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어 · 불이일원론

[죽음]의 정의(正意) -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경험자가 없기 때문이다

일념법진원 2014. 12. 21. 07:40

죽음.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자는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은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서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운 말들에 바탕을 두고 죽음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는 것이다. 

'死後세계' 또한 그러하다.  

 

'죽음'이라는 낱말, 말, 언어가 있는 것이다.

'어떤 것' 에 대해서 '까마귀' 라고 이름 짓고.... 그 이름에 대해서 동일시하여 까마귀를 까마귀라고 아는... 명색의 동일시와 같이... '죽음' 또한 그것을 경험할 수 없는 인간들에 의해서 지어진 이름, 명칭, 낱말이다.

 

사실.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만약에 죽음이 사실적인 것이라면, 그대는 매일 죽음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 경험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다. 깊이 잠든 상태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며, 깊이 잠든 상태는 기억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에...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세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삶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죽음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경험한 자의 생각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자들의 생각이며, 망상의 산물이다. 추측이다. 환상이다. 몽상이다.

 

 

사실,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까닭은 자신들의 삶이 사실적인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사실적인 것은 없다. 시간과 공간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듯이 현상세계 또한 사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경험하는 세상은 그 근원인자 즉 물질들의 근본 원인 인자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인간 삶이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천국일 수 없다. 삶 자체가 행복이나 평화가 아나라, 죽는 날까지 사실적인 것이 아닌 행복을 찾아 헤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삶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세상이나마 행복하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 또한 그러하다. 

만약에 인간들이 죽은 자들의 말을 들어볼 수 있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며, 죽음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삶 또한 조금이나마 가치 있는 삶으로 재창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삶에 있어서 굳이, 꼭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굳이 꼭 해야할 일이 있다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들끼리 서로가 평화롭게 사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 오직 그것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대해서 '서로가 사랑하라'는 말로 표현했던 인물들이 죽음을 경험했던 인물들이다. 

 

사실 인간들의 '서로가 사랑하는 일'은 욕망과는 상관 없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이나, 자유, 평화는 명성이나 재물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이나, 자유 평화는 오직 마음의 작용이며, 마음은 환상이기 때문이며,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으로써 사실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의 명령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죽기전에 꼭 해야만 할 일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일이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에 대해서 정의하는 이유, 즉 '죽음의 올바른 뜻'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유는... 인간들의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항상 가치 있는 삶을 산다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치의 후회도 없는 삶을 산다면, 언제 죽든지간에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  누구나 자신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 즉 잠재의식에서의 갈망은 '자유' 이다. 물론 그 자유는 '자유'라는 말이 없는 자유이다. 그것은 바람이 아니라, 바람결에 흘러다니는 구름과 같은 것이다. 인간에게 본성이 있다면, 본래 그것이다.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자연이다. 인간이 본래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분리된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위자연이 있다고 가정한다면)인간은 본래 인간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곳 글들은 죽음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대의 조상들이 그대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이며, 인류의 조상들이 인류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수천 수만번씩이나 삶과 죽음을 반복하여 경혐했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사실 이런 말에 대해서 '사자의 서' 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 같다. 

 

 

사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경험하는 시절은 오직 '행복, 자유, 평화' 라는 말을 모르던 어린아이시절이다. 그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는 까닭은, 그런 말들을 몰랐었기 때문이며, 기억세포에 저장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 말, 말' 즉 언어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가 경험했던 어린아이시절은 사실 시간이라는 관념이나 공간이라는 관념이 희미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지금은 분명하지만... 사실 분명한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관념에 묶여 있는 것이다. 지식이 원인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다, 없다는 말은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실. 지금 이순간, 즉 현실을 경험할 수 없지만...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과거가 있기 때문에 현제가 있으며, 또한 미래가 있다는 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현실을 경험하는 내가 있음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사건 하나는... '나는 지금 이순간을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이다. 현제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과거에 머무는 것이며, 과거를 사는 것일 뿐, 현제를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하는 순간, 생각하는 순간, 순간, 순간들이...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과거지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항상... 죽는 날까지도 과거를 경험하는 것일 뿐, 현제나 미래를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삶, 인생에 해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해답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삶은 어느모로 보거나 가치 있는 삶일 수 없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인간들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자연계의 동물무리들 입장에서 보더라도, 인간동물은 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인간들끼리의 경쟁, 도전, 투쟁, 전쟁들 또한 그러하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 서로가 경쟁, 투쟁, 전쟁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인간들에 대한 모든 행위들... 선을 가장한 악행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이 지식이 아니라 무지이며, 무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의 존재 자체가 그러하다. 명분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더 잘살기 위해서... 라고 끊임없이 외쳐대지만... 지식이 많아지면 많아지는 만큼, 더욱 더 철저하게, 더욱더 완전하게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변해가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인간들이 그러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인간이 왜 태어난 것인지, 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가야 할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삶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알리기 위해서 존재했던 인물들이 곧 석가모니와 예수, 소크라테스 등이며, 지금 이사람이 또한 그 길을 다시 전하는 것이다.

현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써, 논리적인 말들로써, 육하원칙에 어긋남이 없는 올바른 말들로써 그 길을 다시 전하는 것이다. 이젠 지식의 앎으로써도 진리의 앎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인간류의 현시대가 말세시대이며, 지식에 매몰된 인류의 종말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그 첫째 이유는 시간과 공간이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첫째 이유는 죽음은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살아 있다면, 산자는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깊이 잠들고 싶지만,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 것이 삶이라면, 죽음은 깊이 잠든 상태와 같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의 가르침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왜곡되면서) 인간들에게는 '서로가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라'는 방식의 가르침으로 왜곡되었으나,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인간들의 인간들간의 아귀다툼하는 삶, 즉 투쟁하는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천국이라고 한 것이며, 석가모니의 말 또한 그러하다. 사실. 우상숭배사상으로 전락되지 않은채 전해지는 소크라테스의 말에서 그들의 가르침의 올바른 뜻을 볼 수 있는데, 그 말이 곧 '가치 있는 삶' 이라는 말이며, '검증된 삶'이라는 말이며, 지식의 앎이 아니라, 진리의 앎으로써 삶과 죽음의 한계를 벗어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말 중에서 인간들의 삶에 지침이 될만한 가장 중오한 말이 있다면, 유일한 악은 '지식'이며, 유일한 선은 '진리'라는 말이다. '진리의 앎'으로써 행복과 자유,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지만... 사실, 행복이나 자유,, 평화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초월한 올바른 앎일때,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며, 죽음이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므로써 검증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는 또 다른 생각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존재는 원인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으로써는 인간 존재의 원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신, 절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을 믿든 신을 믿지 않든... 사실,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원인없이 나타났다가 원인없이 사라지는 것으로써 허무맹랑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의 끊임없는 갈등이나 투쟁, 경쟁의 원인은 본래 성품이 그래서가 아니라, 개체적 자아들의 자신의 순수의식과 자신의 지식과의 갈등이 원인인 것이다. 천지만물과 자연과 인간이 사실적인 것들로써 존재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무위자연이 자유라고 가정한다면... 인간은 본래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자연의 자유가 바람이든, 물이든, 구름이든, 나무이든, 청산이든... 언어에 묶이지 않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위 '육체에 얽매이지 않은 정신'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 같다. 언어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류의 역사가 그러하듯, 인간류의 지식은 끊임없는, 끝없는 다툼이며, 경쟁이며, 도전이며, 투쟁이며, 전쟁이 아닐 수 없다. 개체적 자아들의 삶 또한 그러하며, 그 삶의 결론은 행복이나 자유, 평화가 아니라 두려움과 고통과 회한만이 남겨질 수밖에 없는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인간들의 앎이 진리의 앎이 아니라, 지식의 앎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식은 지식의 시작도 모르는채 지식의 끝도 알 수 없는 지식의 함정에 빠진 것이며, 우물안 개구리들의 앎과 같은 것들이다. 사실, 지식이 끝이 없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 존재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이 본래 인간이다' 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본래 인간이라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해답이 없는 지식의 앎이 있기 때문에 해답이 분명한 진리의 앎이 있는 것이다. 

지식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의 할 수 없는 앎이며,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정의할 수 없는 앎이며, 반면에 진리의 앎은 지식의 앎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으로써의 올바른 앎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지식은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신, 절대자' 가 있다고 주장하는 단견이며, 진리는 신, 절대자가 있다는 생각은 절대자의 생각이 아니라, 오직 인간들의 생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으로써의 올바른 견해이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본다면, 삶과 죽음이 있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없는 세상이 있는 것이다.

 

 

그대는 '육체가 나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육체가 나가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물론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도 편견이며,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 또한 편견이다.

그대의 생각이 틀린 생각도 아니며, 그들의 생각이 틀린 생각 또한 아니다. 다만 그대와 그들과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이다. 다만 그대의 생각과 그들의 생각이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대는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그렇게 듣고 배워서 아는 앎이라는 것이며, 그들의 앎은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워서 아는 앎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이라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사실, '육체가 나다'라는 앎은 근거가 없는 앎인 반면에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앎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사실은 육체가 나다는 앎도 편견이며,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앎도 편견이다. 그런 편견을 떠난 앎에 대해서 '진리의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삶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경쟁이나 투쟁, 다툼이 아니라 평화라야 한다. 

죽음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또한 영원한 평화인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깊은 잠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지금 이순간순간을 평화로 창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순간 순간이 과거이기 때문이며, 과거를 창조해 나가는 일이 인간의 삶이라는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라는 말은 곧 자신의 나를 알라는 말이다. 

진리를 아는 자신이 곧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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