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나가 아니다.
나는 하늘이나 바다의 용도 아니며, 신도 아니며, 영혼도 아니며, 귀신도 아니며, 더 나아가 '나는 사람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이다'는 말, '내가 나다'는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인간세상의 모든 법칙에 대해서 스스로 원리가 없는 원칙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런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다만 그런 그 원인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무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원리'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 아래와 같다.
원리
원리(原理)는 법칙 가운데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을 뜻한다.
흔히 법칙 · 원칙과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이나 원래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원리는 진리의 근본이 되는 것을 뜻하나 충분히 검토되지 않고 가설적(假說的)인 것으로서 세워지는 원리도 있다. 이것은 진리 발견의 수단으로서 유효하다 하여 발견적 원리라고도 한다.
원리와 법칙[편집]
원리는 사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고, 법칙은 관찰된 현상에 대한 규칙성을 일반화 한 것이라서 사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물체의 무게를 물에서 측정하면 더 적다'가 법칙이고, '어떤 물체를 유체에 넣었을 때 받는 부력의 크기가, 물체가 유체에 잠긴 부피만큼의 유체에 작용하는 중력의 크기와 같다'는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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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직 인간의 척도로써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말이 '원리'에 대한 지식의 주장이다.
원리는 본래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는 말.
그리고 법칙은 '진리발견의 수단으로써 유효하며, 그것에 대해서 발견적 원리라고도 한다는 말이 인간 지식의 '진리'에 대한 해석이며, 원리에 대한 주장이다.
지식은 사실. 인간의 지식으로써 이해 하는 사실적이라는 모든 것들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필요한 것일 뿐, 사실적인 것은 아니라는 방식으로 이해 한다는 말이 요점이다. 발견적 진리라는 말은 옳은 것 같지만.... 그것으로써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행복이나 자유, 평화는 자신의 마음의 작용에서 오는 느낌이나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자우환이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른 앎은 겨자씨 만큼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근거 없는 학문으로써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그 옳다는 주장들 때문에 인간류는 지식이 전무하던 시대의 인간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에게 학문이라는 지식 따위가 없던 시대가 있었다.
인간류가 불을 발견하기 이전의 시대이며, 도구를 만들기 이전의 시대로써 유인원들의 존재와 같이 자유를 누리던 시대이다.
최소한 그 시대에는 현 시대와 같이. 암을 비롯한 각종 수많은 질병들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유기체인 인간의 몸을 질병 수술이라는 명분으로 칼로 찟거나, 꿰메거나 하는 등의 무식한 짓들 또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사실 인간이 지식을 초월한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만이라도 있다면, 그런 인체를 수술한다는 짓들은 야만인들의 무지의 소산으로서 살인죄 보다 더 큰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히포크라테스의 인간은 유기체라는 말에 바탕을 둔 말이며, 본래 인간은 자연계에 적응할 수 있는 야생동물들과 같은 자체면역체계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 쓰여지는 모든 글들...
우주의 원리, 인간이 근원. 즉 진리에 바탕을 둔 말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으로써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사전의 뜻에 대한 해석과 함께 자세히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며, 예수의 말과 석가모니의 말,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말 등의 해석과 함께 인간 지식의 허구성에 대해서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지식의 허구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유는,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듯, 현 시대의 인간들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없듯, 인간의 지식으로써는 결코 인간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 설명되는 말들 중에는 '인간이 본래 인간이 아니라, 야생동물들과 같은 유기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둔 모든 질병의 치유방법에 대한 설명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근거 없는 지식 따위를 맹신할 수밖에 없는 고통받는 인간들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 인간들의 지식에 대한 맹신에 따른 고정관념이다.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때, 그때 비로소 모든 질병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방편중 하나가 '도가의 약식'이며, 인간에게, 인간세상에 유일한 만병통치 식품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 진리라는 말과 함께 '도가의 약식'이 모든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은 '생명체의 원리'에 바탕을 둔 말이며, 인간이 유기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둔 말이다. 일념법으로써 일념을 깨달은 인물들 만큼은 이곳 모든 글들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에 삶 자체를 아이들의 소꿉장난처럼 즐길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원리'를 이해 하는 '진리체'로써 삶과 죽음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에 의존하므로써.
사실 인간들의 모든 법칙은 인간의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위해서는 전혀 가치 없는 것들이며, 쓸모 없는 것들이다. 그 사례를 하나만 든다면.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법칙이 그러하다. 사과가 어떤 법칙에 의해서 떨어지든 말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말이다. 지구가 둥글든 말든 그대의 삶에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인간은 '발견적 원리'라는 수많은 법칙들을 사실적으로 여기므로써 시간과 공간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인간은 시간이 사실적인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 같다.
그런 사살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착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 사실 인간들의 모든 앎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것이며, 추상적인 것들이다. 가령 행복이라는 말이 있지만, 현시대까지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은, 행복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자. 시간이 있다는 관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사례를 통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다.
사실. 도구를 만들기 이전의 야만인들에게는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관념이 없다. 해가 뜨고 지고를 반복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지하기 까지만 하더라도 수십억년 이상이 지난 후에 알게 된다. 사실 현시대의 야생동물들 또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념이 없다. 오직 인간들의 관념으로서만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오직 지성체로 세뇌당한 인간들만이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또한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관념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사실. 해가 뜨고 진다는 말은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는 지식'으로써는 이젠 사실적인 말이 아니라 억지주장이다. 왜냐하면 지구가 둥글다면,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과 자전이라는 방식으로 회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서 '발견적 원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지식이다. 발견적 원리로 본다면, 해가 뜨고 진다는 말은 허구적인 말이며, 발견적 원리를 이해 할 수 없는 무식한 사람들의 주장이라야 한다. 아이들에게도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지식따위들에 의해서 더 행복하거나 더 평화로운 사람들은 누구일까?
지구가 둥글든, 네모든, 평형하든... 그것이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쓸모 있는 것일까? 지구촌 축제들... 올림픽, 아시아 45억의 축체... 그런 일들로써 불행했던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는 것일까?
그대는 행복을 누리는가?
대체 인간동물들... 그 율동들, 헤괴한 몸짓들... 스포츠 오락, 기술발전, 경제발전...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축제, 축제, 축제... 열광, 영광.... 과연 행복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이라면, 왜 그런 짓들을 일삼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사람들 중에 과연 행복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불행한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는. 그런 축제들로써 지난 삶보다 더 행복한 삶을 경험 했는가?
가는 곳 곳마다 축제 분위기. 이곳 저곳 이끌려 다니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축제일까?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구라는 행성... 얼마나 큰 것일까? 땅굴을 파고 사는 개미들만큼 큰 것일까? 그 속에서... 한켠에서는 총칼을 들고 국가간의 전쟁을 하며, 한 켠에서는 대정부 투쟁을 하며, 한켠에서는 불치병, 난치병과의 전쟁, 한켠에서는 굶주림과의 전쟁들... 한켠에서는 축제.
갓 태어나는 사람들, 길들여져가는 사람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 그 삶과 죽음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 자신이다.
그 축제들 속에서 과연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 축제들 속에서 과연 '평화로움'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과연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이 평화이며, 무엇이 자유일까?
모두. 모두. 행복한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지식의 부산물들이 아닌가?
축제기간 동안에는 행복했는가? 이제 끝났으니, 불행해야 하는가?
다른 축제들이 많으니... 계속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지금 그대의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니라면, 평화로운 가정이 아니라면, 스스로 자유롭지 아니하다면... 그대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모든 지식들... 무효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발견적 원리라는 것들,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위해서는 전혀 효과가 없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지식을 추구하는 까닭이나, 발전을 추구하는 이유는 인간들의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진리의 발견을 위한 수단으로써 시작된 것이라는 설명이 소위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의 목적이라는... 지식의 주장이다.
쓸모 없는 수많은 학문들, 학설들을 주장하는 것들... 소위 지식이라는 것들, 쓸모 없는 것들이며, 가치 없는 것들이라고 이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곧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다. 그들이 도가를 찾는 사람들이며, 그들만이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창조할 수 있는 현시대에서는 가장 지혜로은 사람들이며 인간계에서는 최상의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인간세상의 역사를 보더라도, 한시도 평화로운 시대는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삶... 모두 모두 하나같이 모두가 길잃은 어린 양들이라는 예수의 비유와 같이, 허구적인 지식의 노예, 욕망과 탐욕의 노예로 전락된 것이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찾다가 죽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다가, 병들고 늙어간다. 한만 가득 남긴채 죽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인생이란말인가?
아니다. 허구적인 것이다. 지식에 속는 것이다.
올바른 앎은 겨자씨 만큼도 없는데.... 다 안다는 착각, 생각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그러니 한스러운 것이다.
해답을 모르는 삶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만 하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최소한, 최소한...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말이다.
그대의 인생이라면....
그대가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원한다면 말이다.
지성체는 "원리. 즉 진리는 사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고, 법칙은 관찰된 현상에 대한 규칙성을 일반화 한 것이라서 사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사실적이라는 것에 대해서 물체의 비중이 물속에서는 다르다는 사례로 그것을 사실화 한다.
지성체의 입장으로 볼때, 즉 자연을 자연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의 척도로써 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옳은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봄으로써 인간들이 행복하거나 평화로울 수 있거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상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세상에 평화로운 인간은 있을 수 없으며, 행복한 사람도 있을 수 없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 삶이라는 것의 최후의 목적지는 죽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문병발전의 덕택? 으로 늙기도 전에 병마에 시달려야 하니... 대체 삶이 무엇일까?
살인을 당하거나, 자살을 하거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고를 당하거나, 길을 가다가 차에 치여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젊은시절부터 불치병이나 난치병으로 고통을 겪거나, 운이 좋아서 병들지 아니하고 늙어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몸 조차 자유자재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삶이 기쁨이며, 즐거움이라고,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일말의 후회도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이건, 내일이건... 죽음 앞에 서더라도... 나는 기쁘게 살았노라, 라고 할 수 있는 삶에 대해서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 방법에 대해서 알리려는 것이다. 이곳 모든 글들의... 최후의 결론이다.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 죽는 날, 그 죽는 순간 까지도 건강한 몸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삶. 그 길, 방법에 대해서 전하려는 것이다.
백천만겁난조우의 인연있는 이들에게나마.
지식으로써의 앎이 참으로 무모하기만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에 대해서 무지몽매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원리전도몽상에서 깨어나라고 하는 것이며, 하루종일 기도 하여 '네 안에 하나님이 있음'을 깨달아 알라고 하는 것이다.
지식이 무지몽매한 까닭에 대한 간단한 비유를 든다면. 인간은 현시대 까지도 '해가 뜨고 진다'고 생각한다.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라면.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때문에... 해가 뜬다는 말은 샛빨간 거짓말이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달나라를 정복하고 싶어 하며, 우주를 정복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달나라를 다녀와서 인간들이 행복한가말이다.
달나라에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앎, 그 따위 지식들로써 인간들이 더 행복하거나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말이다.
결론이다.
사실 인간은 자식의 무지에 의해서 가공된채, 가공된 가상현실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것을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지식으로 가공된 지성체는 '진리'보다 앞서 있던 것에 대해서 '원리'라는 말로 정의 하는 것 같다. 이 말은 '원리'를 이해 하는 것이 '진리'라는 말이다.
원리를 이해 하는 것이 진리라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런데 지성체는 '진리'를 모른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발전을 위해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발전을 꾀하는 것이다. 달리 방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발전이 인간 행복과는 상관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세상에 아득한 옛날에도 '진리'에 대해서 분명히 밝혔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 원인. 즉 '원리'에 대해서 '공, 무' 라는 말로 설명했던 인물이 석가모니이며, 그것의 이름이 '도' 라고 설명했던 인물이 '노장사상'의 노자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곳에 설명된 말들 또한 그들의 비유에 대한 설명들이며, 현시대의 보편적인 언어로써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리에 대한 비유법들, 방편설들이 종교나부랭이들에 의해 왜곡되면서 가르침의 본질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종교나부랭이들이나 기타 명상집단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 진리이며,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똑 같이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불변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네 안에 있다'는 말, 네 본성이다'는 말은 사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말이며, 단지 마음의 근원을 봄으로써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남들의 말을 듣고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념명상법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마음의 분별심이 잦아듦으로써 드러나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상대적인 언어 속에서 절대적인 앎을 아는 앎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실. 인간관념으로써는 '공, 무' 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공, 무' 라는 말, 말, 말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을 뿐, 그것의 '원리'를 이해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말 또한 그와 같다. '행복'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인 것이며, '원리'에 대한 앎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영구불변의 '진리'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두권의 책에는 '원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도, 깨달음, 공, 무' 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이 모든 것이며, 동시에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 그것이 그대의 마음에 가려져 볼 수 없는 '순수의식'이다. 물론 순수의식 또한 순수의식이라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그대의 본래의 나를 찾으라는 것이다.
세상에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언어 없이는 그대의 나도, 세상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이해는 불가하다.
하지만 비유로써 이해는 가능하다.
'원리'를 이해 하는 올바른 앎인 '진리'는 숫자 "0" 로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숫자로 본다면 숫자 '0' 는. 숫자로써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숫자를 헤아린다면 분명히 숫자 '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며, 오직 홀로 있는 것이며, 홀로 완전한 것이다. 다른 숫자들 또한 숫자 '제로'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있는 것이지만 없는 것, 없는 것이지만 분명히 있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다.
있지만 없는 것, 없지만 있는 것,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것. 이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석가모니의 말에 남겨져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등으로 나열되어 있다.
불성을 보는 것이 아니며, 성불을 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을 보는 것이 아니며, 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지, 그대가 모르는 그대 자신의 마음의 근원을 찾는 일이다. 마음 밖에 있는 세상 모든 것들은 모두 환상이며, 몽상이다. 그대의 지난 날들... 꿈과 같이 기억속에 남아 있는 몇 조각의 생각들일 뿐, 실체가 없는 것들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리란.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그대 자신의 나를 아는 것이다.
타인들의 말로써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아는 것이다.
그대의 나가 진짜 그대의 나라면, 어찌 타인들의 말에 흔들리겠는가?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다.
자신의 나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일념법이며, 일념명상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법이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에 의존하라.
그리하여 가치 있는 삶, 검증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연있는자여. 그대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인생론 - 잘사는 삶 · 올바른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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