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學而第一(학이제일)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溫이면 不亦君子乎아."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배우고 때에 맞추어(timely)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
뜻을 같이 하는 친한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내지 않으니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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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계 4대 성인 중에서 성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공자와 맹자이며, 성인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성인의 반열에 들만한 사람이 있다면, 노자와 장자이다.
사실. 식자우환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식자우환'이라는 말을 올바르게 아는 사람이 없다. 그들이 곧 성인, 성자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공자의 인생삼락이라는 말, 식자우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왜냐하면 지식으로써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어리석은자의 괴변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지식으로써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현시대 사람들... 누구가 기쁨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식자우환'이라는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사람이라면 지식을 탐하지 않는 것이며, 식자우환이라는 말의 깊은 뜻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지식을 탐하는 것이다. 사실 지식은, 왜 지식이 끝이 없는줄도 모르는채 지식에 묻혀 죽는다. 지식에 대해서 무지라고 하는 까닭은, 지식으로서는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광신자나 맹신자들은 오직 자신들의 믿음만이 유일하다고 믿는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지식 또한 광신자. 맹신자들과 같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언어로써 서로간의 논쟁을 위한 도구일 뿐, 해답이 없기 때문에 가치 없는 것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지식이다.
그 사례 하나를 든다면,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왜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경험한 자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이해 한다면....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정한 휴식이다.
새기줄로 묶은 짚신을 신고 다니는 장자가 공자를 비웃는다.
비웃는다기 보다는, 공자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너의 그 허울을 벗어라' 라고.
네가 도대체 올바르게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소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다.
사실. 지식으로써의 앎에는 단 하나도 올바른 앎이 없다.
가장 단순한 질문들이지만 답을 모른다.
삶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왜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져. 남들이 두려워 하기 때문에, 나도 남들과 같이 두려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지식이다.
그져. 타인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흉내내는 것들이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
'내게는 나만의 고유한 마음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근거가 전무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타인들로부터 주어 모은 수많은 정보들 중, 하나의 정보에 불과한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존심' 또한 그러하며, 자존심이 상한다는 '감정' '느낌' 또한 그러하다.
그대만의 고유한 느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느낌 또한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것이다. 사실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 그대의 기억세포에 저장된 조각 조각난 말조각들의 유기적인 작용의 결과물들... 그것들의 조합에 의해서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나는 지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인간은 지성체다.
기억세포, 즉 뇌에 저장된 생각들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육체는 순수한 물질이다.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 그 말들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지금 그대의 '나는 사람이다, 나의 마음이 있다, 나의 생각이 옳다'는 것들이다. 타인들로부터 끌어 모은 정보들에 대해서, 그대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서로가 '나만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존귀하다' 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해답이 없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우고 익히기 까지는 앵무새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앵무새의 말은 말이 아니라 소리이다.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에게도 말은 말이 아니라 소리이다.
엄마라는 소리, 맘마라는 소리, 빠빠라는 소리, 사과라는 소리. 자동차라는소리, 소리, 소리... 이다.
어린아이에게 '엄마' 라는 소리는 앵무새가 '엄마' 라고 부르는 소리와 같다.
엄마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하기 까지는... 엄마가 되었을때, 그때 조금 이해 하는 것이다.
그대가 지금 아이들의 엄마라고 하더라도, 그대의 부모의 뜻을 모르는 이치와 같다.
그대가 지금 아이들의 아빠라고 하더라도, 그대의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고 나서 일곱살쯤만 되더라도. '엄마 왜그래, 아빠는 왜 그래요' 라며, 말을 배우던 아빠와 엄마에게 자기를 주장하는 것과 똑 같이. 그대 또한 그대의 부모에게 아이들이 하는 그런 방식으로 똑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아니한가?
엄마 말, 잘들어야 착한 어린이지? 라며, 아이들에게 말 잘들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너를 위해서라며, 이이들에게 강요한다. 공부 잘하라교... 착하게 살라고. 하지만... 남들에게 지지 말고, 남들보다 더 잘해야 된다고... 서로가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는 자가 되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 서로가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대의 부모 또한 그런 방식으로 그대를 양육했다.
지금 그대는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는가?
지금 늙은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말이다.
지식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뭔가 옳은 구석이 있는 것 같지만, 터무니 없는 거짓말들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올바른 앎은 겨자씨 만큼도 없기 때문에 서로가 자기 주장에 골몰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지식이 터무니 없다고 말하는 까닭은 서로가 주장만 무성할 뿐,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삶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해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것이다.
타인들로부터 끌어모은 지식으로써 아는 앎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여 자신의 마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만 올바른 앎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모든 글들이 그러하다.
남들에 대해서 이해 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올바른 앎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도, 깨달음이 무엇인지 지적으로나마 이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지식에 대한 주장과 같이 그져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 방법까지도 설명하고 있으며, 그 길을 가라는 것이다. 오직 그 방법만이 그대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다.
'너 자신을 알라' 그렇지 못한다면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말은 단지 소크라테스만의 말이 아니라, 예수의 말 또한 그와 같은 뜻이며, 석가모니의 말 또한 같은 뜻이며, 노자와 장자의 말 또한 같은 맥락이다. 단지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 다른 까닭은 그들이 존재하던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며, 조건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며,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글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예수의 '네가 너 자신을 알면,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며, 석가모니의 말은, '네가 너 자신을 알면, 네 마음 이전의 마음이 부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 그것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기억할 수 없겠지만,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 말, 말들에 의해서 가공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모든 지식이 그러하다.
근거가 없기 때문에 지식은 지식의 끝이 무엇인지 모르는채 지식에 묻혀서 헤매는 것이다.
지식의 근원은 모르는채,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기 때문이다.
보고 느낀다는 것. 그 자체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고 느낀다는 것들.
그 있는 것들의 근원은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이 나타나서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 '도' 라고 이름지어진 것이다.
'도'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이전에 있던 것이다.
인연있는자여.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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