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네 부모를 용서하라'는 말에 대한 글을 썻던 것 같다.
석가모니가 '위빠사나 수행'으로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집단들의 수련장에 쓰여져 있는 글이 '네 부모를 용서하라' 라는 내용이라는데. 삶이 무엇인지 그 해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삶의 결론, 결과는 더욱 더 고통스러운 죽음인데, 삶마져 평화로울 수 없으니. 부모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통해서 석가모니와 같이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일 것이다.
사실 기록에 의하면 석가모니와 '보리 달마'로 알려진 달마대사는 출가를 만류하는 부모에게 '죽지 않는 방법'을 알려 주면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뿐, 삶이 없다면 죽음 또한 없는 것이다.
죽음이 있다는 생각과 죽음이 없다는 생각은 한생각의 차이지만, 육체가 나라고 아는 사람으로써는 '육체가 나다'라는 고정된 관념(생각)에서 깨어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사실로 여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과 함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들의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어거지로 그런 흉내를 낼 수 있을 뿐이다. 올바른 앎이란 명언이나 옳은 말인 것 같은 말들에 대해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앎으로써 실천할 수 있는 앎이다.
예수는 '죽음에 대해서 천국'이라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죽음에 대해서 '열반'이라고 하는데, 열반은 변함이 없는 영원한 휴식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진정한 휴식이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노자의 말은 조금 다르게 표현되는데. 도와 하나된 사람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다는 방식이다. 삶과 죽죽음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말들은 사실상 '인생무상'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는 말과도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세상에 명언들, 듣기 좋은 말들은 무수히도 많다.
명언집을 가지고 다닌다고 해서 명언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성경을 모두 외우고, 불경을 모두 외워서 알음알이 상을 낼 수 있겠지만, 정작 원수를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도 없다.
진정으로 올바른 앎일 때, 그때 비로소 그런 모든 일들에 대해서 용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여 화합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올바른 앎이란 무엇을 어떻게 아는 앎이겠는가?
그렇다.
소크라테스의 말에서 그 뜻에 대한 이해는 가능한 것 같다. 그 말이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체는 이런 말의 뜻 조차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이 아니라 무지이며, 무명이다. 예수의 말이나 석가모니의 말,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말은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일 뿐, 다른 가르침이 아니다.
선함과 악함의 분별이 그릇된 앎이라는 말이 그들 성인, 성자, 깨달은 자' 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물들의 가르침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으뜸 종' 자와 '가르칠 교' 자로써 '종교'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다.
올바른 앎이란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것이다. 선함과 악함이 곧 상대적인 언어로 구성된 말, 말, 말일 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것은 주체가 사라지면 대상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선함이 없다면 악함 또한 없는 것이며, 삶이 없다면 죽음 또한 없는 것이다. 선함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악함이라는 생각이 생겨난 것이며, 삶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생각이 있다는 뜻이다.
불곰이 연어를 잡아 먹는다면, 불곰은 악함이며, 연어는 선함이겠는가?
새가 벌래를 잡아 먹는다면, 새의 행위는 악행이며, 벌래의 행위는 선행이겠는가?
인간세상,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대변하는 것들이 정치구도인 것 같다.
국민이 선함이라면, 여당과 야당은 선함인가 악함인가?
여당도 아니며, 야당도 아니며... 그져 관망하는 사람이 그들, 즉 깨달은 자들이 말하는 중도일까?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예수는 중도(中道)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하늘에서 보니 부패하고 부패한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이라고 한다. 선함과 악함을 분별하는 인간의 마음이 '죄'라는 뜻이다. 물론 어린아이시절에는 그런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너희가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시절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선함과 악함을 분별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종일 기도하여(일념수행. 일념명상법으로...) 원죄에서 깨어나라고 한 것이다.
사실 중도는 선함과 악함의 중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숫자의 "0" 로 표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없는 것이지만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며, 있지만 숫자가 없는 것이 '제로'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길에 대해서 '황소'를 비유한 '십우도, 심우도'라는 그림에는 '원상'이 있으며, 석가모니의 후광이라는 말과 같이 예수의 상에도 동그란 모양의 빛이 있으며, 심지어 '원상'을 숭배하는 '원불고'라는 종교도 있다. 모두 올바른 앎이 아닌, 그릇된 앎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사실은 용서할 자도 없으며, 용서 받아야 하는 자도 없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누가 누구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말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들 또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하게 설득할 수 있는 능력 조차도 없는 것이다.
세상에 죄 없는 자는 없다.
누군가가 '용서하라'고 주장 한다고 해서 용서 할 수도 없다.
인간들의 삶 자체가 남들과의 전쟁이며, 경쟁이며, 다툼이며, 논쟁이며, 논란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 이유 조차 올바르게 아는 앎이 없다. 서로가 자신의 관념만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하나는 '원수'를 갚는 일은 갚음으로써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원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원수 아닌 사람이 없다. 자식이 원수일 수도 있으며, 부모가 원수일 수도 있으며, 친구가, 가족들이, 연인들이, 부부들이 원수일 수도 있다. 서로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된다며,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뛰어 다니는 사람들의 집단이 사회 구조이다. 도전한다는 일 자체가 다른 대상들 보다 더 많은 이익을 위한 것이니. 남들, 타인들 모두가 경쟁의 대상이다. 그러니 원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예수의 '낮은 곳에 임하라'는 말이 그 뜻이다.
남들과 경쟁하거나 투쟁하거나 다투지 말라는 뜻이다.
최소한의 먹을 꺼리를 위해서 행위할 뿐, 욕망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들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의 바탕이 욕망이기 때문이다.
사실 욕망이 없다면, 용서할 사람도 없는 것이며, 투기할 일도 없는 것이며, 경쟁해야 할 일도 없는 것이며, 원수 질 일도 없는 것이다.
인간들의 삶의 목적지는 죽음이다.
결국 인간들의 모든 경쟁들, 투쟁, 논란... 등을 일삼아야만 하는 삶의 고통은 결국 죽음을 위한 헛된 짓이라는 뜻이다.
사실 인간들의 서로가 더 잘살아야 한다는 아귀다툼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고 한 것이며, 석가모니 역시 '네 본래마음이 부처다'라고 했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순수성을 회복하라는 말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이라고 아는 한, 인간들에게 행복이나 평화 자유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목적이 죽음인 사람들에게... 언제 어떻게 죽을 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에서 행복이나 자유 평화가 있다면, 말은 말이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서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타인의 마음에 대해서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하는 만큼, 꼭 그만큼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은, 숫자 '0' 에 대한 설명과 같이, 마음이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이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것이다. 사실 '본무, 본래 없는 것, 본래 무일물, 하나님의 창조, 아무것도 없는 완전함'이라는 말은 '0' 조차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본무', 본래무일물... 아무것도 없는 것... 이라는 말은 단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을 전하기 위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의 지식으로써, 관념으로써,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 이해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앎들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들이라는 뜻이다.
세상만물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희망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올바른 앎, 참다운 앎이란 허무하거나 공허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던 자신의 마음의 작용 즉 해답도 없으면서 '등이 휠 것 같던 삶의 짐의 무게'에서 놓여남, 벗어남을 뜻하는 말이다.
인간 삶이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결국 모두... 자신의 몸 까지도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살아가는 동안 내내 한시도 마음이 편안할 날이 없는 까닭은... 인간 누구나 자신의 마음 조차도 온전하게 설득할 수 있는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사실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한다'는 말... 그 말 자체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인 것 같다.
종교란 본래 으뜸 가르침이라는 뜻으로써 우상숭배사상을 세뇌시키는 가르침이 아니라, '마음이 무엇인지' 에 대한 가르침이며,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 가장 높은 가르침이라는 뜻으로써 '종교'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인간이 수천년 역사를 거치면서도 행복한 세상을 창조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이란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자신을 주장 하는- 사람들...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는 아닌가?
진정 가치 있는 삶이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일체 유심조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나. 그것이 모든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나의 몸. 나의 마음.
-몸. 마음- 이전의 '나' 그것이 그대의 본래의 나이다.
'몸. 마음'을 벗어난 '나' 그것에 대해서 여러가지의 이름들이 지어진 것이다.
'몸'은 나가 아니라. '나의 몸' 이라는 말과 같이 '나의 것'으로써 '나'와는 별개의 어떤 것이다.
'마음' 또한 나가 아니라. '나의 마음' 으로써 '나'와는 별개의 어떤 것이다.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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