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론 - 잘사는 삶 · 올바른 삶

맹자의 성선론과 순자의 성악론. 고자의 무선무불선론 그 오해와 진실

일념법진원 2014. 10. 6. 05:44

1.고자의 무선무불선(無善無不善)론

 전국시대(戰國時代)의 詩人이었던 고자(告子: 성은 告, 이름은 不害이다.)라는 사람이 맹자(孟子: B.C.372~B.C.289) 와 性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맹자·고자상(告子 上)》에 나온다. 여기에서의 性이란 人性을 말한다.


고자는 사람의 性은 기류(杞柳: 버드나무이름)와 같은 것으로, 이 나무를 휘고 엮어서 여러 가지 용기를 만들듯이 性으로써 仁·義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또 性은 물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로 흐르는 것이지, 물에 동서의 분별이 있어서 동으로 흐르고 또 서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처럼 人性도 善이나 不善의 분별이 있는 것이 아니며[人性是無善無不善], 人性은 도덕이전의 자연적인 것이며 본능이라고 한다. 고자의 말에 맹자가 반론을 제기한다.

 

2. 맹자의 성선론

맹자는 기류라는 나무의 성질에 따라 저절로 용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만들려는 의지를 가지고 나무를 꺾어와 만드는 것인데, 이처럼 人性을 후천적인 人爲로 仁義로 개조할 수는 없다고 한다. 물은 동서의 분별은 없지만 상하의 분별이 있기 때문에 아래로 흘러내려가듯이, 人性도 물처럼 善한 곳으로 흘러가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래로 흘러내려가지 않는 물이 없듯이 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억지로 물을 쳐서 위로 오르게도 하고, 물길을 막아서 역류케도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물의 本性이 아니듯이, 사람이 不善하는 것은 외적인 세(勢)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람의 本性은 본래 善한 것으로 도덕의 본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사람의 人性 속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仁, 수오지심(羞惡之心)의 義, 사양지심(辭讓之心)의 禮 그리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의 智 등 사단(四端)이 본래 들어 있다고 한다. 곧 이 人性은 곧 선험(先驗)의 도덕의식으로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점이라는 것이다.

 

3. 순자의 성악론

순자(荀子: B.C.313~B.C.238. 戰國 말기)는 맹자와는 반대로 성악론(性惡論)을 주장한다.

“人性은 본래 惡한 것이며, 善한 것은 人爲적인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쟁탈(爭奪)을 벌이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다. … 태어나면서부터 이목(耳目)에 욕심이 있어서 성색(聲色)을 즐기기 때문에 음란해지고 예의가 없는 것이다. … 人性이 惡한 것은 분명한데, 善을 행하는 것은 인위적인 위(僞: 人爲)이다.”

《순자》·성악(性惡) 편.

이처럼 人性이 본래 惡하기 때문에 강자는 약자의 것을 빼앗고 폭력을 휘둘러 천하가 어지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순자는 맹자와는 달리 교육이라는 후천적인 훈련과 예(禮)와 법(法)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惡한 性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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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면. 위의 글들 중에서 '맹자'의 말이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의 괴변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물은 동서의 분별은 있지만, 상하의 분별은 있다는 방식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무지에 바탕을 둔 분별심의 어리석음이 이와 같다. 자연을 자연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척도로써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주장한다.

당연하겠지만, 근거 없는 주장이며, 타인들로부터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내가 사람이다는 말과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말은 한생각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적인 말인데,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각하든... 지 마음이기 때문이다. 허헛. 사실 '내가 사람이다'는 주장은 편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이렇다, 저렇다,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라는 방식의 모든 주장들에 대해서 단견이며, 소견이며, 편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올바른 앎이란, 이런 이원성이나 다양성이 허구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그대로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비유를 든다면, 내가 사람이다'는 앎도 편견이며, 내가 사람이 아니다'는 말 또한 단견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지식들... 인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해답이 없는 이유와 서로가 죽는 날까지 자기주장만 일삼는 짓들이 모두 그런 단견, 편견 소견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것이며, 평화로울 수 없는 것이며,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기 때문에...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거나, 나만을 위해서 살라고 주장하니. 어찌 그 속에서 행복이나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근거 없는 앎으로써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한 인간세상에 행복이나 자유, 평화라는 말... 어불성설이다. 식자우환이다. 근거없는 지식, 앎으로써 죽는 날까지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물" 은 인간들과 같이 '내가 물이다' 라고 주장하지 아니한다. 

'물'이 상하를 분별한다고 주장하니.... 어찌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맹모삼쳔지교라는 말이 있는데, 맹모의 무지에 의해서 맹자가 그토록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이다. 식자우환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지 말라.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그대 스스로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대상들 모두를 자유롭게 하라. 왜냐하면 삶, 인생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근거도 업는 자기 잘난맛에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올바른 앎으로써 서로간의 분별심이 아닌 토론일 수 있을때, 그때 서로가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보려하지 말로 우선,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일념법명상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먼저 이해 할때, 그때 비로소 다툼이 없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해 할 수 있어야만, 자신을 이해 할 수 있는 만큼, 대상을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타인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기 때문에 '너 자신을 알라' 고 하는 것이다.

 

 

위의 지나간 말들 중에 옳은 말이 있다면, 고자의 말이 옳은 말이다.

인성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자연적인 것이며, 자연의 생태고리 현상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노자의 '짐승같이 살라'는 말은, 현시대의 인간들의 서로가 잘났다고 싸우는 삶 보다는 차라리 짐승들의 삶이 더 평화롭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도 인간들의 삶,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들... 겉모습만 화려할 뿐, 부패하고 부패한 마음들, 더 부패해져 가는 마음, 욕망들을 볼때, 짐승들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은 없는 것 같다. 자연과 더불어 짐승같이 사는 삶이 더 아름다운 삶이다. 욕망에 찌든 삶보다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욕망.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 하는 사람. 그가 곧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오직 그 법만이 그대의 마음의 근원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질병에는 '도가의 약식'이 진리이다.

왜냐하면, 인간생명체 유기체의 원리에 뱌턍을 둔 유일한 식품이기 때문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