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 열반 [
반열반(般涅槃)·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산스크리트 '니르바나'(nirvāṇa)를 음역한 것이고 취멸(吹滅)·적멸(寂滅)·멸도(滅度)·적(寂) 등으로도 번역된다. 열반의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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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이라는 말에 대한 석가모니의 말이 한자로 번역된 열반경의 내용을 보니, '적멸위락'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 같다.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이해가 가능한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며, 죽음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삶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 또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삶을 이해 한다는 것은,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하여 올바른 앎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음을 모른다는 것은 삶을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삶이란 자신의 존재에서 자신의 비존재까지가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음 또한 삶의 일부인 것이며, 삶 또한 죽음의 일부인 것이다. 사실.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인간은 '육체가 나다'라는 제한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깨달음 즉 '득도, 수도, 견도, 무학도' 등으로 표현되는 '진리의 앎'은 우주의 근원을 아는 앎이며, 생명의 비밀을 아는 앎이며, 죽음을 아는 앎이며, 동시에 삶을 아는 앎이다. 인간들에게는 육체가 나이며, 생명이 있으며, 우주만물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편견이며, 단견이며 소견이다. 그들에게는 '육체가 나다'라는 고정된 제한적인, 한정된... 고정관념이 없다는 뜻이다. 우주가 나다는 관념도 없으며, 절대자나 신, 하나님이 나다는 관념(생각, 느낌, 마음)이 또한 없다.
죽음에 대해서 '본무'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본무'란 '본래 없는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래 없는 것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말 또한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말로써 모순이다.
'본무'의 근원에는 '본무'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적멸위락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고요함이나, 즐거움... 등의 모든 것들이 소멸된다는 뜻이다. 사실, '본무' 라는 것 또한 올바르게 아는 앎이라면 '사람들이 어떤 날짐승에 대해서 '까마귀'라고 이름 짓는 일과 같은 또 다른 '이름' 이다.
그들의 죽음 또한 그러하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이름과 삶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 또한 인간들의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인간들의 모든 앎이 근거 없는 앎이듯이... 그들의 말 또한 근거 없는 앎으로써 서로가 옳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겠지만... 착각이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란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경전들의 말들로써 이해 하려 하겠지만... 여전히 오해할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의 남겨진 열반경 사구게의 뜻으로 본다면...
제행무상 / 시생멸법 / 생멸멸이 / 적멸위락 諸行無常 / 是生滅法 / 生滅滅已 / 寂滅爲樂 이다.
사실, 제행무상, 시생멸법이라는 말은.... 인간의 관념으로 볼 때에는 물질이 사실적인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를 是' 자로써의 '시생멸법'이라는 말은, ... 올바르게, 바르게 본다면... 즉 깨달아 아는 앎으로 본다면... 생과 멸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일 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삶, 죽음, 우주, 천지만물, 세상... 등의 모든 것들이 '본래 없는 것들'이라는 말이며, 환상이라는 뜻이다.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듯이... 본래 없는 것이다는 뜻이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우주가 텅비어 근원인자가 없다는 방식으로 이해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양자물리학에서 '입자와 파동'이 우주만물의 근본원인 인자이지만... 그 또한 보는자의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는 말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대의, 인간들의 지식에 바탕을 둔... 생각의 환상물질이라는 말이다. 그대와 세상, 만상 만물들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생멸멸이' 라는 말은. 생과 멸... 즉 인간들이 경험하거나 경험자가 없는 경험 등의 ... 삶과 죽음이 이미 멸하여 없다는 뜻이다. 본래 삶과 죽음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에, 육체가 나다'라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차피 '우이독경'이 아닐 수 없는 말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으로써 ('육체가 나다' 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만 비로소 이해가 가능한 말이다.
이 말은 또한 '물질세계'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를 인식하는 정신(지식, 생각, 마음)이 있기 때문에 물질이 있는 것이다, 는 말로써, 물질적인 것이 있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는 말이다.
'적멸위락'이라는 말은, 그들의 '육체의 소멸'에 대한 설명으로써는... 즉 인간의 관념으로써 짐작이나마 가능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왜냐하면... 소위 깨달음의 고요함도 멸함이며, 즐거움도 멸함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영원한 것이 있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들의 육체에서 벗어나는 일은... '고요함' 도 사라진... 영원한 휴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는 이런 죽음에 대해서 천국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 것 같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주장하며, 3일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말에 대해서 환호하는 것 같다. 그래서... 죽은지 삼일만에 다시 태어나서... 그 다음에 무엇이 좋다는 말이겠는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서.... 다시 죽는 날까지 남들과 투쟁하기 위해서 사는 일들... 인간들은 그런 짓들에 대해서 부러워 하는 것일까? 허헛 참.
설마... 아니겠지?
만약에 그대가 뇌졸증에 걸려서 쓰려졌다가... 3일이 아니라, 삼십일만에 다시 깨어난다면... 그 순간은 황홀? 기쁨? 이겠지만... 나머지의 삶은 항상 즐거움이거나 기쁨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인간세상... 뭐가 그리 즐겁기에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일까? 허헛 참. 사실은 삶이 즐겁거나 기쁨이라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보니... 죽음 보다는 삶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사실, 그대의 마음이 그대의 뜻과는 달리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과 같이, 그대의 몸 또한 그대의 의지와 상관 없이 끊임없이 변해가는이유는... 그것들이 본래 그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본래 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인간들에게 이해 하게 하기 위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상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며, 절대적인 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항상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있다면... 죽음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휴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의 죽음은 그대만의 죽음이 아니라, 우주만물과 함께 소멸되는 것이다.
사실. 예수의 죽음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유사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의 앎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 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만약에 인간 삶에 중요한 것이 있다면... 진정으로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인간들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목숨이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만... 그들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대 또한 일념명상법으로써 일념이 무르익어 '독로(獨路)'를 보게되면, 목숨은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노자를 해석하다 보니. 노자의 말들 중에는... 그들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다'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육체가 나다'라는 고정관념이 사라졌음을 일컷는 말이다.
하늘나라가 있다는 생각과 하늘나라가 없다는 생각은 한생각의 차이이며, 오직 인간들의 고정관념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다. '육체가 나다'는 생각과 '육체가 나가 아니다'는 생각 또한 한생각의 차이이며, 상대적인 말이 아닐 수 없는 말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에 대해서 '진리의 앎'이라고 하는 것이며,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이라고 하는 것이며, 생명의 비밀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그들은 매일 매일 죽음을 경험한다.
인간이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까닭은 '깊이 잠든 상태'의 '본무'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은 경험이지만, 기억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에 '경험자가 없는 경험'인 것이며, 그들은 그것을 항상 경험하기 때문에 삶은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며, 죽음 또한 죽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의 의미란... 단지 깊이 잠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먹고 남은 음식물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며, 쓰고 남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듯한 봄날에 낡은 외투를 벗어 던지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굳이,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존재 자체가 변할 수 없는 완전함이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 즉 '도를 깨달은 인물들'이 인간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똑 같다.
그가 예수든, 석가모니든, 소크라테스든.... 그들의 말의 본 뜻은 서로 다른 사상이나, 이상이나, 이념 따위가 아니라... 오직 인간들에게 인간들끼리나마 서로가 사랑하는 삶을 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의 삶이 서로가 시기하고 갈등하며, 투쟁과 전쟁을 일삼는 짓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의 말 중에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일 보다는 차라리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일이 더 쉽다'는 표현이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만약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다면, 그리고 선함가 악함이 있다면... 부자가 악한 자라는 뜻이며, 차라리 가난한 자가 선한 자라는 뜻이다.
사실은 '유일한 악은 지식의 앎이며, 유일한 선은 진리의 앎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올바른 앎, 스스로 깨달아 아는 앎으로써 가치 있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오직 진리에 의존하여, 진리를 위해서 살라는 말이다.
'열반'이라는 말 또한 '이름이 열반'이다.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의 원리'에 바탕을 둔 설명으로써 누구나 이해는 가능할 수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다는 생각'과 '내가 죽었다'는 생각은 한생각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며.... 생각으로 지어진 모든 것들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꿈속의 일과 같은 환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삶이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오직 진리를 위해서 사는 삶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본래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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