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解脫, 산스크리트어: mokṣa, 산스크리트어: mukti)은 자유(自由) 또는 해방(解放)을 뜻하는데, 몸과 마음의 고뇌와 속박의 원인인 번뇌로부터 해방되는 것 또는 벗어나는 것, 또는 해방된 상태 또는 벗어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1][2]
해탈에 대한 사상은 불교 이전부터 인도의 사상계에 보급되어 있었던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과 목표를 해탈에 두고 있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고뇌를 낳는 근본으로서의 무명을 멸함으로써 해탈의 도가 달성된다고 한다.[1]
즉, 무명은 지혜가 없는 것이며 그 지혜란 세계와 인생의 진리로서의 연기의 도리를 여실하게 아는 작용으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불리는 지혜이다. 따라서 무명은 여실하게 지견하지 않는 상태 혹은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무명을 멸해서 모든 존재가 '상의상대(相依相待)한다'는 연기의 관계에 있음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 고뇌의 속박을 벗어나 이상을 달성하는 길, 즉 해탈의 도라고 본다. 그리고 이 해탈의 도는 중도(中道)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의 수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해탈은 불교에서는 이상으로서의 열반과 동일시되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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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위키백과사전의 내용이다.
어학사전의 뜻은 아래와 같다.
①굴레의 얽매임에서 벗어남 ②속박이나 번뇌 따위의 굴레에서 벗어나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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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어떤 낱말이라고 하더라도 올바르게 아는 앎이 없다. 사실 인간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현시대까지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하지만, '행복'이라는 낱말 조차도 그 뜻은 서로가 다르게 이해 한다. 아니 사실은 인간들 개개인들마다 행복의 의미는 크게 다른 것 같다. 아니, 사실 행복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더 옳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삶이 있다면, 그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 목적지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 죽을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는 행복하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리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금 이전까지는 불행했기 떼문에 지금은 행복하다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며, 지금 불행하다는 말은, 지금 이전까지는 행복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본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진정으로 완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인연에 따라서 '도'를 공부할 수 있는 것이며, 일념명상법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생각의 윤회에서 비롯된 환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해탈'이라는 낱말의 뜻 또한 이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의 '해탈'이라는 말에 대한 주장들... 어불성설이다.
'해탈'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
굴레의 얽매임에서 벗어남 또는 속박이나 번뇌 따위의 굴레에서 벗어나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마음이 있다고 알 뿐,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이 '해탈'이라는 말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니... 인간들의 지식들 모두 이와 같이 허무맹랑한 것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해탈이라는 낱말의 한자의 뜻을 보니. '풀 解' 자와 '벗을 脫'자이다.
사실은 '심해탈(心解脫)이라는 말로써 '마음이 무엇인지 완전하게 이해 하여 마음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초기경전을 보니, 기원전 6 세기 경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이해 하여 탈출하는 방법이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있다. 그 기록을 보니....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다, 수상행식, 즉 마음 또한 이와 같다, 그러니 그것을 관찰하라" 는 구절이다. 이와 같은 방법에 대해서 현시대의 보편적인 언어로써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 설명된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이 방법만이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념법으로써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생멸현상에서 비롯된 몽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어야만, 그때 비로소 '해탈'이라는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 그때부터 비로소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지혜가 생겨난다는 말은, 지식은 허구적인 것이며, 진리는 사실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들의 허황된 생각이다' 라는 올바른 앎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사실. 해탈이라는 낱말의 본래의 뜻은,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은 '육체가 나다' 라는 과정관념에서 '육체가 나가 아니다'라는 고정관념으로 관념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가 나다'라는 앎에서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앎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며,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나다'는 생각과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은 단지 한생각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가 나다'는 앎 또한 단견(편견, 소견)이며, '육체가 나가 아니다' 라는 앎 또한 편견(단견, 소견)으로써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무'라는 말이 있으되 '깨달음'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립문자' 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며, '언어도단'이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다.
사실은 "명색의 동일시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을 이르는 말이 '해탈'이라는 낱말의 본래의 뜻이다. 왜냐하면 인간세상의 모든 언어가 사실적인 실체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이름과 형상'과의 동일시에 따른 착각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인간들의 '우리가 사람이다'는 말 조차도 올바른 앎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람이다'는 말은... '우리가 사람이 아니다'는 말과 상대적인 말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이다'는 말에는 '우리가 사람이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사람이다' 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왜? '우리가 사람인가'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만 논리적인것이며, 합리적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우리가 사람이다'는 말에 대한 근거에 대해서 고작 '지구상에서 지능이 가장 뛰어난 동물이기 때문에...' 라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근거가 될 수는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라는 주장 또한 다른 동물들의 의견과는 상관 없이, 오직 인간동물들만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주장 또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단군신화, 천부경 또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사실,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 또한 하니님의 생각이 아니라 오직 인간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사실 '해탈'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낱말과 같은 뜻이며, '득도' 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한글로 '깨달음'이라는 말과도 같은 뜻이다.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앎에 대해서 '해탈'이라는 낱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사실 '해탈'은 우주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으로써의 '진리'이며, 인간생명의 비밀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 하는 앎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식자'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절대자'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유일자'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육체는 '나도 아니며, 내것도 아니며, 나와 비슷한 것도 아니다'는 말이 참으로 옳은 말이다. 예수의 말이 왜곡된 성경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많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너희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키를 한치도 더 늘릴 수 없는 것과 같이"는 말과 같은 표현들이다.
사실.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를 드린다는 말'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며, 석가모니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 또한 '깨달음, 해탈, 진리'의 완전한 앎을 이르는 말이다.
사실. 인간들의 삶에 해답이 없는 이유는 근본원인이 없는 것, 즉 '본래 나가 아닌 것'에 대해서 '자아'라고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세상이 평화롭기 위한 유일한 방법에 대해서 '진리'의 앎이라고 하는 것이며, 진리를 아는 앎일때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위의 설명들과 같이 '지식'의 앎은 근거 없는 앎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며, 무턱대로 주장하는 것이며, 진리의 앎은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며, 근거가 분명한 앎으로써 한치의 어긋남이 있을 수 없는 없는 앎이다. 사실, 인간들이 평평하여 화목할 수 없는 까닭은 근거 불분명한 지식의 앎으로써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앎으로써 다툼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근거가 분명한 앎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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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현시대의 광신자나 맹신자들, 그리고 지성체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다면 종교간의 갈등은 말끔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며, 지식들 또한 서로가 평평하게 화합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지식에 바탕을 둔 모든 주장들이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만큼은 한글일 깨친 자라면 누구나 분명히 이해가 가능한 말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대의 '내마음'이 남들의 마음보다 더 존귀하다는 '자존심' 또한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다면, 서로가 평평하여 화합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화합에 대해서 평화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인간들... 서로서로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지식의 앎이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한다면, 어찌 서로가 존중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말이다. 누구나 인생의 초보자라고 인정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어찌 겸손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서로가 올바른 앎이 아니면서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의 삶은 어떤 사고방식이라고 할지라도 올바른 삶, 가치 있는 삶일 수 없다는 사실.
인간세상의 인간들... 누구나 각자의 삶의 짐의 무게는 똑 같다는 사실.
하지만 그 짐의 무게가 본래 있는 것이 아나라는 사실... 이다.
사실. 인간류의 평화는 지식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진리의 앎으로써는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만 하더라도...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앎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만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고집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며, 진리에 무지하여 자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빙긋이 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종교들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 가족들끼리의 갈등, 이웃과의 갈등 등, 인간세상의 모든 갈등들 또한 그러하다. 서로가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에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며, 논란만 무성한 것이다. 만약에 그들의 앎이 올바른 앎이라면... 어찌 다툼이나 논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본래의 뜻이며,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진리의 앎을 알때, 그때 비로소 자유하리라는 말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이해 한다면,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며 올바른 앎이다.
인류의 자유와 평화는 오직 진리의 앎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가 곧 올바른 앎, 진리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예수의 말과 같이, 그대의 진리를 항한 열정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임과 동시에, 그대 또한 육체에 얽매인 정신에서 풀려나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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