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중도 · 방편설 - 말변사

깨달음? 진리? 란 무엇을 아는 앎인가? / 노자와 석가모니의 관계

일념법진원 2014. 7. 6. 06:11

인간세상의 인간들의 모든 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다'고 했던 인물들, 그들이 소위 깨달음을 얻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얻는 것이라거나, 버리는 것' 등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인식하거나, 이해 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에는 형상이 없기 때문이며,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말은 '언어가 없는 이치'라는 뜻이며, 더 자세하게 표현한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이며, '본래무일물'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사실 인간의 관념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언어로써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 또한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있는 어떤 것이 없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밖에는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없다. 인간의 관념으로써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이해 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 말, 말... 그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지식이라는 앎들 모두가 그러하다.

 

'행복, 평화, 자유'라는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올바르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자유'라는 말 한마디에 대해서도 서로간의 의견이 다르며, 행복이나 평화라는 말 또한 그러하다. 사실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떠들어 왔으나, 지금 이 시대 또한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중이다.

 

보다 나은 내일이나, 미래에 꿈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배워서 알고 있지만, 우주를 여행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말들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수천수만년 달려온 인간들의 세상이 현 시대이다. 그런데 또 다른 미래, 더 나은 세상, 더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만약에 진짜 행복한 세상, 더 나은 세상이 있다면... 이미 찾았을 것이며 더 이상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몸에 좋은 약이 있다거나 몸에 더 좋은 음식이 있다는 말들 또한 그러하다.

사실 인간들의 지식이 그토록 무모하다.

무지몽매한 것들이 인간인 것 같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떠들지만, 정작 '행복한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세상인지에 대해서는 묵묵무답이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시는가?

그대는 구체적으로 어떤 세상에 대해서 '행복한 세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말이다.

세상 사림들 대다수가 소원하는 것이,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들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어불성설이다. 자신의 마음 조차 자신의 마음에 꼭 들어 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마음 조차도 자신의 뜻대로 조정할 수 없으면서도 남들의 마음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기리려는 짓들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자신만 옳고 남들은 다 옳지 않다는 사고방식, 고정관념에 대해서 '자존심'이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며, 이기주의자, 이합집산... 이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관념이 옳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어찌 행복, 자유, 평화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이겠는가말이다. 그대가 찾는 것, 그대가 원하는 것, 인류가 원하는 행복한 세상... 그런 세상은 없다. 만약에 있다면... 벌써 찾아졌을 것이며,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다면 벌써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앎은 이토록 무모한 것들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고 상상하며 환상을 쫏는 허무맹랑한 것들이다. 그리고 깨달아 아는 앎이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다.

 

깨달음의 앎이란,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다" 라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이 선과 악의 분별, 옳다거나 옳지 않다는 분별, 행복하거나 불행하다는 분별, 아름답거나 추하다는 분별, 크거나 작다는 분별, 삶과 죽음이라는 분별 등의 모든 분별심이 사라진 앎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노자'의 도덕경을 해석하다 보니... 석가모니의 반야심경을 해석했던 내용과 똑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말에는 상대적인 것들이라는 표현과 함께 위와 같은 뜻들이 표현되어 있는데, 석가모니의 반야심경에는 '불구부정, 부증불감, 불생불멸...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를 오직 유일자라며 우상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들은 '노자'의 말은 본적도 없는 무식한 사람들일까?

 

아마도 광신자들이나 맹신자들이 '노자'의 글을 본다면, 우상숭배의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지 않을까? 예수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자들 또한 그렇겠지만... 인간들의 앎이라는 것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 보다 더 어리석은 까닭은, 그나마 장님들은 코끼리를 만져 보았기 때문에 경험된 사실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지만 인간들의 앎(지식, 말, 뜻)이란 자신의 체험사례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말, 말, 말들에 대해서 자신의 앎인냥 주장한다는 것이다.

 

분별이 사라진 앎(마음)이란 '육체가 나다 또는 육체가 나가 아니다'라는 앎 까지도 분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다. 석가모니는 이에 대해서 '심해탈' 즉 마음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으며, 노자는 '무위자연의 자유'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어린아이와 앵무새가 말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마음 또한 말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말, 말, 언어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 '일체유심조의 더 깊은 뜻'에 대한 설명과 같이...

 

깨달음이란 "本無" 를 이해 하는 것이다.

'본무' 라는 말은 '우주'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하늘과 땅, 인간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말, 말, 말로써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뜻으로써 그 이치를 깨달아 알때, 비로소 삶과 죽음 또한 본래 있는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다.

사실 깨달음의 앎이 환상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들의 삶 자체가 환상의 세상이다.

인간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 자체가 말, 말, 말로 지어진 환상의 세계지만,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이 세상이 환상의 세계라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할 수 없거나 상상조차 불가능한 까닭은 '내가 있다'는 앎(생각, 말, 뜻),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我)'가 있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나'가 있는 것이다.

"나 가 있다는 말(생각, 앎, 뜻)'이 없다면, 나는 없는 것이다.

"나가 있다는 말" 과 "나가 없다는 말" 은 상대적인 말이다.

상대적인 것은 주체가 사라질때, 대상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이 없는 것. 그것에 대해서 '본무', 본래무일물, 아무것도 없는 것의 원전함'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그런 이치를 깨달아 아는 자의 말에 대해서 '진리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끊임없이, 그리고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끝없이 반복 순환되는 언쟁, 논쟁, 다툼이나 경쟁들,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가 죽고 죽여야만 하는 전쟁들, 종교간의 이념 전쟁들... 모두가 그릇된 앎에서 비롯된 언행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그대가 원하는 행복이나, 자유, 평화라는 말 또한 그러하다.

인간들의 모든 앎은 언술이 뛰어나거나 말거나, 모두가 단견이며, 편견이며 소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한다면, 어찌 다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

"내가 사람이다" 라고 아는 한, 행복한 사람은 있을 수 없으며, 평화로운 사람도 있을 수 없으며, 자유로운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단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 편할 날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은 바다의 파도와 같이 끝없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의 흐름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자신의 생각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는 말에 대해서 조차도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생각의 원리" 라는 말과 생각의 속성과 이치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이며, 그들만이 올바르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인간세상에서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그들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행복이나 자유, 평화'라는 말, 말, 말에 대한 환상을 쫒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런 말에 대한 본래의 뜻을 이해 하므로써 스스로 행복과 평화, 자유를 창조할 수 있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에 바탕을 둔 고거를 사는 것이며 경험에 바탕을 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꿈을 먹고 살며,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이며, 미래의 꿈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에 대해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환상의 세계를 사는 것이며, 고통을 겪는 일들 또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동안... 그 동안과 이 순간 또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평화'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하는 것이다.

 

지난 날들은 꿈과 같이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들이며, 그 생각들에 대해서 '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꿈인줄도 모르면서 꿈을 꾸는 것이며, 꿈인줄 알면서도 꿈에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므로써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는 어떤 고정관념에 대해서 '나' 라고 주장하는가?

 

그대의 내가, "내가 사람이다" 고 주장하든, "내가 여자라고 주장하든", "내가 남자라도 주장하든",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주장하든, 그것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며, 그 경험은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말을 배우던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워서 아는 앎(말, 뜻, 지식)이다.

 

그대가 '나라고 주장하는 그것'은 그대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서 아는 앎(말, 뜻, 지식)이 아니라, 타인들의 말(앎, 뜻, 지식)들을 끌어 모은 것들로써 '자신의 것인냥' 재 창조한 것들이며, 사실적으로 경험한 것들이 아니다.

그대의 이름을 그대가 스스로 지었던 것도 아니며, 그대가 '내가 남자다' 또는 '여자다'라는 앎 조차도 타인들의 말을 듣고 보고 배워서 아는 타인들의 앎을 흉내 내는 것들이다. 사람들의 말을 흉내 낼 수 있는 '앵무새'라는 새 조차도 '나 괜찮아' 라는 말을 한다.

 

인간의 말과 앵무새의 말의 다른 점이 있다면, 앵무새는 "너는 앵무새야" 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더라도 "나는 앵무새다" 라고 아는 것이 아니라, "너는 앵무새야" 라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이며, 어린아이들 또한 말을 배워서 익히기 전까지는 앵무새와 같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 또한 말, 말, 말.... 언어로써 '자신을 인식 하기 이전까지'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사람들은 어린아이 또한 말은 모르지만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가르치지 않는 것 뿐이다.

 

사실 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겨우 이름을 알거나 또는 나이를 물었을때, 손가락 세걔를 펼쳐서 자신의 나이를 표현하는 아이에게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말, 생각, 뜻)이 없다. 그런 아이에게 '이름이 뭐야?' 라고 물으면 "철수" 라고 답변할 수 있으나, '너는 사람이야?' 라고 물으면, '몰라'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직은 '마음'이라는 말을 배우서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어린아이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이라는 수행방법으로써 기억된 모든 생각이 사라졌을때, 그때 '일념의 무념처'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 '육체가 나다, 또는 육체가 나가 아니다' 라는 앎이 올바른 앎이 아니라 착각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닫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석가모니의 말이 '원리전도몽상'에서 깨어나라는 말이며, 예수의 말또한 '하루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라'는 말이며, 깨어나는 날. 그날... 진리로 깨어나는 날, 너희와 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 곧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인생에 해답이 없는 이유는 상대적인 것들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이 상대적이며, 선함과 악함이 상대적이며, 삶과 죽음이 상대적이며, 이와 같이 모든 언어는 상대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해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항상 충돌하는 것이다.

 

사실 석가모니가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되기 이전에 했다는 말로 전해지는 '비아경'의 내용들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석기모니의 가르침의 요지를 보면.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 그것을 관찰하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무상한 것'이라는 말은 '없을 무' 자와 '항상할 상' 자로써 "항상할 수 없는 육체는 나가 아니다' 는 뜻이다.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는 말은 '마음 또한 나가 아니다' 라는 뜻이다.

 

수상행식이라는 말은 '얻을 수' 자와 '생각할 상' 자, 그리고 '행위할 행자와 앎 식'자로써 인간들의 '마음'을 일컷는 말이다.

'무명' 즉 앎(말, 뜻, 나라는 생각)이 없는 어린아이의 행위는 '무위'이다. 어린아이가 기어다니거나, 걸음을 배우는 과정의 행위(다닐 行)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受받을 수, 얻을 수)얻게 되는 앎(識. 말)과 '말(언어)에 의해서 일어나는 '생각들(생각할 상) 또한 '我'가 아니라는 뜻으로써 '마음' 또한 '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들에게는 '육체가 나다'라는 말 또한 생소한 말이다. 누구나 몸과 나를 동일시 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몸이 나다"라는 말은 굳이 말로 표현될 필요 조차 없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경험 이전의 사고방식, 생각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으나) 타인들로부터 말(=앎 識, 생각, 뜻)을 배우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최초의 생각이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고정관념이 되어버린)이다.

 

사실 인간의 모든 앎의 바탕은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識-알 식, 말(언어), 뜻)이다. 그 '육체가 나다'라는 하나의 생각에 대해서 책.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와 책. 비밀의 언어에는 '경험의 오류'라고 설명되었다.

 

 

소위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것은 '육체가 나다 또는 육체가 나가 아니다'라는 언어가 상대적인 앎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언어는 상대적이 아닐 수 없다.

상대적인 것이란, 주체가 사라짐과 동시에 대상 또한 사리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무', '본래 무일물' 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상대적인 언어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상 상대적인 언어에 세뇌 당한 인간으로써는 인생에 해답이 없듯이 행복이나 자유 평화를 누릴 수 없다. 삶과 죽음을 사실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다만 그나마 다툼이 없거나, 비교적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일념을 깨닫는 것이며, 인생에는 해답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인생에 해답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직 그들의 대화는 항상 다툼이나 논쟁 등의 자기 주장이 아니라 온전한 토론이 될 수 있다는 뜻이며, 그때 비로소 평화라는 말과 합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항상 시끄러운 이유는 '인생에는 해답이 없다'고 아는 사람들이 서로가 자신의 해답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죽는 날까지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직접 물어보라.

당신은 "인생에 해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라고.

 

인간세상에 행복이나 자유, 평화가 있을 수 있다면, 오직 그것 하나 뿐이다.

우리는 다 같이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단순한 한 생각, 너무나도 당연한 말, 보편타당한 앎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면, 어찌 다툼이 있을 수 있겠으며, 논란이나 논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상식적인 앎, 보편타당한 앎일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며, 모든 대화에 있어서도 다툼이나 주장이 아니라, 진정한 토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평화(平和)'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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