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중도 · 방편설 - 말변사

해탈법 / 유상삼매(일념)와 무상삼매

일념법진원 2012. 9. 16. 19:09

삼매라는 낱말에 대한 한컴사전의 설명은 "한 가지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일심불란의 경지, 삼매경"으로 표현되는데, 삼매라는 낱말은 한자로부터 전해졌지만 그 어원은 산스크리스트어의 '사마디'로 표현되는 듯 하다.

어떤 말로 표현되든지 상관 없는 일이지만 깨달음과 관련된 모든 글들, 낱말들이 한자로 전해지면서 한글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 언어의 본래의 뜻이 올바르게 전해질 수 없었으니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설령 올바르게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깨달음과 관련된 언어들은 인간의 관념을 넘어선 말들이기 때문에 왜곡되어 전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세상이 그러하듯이 시대와 상황에 따른 관념의 차이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나라에 석가모니나 예수 또는 마하리쉬와 같이 올바르게 깨달아 아는 인물이 없다보니 삼매라는 말이나 무상삼매라는 말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설명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삼매와 무상삼매에 대한 설명 또한 일념수행을 통해서 일념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인물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뿐, 에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다. 왜냐하면 도의 관점으로 볼때 인간들의 지식이라는 것들이 한낱 쓸모없는 알음알이로 표현되듯이 지식은 한낱 분별일 뿐, 참다운 앎이 아니기에 쓸모없는 것들이다. 에고의 앎으로써도 식자우환이라는 말이 생겨났듯이 지식으로써는 자유나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유상삼매와 무상삼매의 차이가 무엇일까? 

삼매란 일념상태가 유지됨을 뜻하는 말이다. 

가령 수행자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구절이나 또는 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일념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는 어떤 생각이 일어났을때 "이런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나에게, 그럼 나는 누구인가" 라는 방법으로 일념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런 상태에 대해서 삼매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삼매는 유상삼매와 무상삼매로 나뉠 수 없으나... 위와 같이 일념수행의 과정에 대해서 유상삼매로 표현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유상삼매에서는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과 두번째 이유는 일념이 지속되더라도 찰나지간에 일어나는 생각들이 일념과 일념 사이에 이미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의 속성과 이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구도자들은 삼매라는 말에 대한 오해에 의해서 빛을 보았다는 등의 헛소리들을 하곤 하는데... 삼매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매 또는 유상삼매란 단순히 일념이 지속되는 상태라고 안다면 올바른 앎이며 무상삼매란 오직 일념만이 하루종일 이어지는 상태를 뜻하는 말인데... 이에 대한 라마나-마하리쉬의 말을 예로 든다면 유상삼매란 끈이 매달려 있는 두레박으로 비유할 수 있으며 무상삼매란 끈이 끊어진 두래박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 말은 유상삼매란 어떤 대상이나 어떤 특별한 상황에 놓여 있을때 일념이 이어질 수 없는 상태이며 무상삼매란 어떤 상황에서도 일념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무상삼매에서의 무상이라는 뜻은 생각이 없음을 뜻하는 말로써 일념을 위한 한구절의 말이 어떤 뜻이 있는 말이 아니라 그져 소리로써 의미를 상실함을 뜻하는 말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유상삼매에서는 일념수행을 하는 나가 있으며 일념수행을 위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일념문구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상태지만 무상삼매란 일념문구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이 이미 언어지만 언어로써 의미가 상실된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또한 언어라는 것이 근원도 없으며 근거도 없는 것들에 대한 소리들일 뿐, 바람소리 새소리등과 같이 그 뜻이 상실되었다는 말이며 이는 또한 말변사라는 말의 뜻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요점을 정리하자면... 

본래는 삼매라는 말 자체가 깨달음의 표현이지만 수행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유상삼매와 무상삼매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인데... 일념이 지속되더라도 수행하는 '나'가 있는 상태에 대해서 유상삼매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으며, 나가 나가 아님을 앎으로 깨어남이 무상삼매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념수행을 통해서 생각의 흐름, 즉 생각의 속성과 이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어야만 이런 말들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으며 일념수행을 체현하지 못했다면 역시 우이독경일 수밖에 없다. 도를 깨닫는 일... 노자와 장자의 말과 같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인만큼 스스로 체현을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올바르게 알려질 수 없는 것이며 예수의 말과 석가모니의 말이 서로 다르게 왜곡되면서 우상숭배사상으로 전락되었듯이 도의 언어 또한 이해한다면 오해하는 것이다. 

 

진리의 길, 도를 깨닫는 일... 그 길을 만난것만으로도 백천만겁 난조우라는 말이 생겨난 까닭이며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그 길을 가는 일 또한 쉬운 일은 어닌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왜 죽을 때까지 투쟁해야만 하며 고통과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가?

왜 인간은 누구나 언제 다가올지도 모르는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 회한만을 남겨야 하는가?

백년을 살거나 천년을 살거나... 어찌하여 인간은 후회없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가?

 

이 글을 보는 그대는 어떠한가?

너 자신을 알라.

검증된 삶이 아니면 살아가야 할 가치도 없다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는 왜 그런 말들을 한 것일까?

지금 그대는 검증된 삶,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과연 어떤 삶이 가치있는 삶이기에 예수는 짐승보다 나은 인간이 없다고 한 것일까? 

왜 석가모니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버러지나 미물이나 모두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인간들에게 중생이라고 한 것일까? 

 

그대의 삶, 아니 인간류의 삶.

논쟁, 투쟁 전쟁일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 

과연 가치있는 것일까?  

진정한 용기, 진정한 정의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죽음 앞에서도 미소지을 수 있는 후회없는 삶을 살아가면 어떨까?

그런 삶을 살기위한 길이 있다.

이름하여 진리의 길이다.

진원법으로 명명한 일념법이 진리이다.

 

진리. 오직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