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어의 감옥. 언어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언어가 사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사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사람이다'는 말이 언어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말 또한 언어로 구성된 말, 말, 말이다.
'내가 사람이다'는 말, '내가 여자다'는 말, '내가 남자다'는 말, 말, 말들...
사실 자세히 보면, 상대적이지 않은 말들은 없다.
인간 삶이란. 이렇듯 상대적인 말들 속에서 진리를 갈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라는 말 또한 '진리가 아니다'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상대적인 말들 속에서 상대적이지 않은 말을 아는 앎에 대해서 진리라는 또 다른 말로 표현된다.
상대적인 말들 속에서 상대적이지 않은 말을 찾는다는 일은 인간 관념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또한 있을 수 있다.
사실. '진리'라는 말이 있지만, 말 속에서 진리를 찾을 수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본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있다는 말은 언어가 없다는 말과 상대적이다.
삶이 있다는 말은 삶이 없다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다.
죽음이 있다는 말은 삶이 있다는 말과 상대적이다.
말은 곧 앎이다.
앎은 곧 말이다.
말이 없는 앎은 있을 수 없다.
앎이 없는 말 또한 있을 수 없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다.
그렇다면.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다는 말이며,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다는 말이다.
이렇듯 언어는 상대적이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은 이런 방식의 상대적인 언어 속에서 다른 언어를 찾는 일에 대해서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런 사고방식의 상대적인 언어의 함정에 갇혀 있는 것이다.
상대적이 아닐 수 없는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길이 있다.
그 길,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지식은 상대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고 믿는것 같다.
왜냐하면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며, 손뼉이 마주치지 않으면 소리가 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 또한 그러하다.
한쪽 면이 있기 때문에 반대 쪽 면이 있다.
한쪽면이 없다면 다른 쪽 면 또한 있을 수 없다.
다만, 동시에 양면을 다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아니. 동전이 없다면... 이쪽면이나 저쪽 면이 없다.
아니. 동전이 없다면... '동전'이라는 말이 필요 없다.
여기까지의 말에 대해서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다.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 이런 설명을 늘어 놓는 까닭은 '진리'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 진리라는 말의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지식으로 아는 진리란, 영원불변이라는 것과 시공간을 초월한 것, 또는 인간세상에 영원히 남겨지는 것, 인간이 갈구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 등이다. 다만 한가지 더 중요한 것, 진리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적인 언어(앎) 속에 상대적이지 않은 '절대적인 앎'이 있으며, 그 앎에 대해서 '진리' 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이원성과 다양성이다.
모든 '이원성이나 다양성이 허구적이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 '진리'이다.
양면이 있는 동전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동전의 모양은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인간의 숫자만큼이나 많을 수 있으며, 사실 인간들 개개인들이 모두 동전이라고 가정하자. 그대 또한 하나의 동전이라고 가정해 보자는 뜻이다.
양면이 있는 동전과 같이. 개개인들 모두에게는 '자신의 나'가 있다.
그것에 대해서 '자아(自我)'라고 한다.
그 '나'가 있기 때문에 '너' 와 '대상들'이 있다.
그 '나' 가 없다면, 너를 비롯한 대상들, 즉 이원성이나 다양성은 있을 수 없다.
동전이 없다면, 양면이 있을 가닭이 없다. 그러니 앞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뒤가 있다고 주장해야 할 까닭이 없다. 앞가 뒤가 없기 때문이다. 양면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없는 것'은 논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사실. 인간들의 삶, 죽음에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인간세상의 모든 지식에서 비롯된 논란, 논쟁, 전쟁, 투쟁, 작은 갈등들 까지도 '동전이 없다'고 가정햘 에 시시비비를 가릴 까닭이 없는 것과 같이 문제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진리'란. 이렇듯 인간의 '내가 있다'는 최초의 앎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바탕을 둔 앎을 이르는 말이다. 매우 특별한 것이거나, 대단히 훌륭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으로써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는 앎이며, 모르는 것이 없는 앎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진리는 단순하다.
단순하기 이를데 없다.
왜냐하면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진리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재의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웠던 말, 말, 말들로써 구성되어진 것. 그것에 대해서 인간은 '나'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가 그토록 분명하다고 아는 그대의 '자아(自我)'의 허상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어린아이시절에는 '내가 있다, 없다'는 분별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모든 글들. 나의 주장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순수의식에 바탕을 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세상에는 오직 나의 말만이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그대 자신의 순수의식에 바탕을 둔 말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내가 있다'는 생각이 없으며,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없다'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생각이 있다는 말도 아니다. 그런 분별된 생각, 이원성이나 다양성의 비논리적인 논리 자체가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인간은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며, 생각이 무엇인지 모른다.
언어가. 존재계가... 그대의 수많은 생각들.... 그 생각의 환상물질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진리. 즉 올바른 앎이란 언어가 상대적일 뿐,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을 일컷는 말이며, 이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 '참 나, 참된 치이, 광명의 지혜, 전지전능...' 등의 무수히도 많은 여러가지의 말, 말, 말들로 표현되는 것이다.
소위 깨달음으로 표현되는 말들, 올바른 앎이란.
찰나지간의 착각현상이 아니라는 말이며, 꿈꾸다가 깨어나서 아는 것도 아니며, 비몽사몽간의 정신 나간 상태의 환상이 아니라는 말이며, 어쩌다가 우연히 실수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말들 한구절로써 깨달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들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홀로 고뇌하여 깨달을 수있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이다. 옛 선사라는 중생들의 말재간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어리석은 까닭은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스러운 것은 그들의 모든 주장들에는. 아니 인간들의 모든 지식들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들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들... 그것들에 대해서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식이 왜 시작도 없으며, 왜 끝이 없는지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한 것이 지식이다. 그러니 어불성설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올바른 앎을 얻기 위해서는 분명한 길이 있으며, 분명한 방법이 있다.
인간들의 모든 앎에는 근거가 없는 주장들이다. 반면에 이곳의 모든 글들에는 분명한 근거에 바탕을 둔 말이며, 더 나아가 사실을 사실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설명되어 있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이 법, 방법은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의 마음의 근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 자여.
그대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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