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런 방식의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의 설명들 또한 인간 지식의 수준 정도에 따라서 이해는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초등학생들이 '일체유심조'에 대한 뜻에 대해서 이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물론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적은 말로 다가올 것이다.
사실. 초등학생들의 지식과 대학교수나 또는 인문학 거장이라는 자들의 '일체유심조'라는 말에 대한 지식수준의 차이는 별반 다를 것 없다. 그 지식의 차이기 있다면,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등학생들의 '일체유심조'라는 말에 대한 앎, 지식은 '원효대사와 해골바가지의 물'에 대한 것이며, 소위 최고급이라는 지석인들 또한 이와 같은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작은 가게에 들른적이 있었는데, 그 벽에 한자로 '일체유심조'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도가의 화원'이 그 연유를 물으니, 가게 주인 대답하기를... 자신의 지인이 명필가로써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그런 말, 즉 '일체유심조' 라는 글귀의 깊은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물어본 것이다. '화원'은 자신이 '일체유심조'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이해하는만큼 다른 사람들도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념이 깊어지기 이전이기 때문에... 혹시나 하여 물어본 것이다.
사실. 절간옆을 지나다 보면, 흔히 들려오는 소리들이, 일체유심조, 본래무일멀, 대광왕불화엄경... 등의 불경에 기록된 수많은 말, 말, 말들... 그런 소리들이다. 석가모니의 말이 왜곡되고 변질되면서 그의 가르침이 변절된채 전해지는 말, 말, 말에 집착하는 자들의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사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애래 라는 말을 안다고 떠드는 자들의 망상의 소리들이다.
사실. 초기경전의 주석서들 또한 그러하다.
초기경전을 해석한다는 자들, 학자들... 모두 중생이기 때문이다. 지식으로써, 인간의 과념 즉 경험에 바탕을 둔 고정관념으로써는, 사고방식으로써는 절대로 이해가 불가능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견해로써 이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모든 중생들의 지식의 바탕에는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 육체가 나다'는 방식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아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을 통과한 자이며, 이미 죽은자로써 '내가 있다' 가 아니라, '내가 본래 없는 것이다'라고 아는 앎이며, '내가 사람이다' 가 아니라, '나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아는 사람이며, '몸이 나다' 가 아니라, '몸이 나가 아니다' 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던 인물들의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시대의 지식이라는 학문들 또한 그러하다.
새로운 사실에 대해서 깨닫고 이해하는 앎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들이 아니라, 고대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말들을 끌어모아서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 시키는 일들이 지식의 모든 것이다. 지식의 발전이 그러하다.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에 대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하여 고대의 인물들 즉 아리스토텔레스나 예수, 소크라테스 등의 고대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자기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주장들일 뿐,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지 이해 조차 불가능 한 것들이 소위 현시대의 지식이며, 지식의 한계이다.
사실. 지식은 아득한 옛날이나 지금 현시대나 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으며,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없으며, 삶 조차도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다. 더 나아가 행복, 자유, 평화... 를 원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인간들이 인간들끼리 서로 견주기 위해서 얻는 것들이 지식이다.
이렇듯 올바른 앎은 겨자씨 만큼도 없으나... 서로가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서 가공된 말, 말, 말들로써 서로를 주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더 많아지는 것이, 끝이 없는 것이 인간들의 지식인 것이다. 지식이 시작도 모르면서 그 끝이 없는 까닭은... 원인도 모르며 끝도 모르는 까닭은, 올바른 앎이 아니라, 근거 없는 것들에 대한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들 지식의 오류, 착각에 대한 비유를들자면.
인간은 누구나 '내가 태어났다'는 앎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내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다'라는 주장들, 내 생년월일이 '그날이다' 라는 앎들에 대해서 올바른 앎이라고 생각함에 대해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의 지식, 주장들 모두가 그러하다.
사실. '내가 태어났다'는 앎과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아는 앎은, 자신 스스로의 경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대가 태어남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대의 부모로부터, 그렇게 들었던 생각에 대해서 '내가 경험자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다-는 뜻이다.
'내 생일이 서른번째, 또는 마흔번째... 라는 지식' 또한 그러하다.
그대가 기억하고 있는 나이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지식 또한 그러하다.
사실. 어린아이에게 숫자를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수천번씩이나 반복해서 가르쳐야 하듯이, 그대 또한 그런 방식으로 숫자를 인식한 것이며, 누군가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실 그대의, 아니 인간들의 모든 지식들이 그런 방식으로써의 타인들로부터 세뇌된 결과이며, 그런 습관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대가 경험한 것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워서 알게된 타인들의 지식에 대해서 '내가 안다'는 방식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지식이 그러하다. 불경이나 성경 등의 경전들이 그러하며, '일체유심조'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그러하며,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 또한 그러하다.
지식의 무한한 어리석음은 종교나 학문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타인들로부터 세뇌당한 지식이 고정관념화 되면서 자신의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종교를 비롯한 모든 학문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를 이해 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는 종교에 대한 갈등이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일념을 깨닫고 나면, 종교들간의 갈등이나 다툼들, 서로가 진리라고 떠드는 자들에 대해서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본다는 것이다.
육도윤회라는 말에 속아서 평생을 허비하는 자들, 원죄라는 말에 속아서 평생을 싸움으로 일관하는 자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 학문들... 지식은 지식이지만 지식이 아니라 무식이며, 무식을 주장하는 것들이 지식이니. 무한하기가 우주보다 더한 것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인간들의 지식의 결과가 현 시대 인간세상의 실상이다.
인간이 인간이면서 인간들끼리 죽는 날까지 경쟁과 투쟁, 전쟁을 일삼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존재 자체가 경쟁, 투쟁, 전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며, 인간세상이 곧 생존경쟁의 전쟁터와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의 말이나 석가모니의 말, 소크라테스, 노자와 장자, 그리고 기타 불이일원론을 역설했던 인물들의 말은 지식으로써는 절대로 이해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을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이며,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말은 지식으로서 이해 할 수 없는 말이며, 지식으로서는 그들의 말의 근본원인에 대해서도 이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존재했던 시대에는 현시대와는 달리 문법이라는 말이 없었으며, 논리적이라는 말이 없었으며, 육하원칙이라는 말 또한 생겨나기 이전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곳에 기록되는 말들이 그들의 말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렇기 때문에 지식으로써도 '진리'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할 수 있는 까닭은 논리적이라는 말과 육하원칙이라는 법칙에 의거하여 설명되는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식은 논리적인 것 같지만, 절대로 논리적이지 않은 말들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들이다. 반면에 진리, 즉 진실된 앎, 진실된 말은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며, 육하원칙의 법칙으로 보더라도 올바른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이곳에 '일체유심조의 더 깊은 뜻'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지극히 논리적인 말이다.
사실. 본래무일물이기 때문에 일체유심조이며, 일체유심조이기 때문에 본래무일물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주, 즉 세상 천지만물이 있는 것이며, 마음이 없다면 세상 천지만물이 없는 것이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없다'는 말에 대해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 아닐 수 없겠지만....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까닭은,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이나, 말을 배웠으나 채 마음이 형성되기 이전의 아이들을 봄으로써 이해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 대한 설명으로서, 아이들이 태어나서 마음이 형성되기 까지의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써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검색창에 '일체유심조'라는 말이나,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을 비롯하여 석가모니의 진언이 전해지는 말들을 검색해보거나, 예수의 말을 검색해 보거나, 노자와 장자, 그리고 소크라테스로부터 남겨진 말들을 검색해 보면...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글들이 끝없이, 끊임없이 나열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언술이 뛰어난 자들에 의해서 인간세상이 한시도 평온할 날이 없는 것이며, 인간세상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투쟁과 전쟁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그대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 하는가말이다.
초등학생들이 이해 하는 '원효의 해골바가지의 물' 이라는 말 이외의 다른 어떤 지식을 주장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아니. 그대 스스로 자문해 보라는 뜻이다.
인간들은 누구나 삶의 목적에 대해서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사유해 본 적은 있는가?
사실. 그대가 행복할 수 없다면, 세상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사람들 모두가 그대와 같이 행복을 찾는 사람들 뿐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만 하는 것일 뿐,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사람조차 없는 것이 지식이며, 지식의 한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현시대까지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에 행복한 세상이 있었다면,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인류역사이래 지식 수준이 가장 높다는 현시대 까지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 만약에 '행복'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고 이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이 인간세상에서는 가장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이며, 가장 훌륭한 지식인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이런 글들로써 의심 없이 진리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세상에서 이런 글을 보고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복이 많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진리'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인생이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며, 삶의 길, 방법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마음을 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광신자거나 맹신자거나 또는 다른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면, 우선 알아야 할것이 있다면... 자신이 지식에 대해서,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이 있기 때문에 설명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육하원칙이라는 법칙에 따라서 자신의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 가공된 것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런 사실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어야만 삶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가령 자신이 광신자라면, 육하원칙에 따라서...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광신자가 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사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며,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아는 앎 또한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죽을 것이다'는 말을 알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 사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내가 고통스럼다면'... '내가 고통이라는 말, 말, 말'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고통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는지, 또는 내가 나이를 안다면- '내가 언제 어디서 나이를 어떻게 왜, 알게 되었는지' 에 대한 사유를 통해서 그 원인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대의 모든 지식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지식을 초월한 앎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따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로병사와 히로애락의 원인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원인이 왜,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분명히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말, 내가 사람이다는 말, 내가 여자다는 말, 내가 남자라는 말, 내가 살고 죽는다는 말, 말, 말들... 그 이전에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사람이라는 생각, 내가 남자라는 생각, 내가 여자라는 생각, 내가 산다는 생각, 내가 죽는다는 생각, 생각, 생각들... 그 이외의 모든 잡다한 지식들... 대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방식으로 추적해 들어가다 보면... 그 해답은 간단하고 명료하며 단순하다. 왜냐하면,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기억들일 뿐, 다른 원인이나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할 수 있다면... '내가 사람이다'는 앎 또한 하나의 지식이며,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말들로써 풍문, 낭설일 뿐, 다른 근거는 없다-는 뜻이다.
'신, 영혼, 절대자, 하나님'이 있다는 말 또한 그러하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세뇌 당한 것이며, '불성'이나 '성령'이나 '영혼'이 있는 것이다-고 세뇌 당한 것이며, 서로가 다르다고 세뇌당한 것이며, 서로가 옳다고 세뇌당한 것이며, 서로가 싸우라고 세뇌당한 것이다. 언술이 뛰어난 자들로부터... 그런 방식으로 세뇌당한 것, 그것에 대해서 '나, 나의 마음, 나의 지식, 나의 지혜' 라는 방식으로 세뇌당한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마음이 있다'는 말, 마음이 있다는 생각 또한 그러하다.
그 모든 것들, 그대의 모든 지식들이 '진정한 나'가 '아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앎에 대해서 명색이 '道' 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한글로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다. 석가모니의 말이 왜곡되면서 '불성, 성불, 해탈, 극락'이라는 말로 현되는 것이며, 예수의 말이 왜곡되면서 '성령, 하늘나라, 천국' 등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사실. 진리는 단순한 것이며, 논리적인 것으로써 육하원칙에 어긋남이 없는 말이다. 반면에 지식은 논리적이지 못한 것이며, 복잡한 것이며, 육하원칙으로 보더라도 근거 없는 말들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들이다. 진리는 올바른 앎으로써 평평하게 화합할 수 있는 앎이며, 반면에 지식은 단견이며, 편견이며, 소견에 대한 주장들로써 불평불만만 가득한 것으로써 불행이며, 고통인 것이다.
지식은 삶과 죽음이라는 말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듯 인식하여 사실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며, 진리는 삶과 죽음이 말로 지어진 말일 뿐,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으로써 고통이 본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해 하는 것이다.
'일체가 모두 마음이 지어낸 환상'이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의 더 깊은 뜻'에 대한 설명과 같이...
인연있는이에게 영원한 평화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에서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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