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중도 · 방편설 - 말변사

신비의 문 / 마음과 깨달음 그 오해와 진실 - 2) 순수의식과 무의식. 잠재의식에 대하여

일념법진원 2014. 8. 19. 07:30

이 글은 앞 - 1) 편에 설명된 바와 같이.  

도의 언어를 듣게 될 때에 큰소리로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하근기 중생이나 또는 끊임없이 반신반의 하며 자기주장을 일삼는 고집불통의 중근기의 중생들을 위한 글이 아니라, 올바른 앎, 참된 치이 등으로 표현되는 진리의 길을 가고자 하는 '백천만겁 난조우'라는 말과 같이 귀하고 귀한 인연이 있는 상근기의 중생들을 위한 것이며, 인간의 관념을 초월한 말들로써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론의 일부이다.

 

상근기 인물들이 도와 관련된 낱말들의 해석을 통해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가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는 '순수의식'이라는 낱말의 뜻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그런 인간들이 언어를 창조 했지만, 자신들이 창조한 언어에 구속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조차 불가능하다. 심지어 하나님이나 신 이라는 말들로써... 언어를 만든 것이 인간이 아니라 귀신이나 영혼, 하나님 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언어를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생겨나게 된 세상이 어지러운 현 세상의 인간들이다. 

 

인간은 지성체이다.

인간에 대해서 지성체라고 하는 까닭은 지식으로써 '내가 사람이다'라고 알기 때문이다. 현 세상에 대해서 정보화 시대라고 한다. 그 정보들과 다르지 않은 정보들 중 하나가 '나는 사람이다' 라는 지식이다.

 

인간들의 '나는 이런 사람이다'는 주장의 바탕에는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여자이다, 나는 남자이다' 그리고 나의 이름은 개똥이다' 라는 방식으로써의 정보에 바탕을 둔 다른 정보들이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정보들을 수집하여 그 수집된 정보들에 대해서 '내가 안다' '나는 이렇게 아는 사람이다' 라는 방식으로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지금 그대의 그대 자신이다. 그 정보들은 자신이 깨달아 아는 앎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타인들의 말들을 종합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조작한 것이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타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워서 알게된 최초의 앎이 '나는 사람이다'는 앎이며, 그 앎이 지식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 '지성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언어가 훌륭한 소통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착각이다. 왜냐하면 완전하게 소통될 수 있는 언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소통을 위한 언어가 있지만... 그 소통을 위한 말들은 사실 소통이 아니라,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주장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 말재간이라는 언술이 발전된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소통이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언술의 발전으로써 인간들이 화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언술의 발달로써 더 많아지는 것들이 서로가 옳다는 방식으로써의 이합집산들이 소위 인간 세상이며, 중생 무리들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노력? 투쟁, 경쟁... 전쟁을 일삼는 인간들의 삶... 그 근본원인이 언어의 본래의 뜻에 대해서 이해 하는 앎이 아니라, 오직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여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앎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체의 앎은 올바른 앎이 아니라 총체적 무지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말을 들어 주기를 원한다.

누구나 그러하다.

여당은 야당에게, 야당은 여당에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이들은 부모에게, 무모는 아이들에게... 선생은 학생들에게, 학생들은 선생들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사주는 직원들에게, 직원들은 사주들에게... 약자는 강자들에게, 강자는 약자들에게... 똑 같은 인간들이기 때문에 서로가 똑 같이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해답은 없다.

자유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앎들에 대해서 '나의 앎'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가 있다'는 존재 자체가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착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히 상상 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러하듯, 남들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 인간들의 언어로써의 소통, 말은 말이지만, 소통될 수 없는 것이 언어이다. 모두가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이며, 올바른 앎이 아닌 까닭은 그 바탕이 이미 어긋났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인간이라고 단정지은 것이 착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착각에서 깨어나라는 말이 그들, 도를 깨달은 자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석가모니와 예수, 노자와 장자, 소크라테스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말은 공통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점이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며, 모두가 시대와 그 시애의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서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지금 쓰여지는 글 또한 그들의 말이며, 그들의 가르침이며, 그들의 진언이다.

 

 

인간세상에 학문이라는 말이나, 종교라는 말, 문화예술이라는 말, 도덕이라는 말, 말, 말들이 생겨나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인간들의 조상격인 사람들, 예를 든다면 소위 구석기 시대라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 또한 중생무리들 중의 일부이지만, 그 시대는 지식이라는 말이 없던 시대였으며, 그들에게는... 우리가 지금 구석기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최소한 그들에게는 종교나부랭이들과 같이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일 따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지식으로서 경쟁하거나 서로가 더 잘났다고 주장하는 일 따위도 생겨나지 않았었다. 행복이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불행이라는 말도 없었으며, 선함이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악함이라는 말 또한 없었던 시대였다. 지식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이며, 국어 사전이 필요치 않았던 시대이다. 언어가 단순한 시대, 그 시대만이 언어로 소통될 수 있던 시대였다는 뜻이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나 현 시대의 인간들의 삶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만족하여 평화로운 세상은 없었다는 뜻이며, 인간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더라도 결코 만족하여 평화로운 삶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한가지 유일한 방법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 깨달아 알았던 인물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말에 대해서 '사자의 서' 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현 시대의 언어는 그들의 앎에 대해서 -한글로써는 '도' 를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사실 한글은 '그것'에 대해서 표현될 수 있는 낱말은 없는 것 같다. 다른 나라의 말로써도 표현될 수 없으나, 중국어로써는 '부처'라는 말이나, '불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데, 한글로는 그런 말과 같은 뜻의 다른 낱말이 없다는 뜻이다. 

 

'노장사상'이라는 말로 전해지는 '노자'의 말을 보니. "나는 그것의 이름을 '도' 라고 짓겠다" 라는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으며, 석가모니의 초기경전이라는 글 중에는 '나는 하늘의 신도 아니며, 바다의 왕도 아니며 더 나아가 나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굳이 이름을 짓는다면 '나는 불타'니라" 라는 말로써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의 말이라는 성경 구절에 보니. 예수는, 중생들(길잃은 어린 양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다' 라는 말로써 그 길, 즉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설명 되었다는 것이다.  

 

노자의 '도와 간격이 사라진 사람' 이라는 말과 석가모니의 '불타'라는 말,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말씀'이라는 말.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성인'이라는 말은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다만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감히 그런 말들이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각종 종교들이나, 각종 명상단체들의 주장들이 다르므로써 서로간의 갈등이 사라질 수 없는 것이며, 그 길, 방법들에 대한 그들의 설명들 또한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자. 그렇다면 그 길. 즉 한글로는 '깨달음' 또는 '도를 깨달음'으로 표현 되거나, 불성, 성령, 영혼, 귀신, 정령, 신선, 도사, 도인... 등의 무수히도 많은 말들로 왜곡된 '그것'에 대한 말들에 대해서 지식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어야 하니. 인연 있는 상근기 중생들에게나마 그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낱말들의 본래의 뜻을 설명하려 하니. 그대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디딤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첫째. 순수의식

'순수의식'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인간의 경험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순수의식'이라는 말 또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의식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보니.

 

순수 의ː식 (純粹意識) 『철』 경험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선험적(先驗的) 의식. - 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서 '선험'이라는 말은 '먼저 先 자와 '시험할 驗' 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경험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는 의식이라는 말은 옳은 표현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경험에 지배를 받지 아니한다는 말' 에 대한 지성체의 이해의 정도이다. 왜나햐면 '경험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 말, 말이 있을 뿐, '경험에 지배를 받지 않은 상태'에 대해서는 결코 경험 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순수의식'이라는 말은 '의식'이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써 '투명한 의식'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의식이 있지만.. 그 의식이 유리구슬과 같이 투명하여 보이지 않는 의식이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으며, 또한 갓 태어난 갓난아이와 같이 '의식'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은 '의식'이라는 낱말 또한 분야마다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본래 '의식'이라는 말은 '뜻 의' 자와 '앎 식'자로써 '뜻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다. 뜻을 아는 것이라는 말은 '말의 뜻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은 뜻이라는 낱말도 언어이며, '앎'이라는 낱말 또한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 말, 말 즉 언어를 인식하는 것,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대해서 '의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실이다. 의식이라는 말은 언어를 인식함을 이르는 말이며, 반면에 순수의식이라는 말은 '언어를 인식할 수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인간 또한 깊이 잠든 상태거나 인위적으로 마취된 상태, 또는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상태(기절. 기함) 등이 '무의식' 상태이며, '순수의식' 상태라는 말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은 말은 아니다. 어차피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죽음을 경험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그대가 잠드는 순간을 경험할 수 없는 것과도 다르지 않은 일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도를 깨닫기 위한 언어'에서의 '순수의식'이라는 말은 예수의 말과 같이 행위는 있으되 앎(識)=(말, 뜻, 언어, 의지, 마음, 생각)이 없는 상태, 즉 주체의식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이에 대한 석가모니의 말은 십이 연기법으로 설명되는 말들 중에 '무명, 행, 식, 명색... 에서의 '무명의 행위'로써 '강아지와 다를 바 없는 어린아이들의 행위'와 같은 행위를 뜻하는 말이 '순수의식'이라는 말의 뜻이다.

 

인간의 지식으로써는 기억할 수 없는 어린아이시절의 상태이기 때문에 경험이지만 기억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권'의 책에는 순수의식에 대해서 '경험의 오류'라는 말로 설명 되어 있다. 

지성체는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무의식'이라는 말이나 또는 '잠재의식'이라는 말로 표현 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상상하려는 어리석음에 의해서 더욱 더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지성체가 순수의식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까닭은 '언어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며, 지성체가 이해 할 수 있는 것,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있기 때문이며, 언어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는 상태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는 까닭은 기억세포에 저장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어 밖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는 말 또한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내가 있다는 앎' 자체가 언어이기 때문에 '말이 없는 상태'에 대해서 상상한다는 것은 착각일 뿐, 결코 올바른 생각일 수 없으며 올바른 앎일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써는 '깨달음'으로 표현되는 '그것'에 대해서 절대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언어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되거나 순수의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은 한정된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기원'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우주의 기원, 근원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기원을 아는 앎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세상에 깨달은 자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물들은 역사를 통덜어 뒤져 보더라도 극 소수에 불과하다. 인간이 인간으로써 갈망하는 가장 큰 일이 있다면 깨달음을 얻는 일이다. 공자 또한 그런 까닭에 했던 말이 "나는 오늘 아침에 도를 깨닫는다면 오늘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지는 까닭이다.

 

사실 공자의 말에는 올바른 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바탕은 여전히 중생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무성하지만... 일관성이 없다. 일관성이 없는 이유 하나만을 사례로 든다면... 부모에게 효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식에게도 잘 해야 하며, 군신유의라는 말로써 모두 잘해야 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잘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잘 못한다는 말과 배치되는 말이기 때문이며, 선악을 분별하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은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같은 맥락으로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만약에 '도를 깨닫는다는 일' 그것이 어떤 언어를 통해서거나 어떤 말을 상상하는 것이거나, 어떤 신비로운 말들을 상상하므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의 관념으로써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얻지 못할 까닭이 없을 것이며, 신비의 문이라는 말 또한 생겨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수행자라고 주장하는 자들,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자들, 스스로 그 길을 가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무수히도 많지만 인간 세상에서 '도'를 깨달았던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 깨달음이 불가능한 까닭은 '그것'은  '언어가 없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 대한 설명은 노자의 말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는 금강경에도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노자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불능견 여래'라는 말로 표현되는 말로써 소리와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내용이다. 소리, 즉 말소리나 언어, 그리고 형상이나 색상이나, 모양 있는 것들로서 '나'를 보려는 자는 삿된 길을 가는자라는 말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요지인 금강경 사구게의 내용이다. 

 

인간이 어리석어서 '불성'이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하거나, 성령이라는 말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순수의식이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하는 일에 대해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말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에 대해서 상상하므로써 환상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를 구하기 위해서 가는 방법은 이것도 아니며 저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말에는 '도를 구하는 일'에 대해서 '구하라 그러면 구해질 것이며,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다른 것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라는 말이며,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구하라는 말이다. 

 

그대에게는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다는 말은 마음이 없다는 말과 상대적인 말이다. 

마음이 본래 있던 것이라면 그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는 까닭은 그것이 본래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있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본무(本無)'를 보는 것이다. '본무'를 본다는 것은 눈이나 감각기관으로써 감지하거나 느끼는 경험이 아니라 '육체가 나다' 라는 앎'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며, 그런 앎(識)을 일컷는 말이다.

 

인간의 지식은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다른 생각들로써 모두가 터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워서 아는 정보 들과 같은 것이다. '지식'의 뿌리가 올바른 앎이 아니라, 단지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 순환하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 중의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에 대해서 소위 '도' '깨달음' '해탈'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심해탈이라는 말로써 표현된 것이다. 

 

심해탈이라는 말은 마음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말로써 마음이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앎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앎에 대해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는 불경에는 '앎 식' 자의 '識'이라는 글자로 표현된 것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은 '언어가 없는 상태'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깨달았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어떤 언어에 대한 집착이 깊어지고 강해 지므로써 집착하던 말, 말, 말들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불성이나 부처라는 말에 대해서 사실적인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광신자나 맹신들의 믿음과 같은 것이며, 예수의 말을 오해 하여 '하나님'이라는 것이 사실적인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또한 신을 받았다는 사람들 또한 그들 자신에게는 사실적인 사건인 것과 같은 이치이니. 어찌 인간의 관념이 사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인간들의 지식에 대해서 허무맹랑한 것이며, 어불성설이라고 하는 까닭은 사실적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사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깨달은 자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물들이 있다. 

사실 신비스러운 것은 '깨달은 자'라는 말로 표현되는 인물들의 말이 아니라, 인간들의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은 사실에 바탕을 둔 말이며, 인간들의 말은 사실에 바탕을 둔 말이 아니라 그릇된 앎에 바탕을 둔 말들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나다' 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앎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말이라는 뜻이다. 왜하냐면 '육체가 나다'라는 말과 '육체가 나가 아니다'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로써 사실적인 앎이 아니라 허구적인 것, 빈 것,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 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환상의 세계를 찾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법이 모든 고통을 건너서 무위자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법이며,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념법. 일념명상법은 유일한 길이다.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