은 태어남을 기억할 수 없다.
아니. 태어남을 경험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죽음 또한 경험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며, 경험의 오류라고 했다.
사실 인간들의 '내가 태어났다'는 말, 말, 말... 사실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인간 지식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지식의 끝이다. 인간세상의 모든 문제들, 해답이 없는 문제들만 무성한 까닭은 이렇듯 인간 지식의 첫출발이 거짓말에에 바탕을 둔 말, 말, 말들이기 때문이다.
말은 참된 말과 거짓된 말로 구분된다.
언어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며, 인간은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인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문명이 아니라 무명이며, 무지 무식이다.
말을 배우던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가 태어났다'는 말은 참돤 말이 아니라 거짓된 말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 창조된 모든 말들이 사실은 참된 말이 아니라 거짓된 말이다. 물론 이런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극 소수에 불과하다. 만약에 이런 말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대 또한 열망이 있다면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다만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여길 것이다. 그 말도 안되는 소리가, 사실은 말도 안되는 소리가 아니라, 다만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때, 그때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곳 설명을 통해서 이해 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사실적인 말이며 거짓된 말이 아니라 참된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다면... 상근기 인물이며, 지혜로은 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들의 삶... 그대의 삶, 인생이라는 것... 살아갈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소개에 있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주장한다.
사실. 올바르게 알고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사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인간들... 인삿글에 보니. 하근기 중생의 버르장머리 없는 인사글이 보인다. 초대한 적이 없는데...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작태를 보니. 참으로 가관이다.
무용지용이 아니라 무용지물들... 쓸모 없는 것들. 짐승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 착각에서 깨어나야만 가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인간이라는 것들, 짐승보다 더 뛰어난 것들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 감히. 내가 짐승들보다 더 뛰어났다고 주절거리는가?
과연 인간들의 투쟁을 일삼는 삶들... 짐승들보더 뛰어난 점이 단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대체 인간의 어떤 점이 짐승보다 더 뛰어난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짐승보다 더 뛰어난 인간동물이 없는 것 같다.
일념으로써 자신을 이해 하는 사람들... 오직 그들만은 예외일 수 있을 뿐이다.
인간들의 모든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들이다.
그 첫째 거짓말이 '내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자신이 태어남을 경험한것처럼 주장한다.
누구나 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새빨간 거싯말이다.
거짓말이라고 이해 한다면... 그나마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연 있는 자 다.
분명한 것은. 그대가 자신의 태어남에 대한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다는 그대 부모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 들었던 말, 말, 말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이다. 그대 스스로 알게된 앎이 아니라. 그대 이외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어 들었던 말, 말, 말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이쯤에서 크게 웃어버리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근기 중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가장 근본원인이기 때문이며, 사실에 바탕을 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는 태어남을 경험 한 적이 없다.
아니. 내가 보니. 경험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기억할 수 없을 뿐이다.
물론 그대가 태어나기를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대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아니기 때문에 사실. 그대에게는 아무런 권리. 권한도 없으며, 권능도 없으며, 자유의지도 없다.
만약에 그대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라면, 그대가 원하는 그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대의 뜻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대가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라.
그대는.
타인들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며, 타인들에 의해서 길들여진 것이며, 말을 배운 것이며, 타인들에 의해서 마음이 만들어진 것이며, 타인들에 의해서 느낌, 감정이 만들어진 것이며, 타인들에 의해서 생각이 생겨난 것이며, 타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느낌이나. 감정... 마음, 생각에 의해서 살아지는 것이다 그대가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마음에 의해서,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서 살아지는 것이다. 그 타인들 또한 다른 타인들로부터 그렇게 그렇게... 그대와 똑 같은 방식으로 길들여진 것이다.
타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마음으로. 타인들에 의해서 살아지는 것이며, 타인들의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 착각하는 것이다. 그 착각 또한 타인들에 의해서 가공된 착각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있는가?
설령 다른 괴변을 늘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타인들에 의해서 알게돈, 주어 먹은? 말재간에 불과한 말, 말,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연극일까?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 그 말도 안되는 소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대의 '내가 태어났다'는 말이 첫번째 거짓말이라면.
그 다음 두번째 거짓된 말이 '내가 사람이다'는 말이다.
사실 그대가 주장하는 '내가 사람이다'는 말 또한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이다'는 말 또한 타인의 말을 듣고 알게된 주장일 뿐, 근거 없는 말이며, 상대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들은 이런 말 또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이 말 또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대한 근본원인 중의 하나이다.
물론.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이런 말 또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하겠지만... '내가 사람이다'는 말 또한 그대가 경험했던 사실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 주장하는 말이 아니라, 그대의 부모로부터 들었던 말들에 대해서... 그들의, 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을 기억하는 것이며, 결국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에 대해서 '내가 경험한 사실인것 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이라고 인지할 수 있다면... 그나마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귀하디 귀한 인연을 만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쓸모 없는 것이며, 살아갈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만약에 인간세상에서 분리된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들... '사람은 본래 사람이 아니다' 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아이들에게 '너는 사람이 아니라 본래 신이다' 라는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그 아이들은 '나는 본래 신이다' 라고 알게 될 것이다. 그대의 내가... 나는 사람이다 라고 주장 하듯이.
사실 인간들의 모든 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다고 하는 까닭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든 주장들이 이토록 허구적인 앎에 바탕을 둔 말, 말, 말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의 기원을 모르지만, 그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 무지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내가 사람이다'는 말 자체가 억지주장이다. 근거 없는 낭설이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주어들었던 말이며, 더군다나... 상대적인 말에 대해서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들... 서로가 내가 더 잘났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사실 인간의 말을 흉내내는 앵무새들의 지저귐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근거는 있는가?
이 또한 다른 타인들의 말을 들어 봐야만 하는가?
그리고 나서. 다수결로 결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사실 인간은 누구나 '행복 자유 평화'를 원하지만 그 낱말들의 뜻 조차 올바르게 이해 하는 사람이 없다. 물론 행복이니 자유, 평화를 누리는 사람도 없다. 그대 또한 그러하다.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에 스스로 만족하여 평화로운 사람이라면.... 이곳 저곳 찾아 다닐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는 말... 허구적인 말재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과 같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서 사라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으면서도... 미래를 탐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이 그대에게는 최후의 미래이다.
말을 모르던. 말이 없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無明'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까닭은. 언어가 없음을 일컷는 말이다. 아무런 앎, 말이 없기 때문에 밝지 않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 없기 때문에... 낮이 있다거나 밤이 있다는 생각이 없으며, 하늘이 있다거나 땅이 있다는 앎이 없다. 더 나아가 사람이 있다는말도 없으며, 사람이 산다는 말도 없으며, 죽음이 있다는 말이나, 귀신이 있다는 말, 말, 말 등의 앎(말, 뜻, 지식)이 없다.
말을 모르는 아이가 '살아 있는 사람이다' 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내가 사람이다'고 아는 사람의 생각일 뿐, 말을 모르는 아이의 생각은 아니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 아이가(나는 아이라는 생각이 없는), 강아지(강아지 또한 내가 강아지라고 아는 바 없는)와 함께 뛰어 논다. 하지만. 그 아이나, 강아지에게는 '내가 있다'는 앎이 없으며, '내가 아이다, 내가 강아지다'는 말, 앎, 마음, 느낌, 감정, 생각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이와 강아지가 아니라 '내가 사람이다'고 아는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 사는 사람들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나는 나가 아니다. 나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귀신도 아니다. 나는 영혼도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는 생각도 없다. 분별된 생각이 없다. 없다는 생각도 없다.
그 아이가. (내가 아이라는 생각이 없는) 그대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여 말을 배우는 과정이 있다. 물론 인간은 그런 과정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오류는 여기서 시작된다. 말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가장 처음 일어나게 되는 생각이 있다. 그 한생각이 '내가 있다'는 생각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은 더 나아가 '육체가 나다'는 생각으로써, 그 생각은 죽는날까지 변할 수 없는 고정관념이 되어버린다.
인간의 가장 뿌리깊은 고정관념... '내가 사람이다'는 앎, 말이다. 그것도 상대적인. 편견. 단견. 소견... 사실 그 고정관념이 참된 앎, 말이 아니라 그릇된 앎이며, 올바르게 본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자...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다.
그 길,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라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있다'는 생각과 '내가 없다'는 생각이 한생각의 차이이며, 상대적인 말이라는 것이다. 내가 있다는 말과 내가 없다는 말 또한 한생각의 차이이며, 상대적인 말로 표현된다. '육체가 나다'는 생각과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 또한 한생각의 차이로써 상대적인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 이런 말들. 이런 사실들. 이런 사실에 바탕을 둔 말들... 인간 지식으로써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사실적인 말이며, 근거가 분명한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어긋난 말일 수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지식. 즉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혼란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상근기 인물이며, 현명한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근기 중생이라면... 웃어버리거나, 회피하겠지만.
'깨달음'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그 깨달음의 앎에 대해서 '올바른 앎'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올바른 앎이란'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예를 든다면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며, 너 자신을 알라, 네거 너 자신의 마음의 근원을 모른다면, 살아갈 가치도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 말은 또한 '너희가 네 자신을 알면 곧 하나님이라는 예수의 말과 같은 의미이며, 네 본래성품이 부처다;'는 석가모니의 말과도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의 지식은 '내가 있다'는 말(=앎=마음=감정=느낌)에서 부터 시작된다.
'내가 있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상대적인 '너' 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나' 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너'가 성랍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방식은 경험이전의 사고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서절에(잠재의식)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에 세뇌당한 것이며, 그 말을 믿게된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원하는 삶... 그대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며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길잃은 어린 양들, 그릇된 앎으로써 고통을 겪는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내가 있다'는 말, 앎,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느낌이나 감정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귀신이나 영혼... 등의 말, 말, 말들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말, 말, 말을 배웠기 때문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지식은 서로가 서로를 견주기 위한 도구일 뿐, 해답을 구할 수 없다.
지성체는 지식의 시작도 가늠할 수 없으며, 지식이 끝이 없는 이유도 모르는채, 지식의 감옥에 갇혀서 우환을 겪다가 지식에 갇혀서 죽는다.
자신의 순수의식. 즉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에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에 대해서 믿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시대에는 젊은이거나 늙은이거나, 야생동물들과 같이 건강한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다. 그 원인이 바로 시작도 끝도 모르는 지식을 숭배하는 맹신자로 전락된 까닭이다.
사실. 無明이라는 말은 배우기 이전 순수의식의 어린아이를 표현하는 말이다. 밝음이 없기 때문이며 앎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말을 배우고 글을 익힘에 대해서 문명. 즉 문자의 밝음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지식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 지식이 허구라고 말하는 까닭은 '내가 있다'는 말에 바탕을 둔 다른 말들이기 때문이며, '내가 있다'는 말이 사실적인 말이 아니라 허구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본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의 '말 없음' 이 '無明'이다. 그리고 말을 배워서 아는 앎, 말을 인식하는 앎, 즉 지식은 올바른 앎이 아니라, 편견, 단견, 소견이기 때문에 '지식'이나 '의식'이 아니라 '무지無知'이다.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에 무식'無識'이다.
무지, 무식, 지식을 초월한 앎이 있다.
여기서는'올바른 앎'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종교나부랭이들은 그 '올바른 앎'에 대해서 '진리'라고 주장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광명의 지혜'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노자와 장자는 '전식자'라는 말로 표현했으며, '지인, 진인'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올바른 앎에 대해서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 말이 있다면 '슐탄'이라는 침팬지의 행동에 대한 비유로서 설명된 '통찰' 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명'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며, 전지전능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며, 지혜, 통찰... 등의 말들이 생겨난 것이다. 앎은 앎인데, 밝은 앎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까닭은 말은 같은 말이지만 그 말에 대한 뜻에 대한 앎의 차이가 깜깜한 어두움과 밝은 낮과 같은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원성이나 다양성을 초월한 앎이 있다.
인간 지식은 그것에 대해서 진리라고 한다.
그 길이 있다.
그대가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그것은 불성도 아니며, 부처도 아니며, 성령도 아니며, 순수의식도 아니며, 영혼도 아니며, 귀신도 아니며, 오직 그대의 생각의 흐름을 끊어 내야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는 앎... 더 나아가 지성, 감성, 느낌들... 모두 허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앎들은 그대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들로부터 세뇌당한 허구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타인들 또한 그대와 같이. 그런 방식으로 세뇌 당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단지 그대의 마음의 근원을 알아야만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길, 법, 방법에 대해서 '인간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道' 라고 이름 지은 것이며, 한글로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않다면, 살아갈 가치도 없는 것이다.
삶이 힘겹거든 나에게 오라.
짐진자여 나에게 오라.
그리고
나의 말을 들으라.
듣고. 옳거든 그 길을 가라.
현세상에는 오직 나의 말만이 진실된 말이며, 진리이며, 새생명의 길이다.
왜냐하면 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그대 순수의식에 바탕을 둔 말이기 때문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평화 있기를.
인연있는 자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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